1140화
포도밭 남부·
-쿠르륵!
-카악!
남부 쪽 포도밭에 머물던 신성 고블린들도 난리가 난 상태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언데드류 와이번, 데스 와이번들이 고블린 군락을 습격해 왔다·
까마귀 떼를 연상케하는 대규모 공중 병력이 강하하여 신성 고블린들을 발톱으로 찢어버리거나, 낚아채어 고공에서 떨어뜨리길 반복했다·
다른 두 방향과는 달리 백마법으로 반격을 가하는 건 가능했지만, 침입자의 수가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았다·
-키르르르륵! (도망쳐라!)
신성 고블린들은 도망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블린 군락의 하늘 위· 그곳에는 거대한 암벽을 떼어내 개조해 만든 구조물 두 개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구조물 뒤로는 언데드 살점이 붙어 있고, 살점과 연결된 용의 날개가 움직여 구조물을 하늘에 띄우고 있었다· 그 안에서 수백 마리의 데스 와이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중간에 우뚝 떠 있는 건 용 머리가 달린 언데드 베히모스 전함이었다· 헥토르가 소환학 수업시간에 제작하는 데 성공한 바로 그 전함이었다·
헥토르 무어의 제6군단·
벨른과 다섯 군도를 영역으로 두고 있는 6군단의 비행 병력이 일제히 쏟아져 나온다· 신성 고블린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가운데, 선두에 나와 도망치는 고블린들을 쫓는 거체가 있었다·
-캬르륵! (드래곤이다!)
화르르르르르륵!
새까만 외형의 악룡으로 변신한 헥토르가 입을 쩍 벌리고 드래곤 브레스를 방사하며 주위의 군락지를 불태웠다· 단숨에 수많은 신성 고블린을 잿더미로 만든 악룡이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도 브레스를 발사했다·
후끈한 열기가 동반된 검은 화염이 펼쳐졌지만, 어느 허공의 지점을 기점으로 브레스가 벽에 막힌 것처럼 퍼져 나갔다·
여기서부터는 신성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고블린들이 그 안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공중에서 한 바퀴 선회한 헥토르가 몸집을 줄여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무 꼭대기에 착지한 채 표정을 와락 구긴 그가 통신 수정구를 들었다·
“여기는 남부다· 결계석 제거는 아직인가?”
금방 통신 수정구로 답변이 돌아왔다·
말콤의 목소리였다·
<경계가 삼엄해서 시간이 걸렸다· 이제 금방이야·>
* * *
키젠 학생들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밀려들어 신성 고블린들을 몰아갔다·
최중앙에 위치한 통칭 ‘메시아’가 있는 포도밭은 바로 공격하는 게 불가능했다· 메시아가 직접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가장 강력한 신성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이 결계는 특수했다· 심지어 같은 신성 고블린들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시몬은 이 점을 파악하고 다른 포도밭부터 공격하기로 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쫓겨온 패잔병들은 메시아 고블린이 있는 본진으로 가지 못하니, 그 옆의 결계가 펼쳐진 포도밭으로 몰려들었고 그곳에 상당수 개체가 밀집된 형국이 되었다·
이제 이쪽의 결계만 제거한다면 공중 화력으로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이 결계 제거를 위해 마투가 뛰어난 학생들· 특히 마검 사용자 쥴과, 도플갱어의 말콤이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결계는 4개의 신성 결계석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결계석 주위의 경비는 삼엄했다· 바로 이곳 중 한 귀퉁이에서·
촤아아악!
촤아아아아아악!
쥴이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마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교복의 배리어가 깨지고, 등 뒤에 화살이 꽂혀 있거나 신성에 당한 상처가 있었지만 집념으로 검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키륵!
기세에 밀린 신성 고블린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쥴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제단 위로 올라와, 그 위에 놓여 있는 결계석을 끄집어냈다·
“여기는 쥴·”
피로감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쥴이 발로 강하게 결계석을 짓밟아 부수고 말을 이었다·
“1번 결계석 파괴했소·”
거의 비슷한 시점에 말콤으로부터 2번 결계석을 파괴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서서히 결계를 이루고 있는 힘이 흐릿해졌고, 이제 남은 결계석은 두 개뿐이었다·
신성 고블린들도 백마법을 쓸 수 있는 만큼 지성이 있었고 전술을 이해했다· 그들은 남은 두 개의 결계석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계석이 있는 제단으로 모여들었다·
-캬륵! 캬르륵! (어둠의 인간들이 온다!)
