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2화
바다와 바다 사이를 갈라놓듯 그어져 있는 투명한 선·
신성연방의 해역 결계였다·
로크섬을 보호하는 키젠의 결계에 비하면 조잡했지만 이 방대한 바다를 양단하는 규모 자체를 생각하면 놀라웠다·
애초에 결계마법 자체가 공격적인 암흑연합보다는 방어적인 신성연방이 훨씬 더 발달해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강림하듯 내려오는 열댓 명의 프리스트들·
그들은 커다란 십자가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상공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옷을 제대로 입고 갑판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프리스트들이다·”
“우리가 진짜 신성연방에 오긴 왔나 보네·”