쫓겨 온 듯 어깨에 상처가 난 고블린이 허겁지겁 마지막 4번 결계석이 있는 제단으로 뛰어들어 오고 있었다·
제단 근처를 지키고 있던 신성 고블린들이 그 모습을 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캬르르륵! 케에에에! (다른 결계석은 함락당했다! 여기도 위험하다!)
쿵!
가장 앞에 서 있는 사제 고블린이 손에 든 지팡이를 제단 바닥에 내려쳤다·
-케에에엑! 캬륵겍···!(이곳만큼은 막아야 한다! 모든 고블린을 이리로····)
고블린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몸에 일자로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위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던 다른 모든 고블린도 마찬가지였다·
서겅! 스릉!
제단에 시뻘건 핏물이 튀어오르며, 육편 덩어리가 된 고블린들이 사방에 날아다녔다· 그 많은 수의 신성 고블린이 단숨에 전멸당했다·
척· 척·
방금 소식을 전해온 고블린이 제 얼굴을 붙잡아 벗겨냈다· 작은 고블린의 몸통이 마치 고치처럼 벗겨지고, 큰 키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간 인간들,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리와요·]
거미부대의 대장 에르제베트였다·
그녀는 이미 3번 결계석을 차지하고, 4번 결계석은 다른 인간 둘이 일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
[유능함의 차이·]
제단에 다가온 그녀가 결계석을 떼어내고는 공중으로 휙 던졌다·
[인간 바보들보다는 군단이 훨씬 완벽한걸요· 굳이 저런 인간들에게 신경을 쏟는 우리 군단장님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만-]
공중에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결계석이 일순 땅에 내려오기 직전에 버터 갈라지듯 반으로 잘리며 바닥에 투둑 떨어졌다·
[이 또한 군단장님의 뜻이라면 따르겠사와요·]
모든 결계석이 박살 나고, 포도밭 전체를 감싸고 있던 결계가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했다·
* * *
동부 함대·
동쪽에서의 공세를 맡은 시몬의 제7군단은 특별히 지상군을 투입했다·
이번에 함께 합을 맞추게 된 좀비집사와 마코는 밀대 걸레를 든 백귀들을 전면에 내세워 신성 고블린들을 말 그대로 밀어버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프린스와 일반 좀비들이 뒤따라가게 하며 머릿수를 맞추었다·
지상군이 힘으로 신성 고블린들을 압도하여 결계 안으로 쫓아 보내고·
<시몬 오리지널 – 강습대>
하늘에서는 시몬의 강습대 효과를 받은 스컬윙들이 내려와 정예병인 신성마법을 사용하는 사제 고블린들은 핀포인트로 공격해 숫자를 줄여 나갔다·
시몬은 베히모스 전함 위에서 통신 수정구를 든 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는 7군단의 에르제베트·]
마침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곧 결계가 걷힐 것이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투명한 결계가 사라져 갔다· 결계 안의 포도밭에 숨어 있던 신성 고블린들이 분노하며 함성을 질러댔다·
완벽한 무대가 갖추어졌다· 시몬이 통신 수정구를 들었다·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겨· 헥토르?”
-먼저 간다·
촤아아아아!
헥토르가 저 멀리서 날아가더니, 단숨에 악룡으로 변했다·
시몬도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마정석을 공중으로 던졌다·
“미르미즈·”
연기 속에서 고개가 튀어나와 마정석을 꿀꺽 삼킨 미르미즈, 그리고 헥토르의 입이 쩍 벌어지며 두 드래곤의 입에서 동시에 빛이 번쩍였다·
화력의 정점, 드래곤 브레스·
이제 신성 고블린들을 지켜줄 지붕은 없다·
두 방향에서 쏟아진 압도적인 화력의 브레스가 교차된 채 퍼져 나가며 주위를 모조리 불태웠다·
* * *
첫 전투는 키젠 학생들의 압도적인 대승으로 끝났다·
메시아의 신성 고블린 무리는 이번 기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이제 메시아가 있는 중앙 포도밭의 결계를 직접 공격할 수 있게 됐고, 시몬도 마음 같아선 바로 기세를 몰아 들이닥치고 싶었지만·
-여기는 엘리사! 계속 유령선을 띄우기에는 칠흑이 부족해!
-여기는 카미바레즈! 우리 쪽 샤텔도 공중에 띄운 암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아군도 싸우느라 칠흑이 거의 다 소진된 상황·
전쟁을 하다 보면 만족하고 물러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시몬은 첫 공세는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돌아가자·
시몬의 지시에 4개의 함대들이 본진인 해안가로 돌아갔다· 이 젊은 네크로맨서들이 지나간 자리는 가히 불타는 영역만 남아 있었다·
로하론에 사는 토착 고블린의 머릿속에 지옥으로 일컬어지는 순간이었고, 마을에 사는 인간들은 신성연방의 규율상 자중했을 뿐이지 승리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대수도원장과 엘렌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전장이었던 포도밭으로 직접 와보았다·
“···놀랍군·”
포도밭이 싹 다 타버릴 것을 각오했는데 불길도 적절하게 잡혔고 멀쩡한 포도밭도 있었다·
내심 가슴 졸이던 주민들은 환하게 웃으며 뛰어갔다·
“영리하게 공격을 특정 지역에 몰아서 했나 봐요!”
“마구 싸운 줄 알았는데 그런 디테일이 있었다니!”
“다행이야·”
물론 대수도원장은 포도밭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랬다· 그들은 잿더미가 된 신성 고블린들을 보고 있었다·
고블린들이 신성을 다루고 마을에 피해를 입히기 시작한 이후 포도밭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왔건만, 암흑연합의 룬 리그 대표들은 단 하룻밤 사이에 그들이 내내 해온 성과 그 이상을 이뤄냈다·
그래도 신성 몬스터는 신수· 규율에 묶여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신수의 죽음에 기쁨을 표현할 수 없지만 그들은 조용히 서로를 끌어안거나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모두가 포도밭에서 짙은 여운에 빠져 있을 때·
“대수도원장님! 큰일 났습니다!”
한 마을 청년이 대수도원장과 엘렌에게 뛰어왔다· 대수도원장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 그게···!”
청년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메, 메시아가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 *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수도원장은 모두를 이끌고 다급히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목도했다·
마을의 광장 한복판에 한 무리의 고블린들이 들어와 있는 광경을·
그들은 신성연방과 데바교를 상징하는 깃발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흰 로브를 걸친 사제 고블린들이 호위하듯 좌우에 서 있었고, 노예로 전락한 인간들이 짊어진 가마 위에 타고 있는 새하얀 고블린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들을 부리며,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 있는 배불뚝이 백색 고블린의 모습은 극도로 오만하고 위협적이었다·
‘마을의 결계를 뚫고 들어온 건가!’
대수도원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메시아를 떠받치고 있는 인간들을 본 그는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라우스, 여기 있었군· 대수도원장·]
메시아가 말했다·
그의 목에는 신성연방의 백성이자 프리스트 자격을 상징하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한때 납치당한 사람들을 돌려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 물건을 메시아에게 건네주었지만, 대수도원장이 무엇보다 후회하는 일이었다· 영리한 고블린들은 프리스트 신분을 이용할 줄 알았고 저 자격으로 하늘섬과 협상하기도 했다· 얼마나 저들에게 휘둘리고 고통받았던가·
하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대수도원장 또한 예를 갖추었다·
“라우스, 형제여· 마을에는 무슨 일이오?”
[하룻밤 사이, 나의 왕국에 사악한 어둠의 인간들이 침입하여 내 백성들을 공격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메시아의 동공에 신성이 일렁였다·
[혹시 그대들이 사주한 일은 아닌가?]
엘렌과 등 뒤의 주민들이 움찔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보인다· 다들 동요하고 있었다·
‘망할 고블린 놈·’
대수도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 내가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놈과 네놈의 자식들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면, 그리하여 원수를 갚고 로하론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 한 몸 지옥에 떨어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 메시아는 마을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마을 사람 전원을 인질로 삼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리고 메시아는 대수도원장이 본 그 어떤 프리스트보다 강했다·
해안에 있을 키젠에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으나, 그의 눈이 닿고 있으니 여의치 않았다·
‘틀림없이,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대수도원장의 입이 열렸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
대수도원장이 그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엘렌은 천천히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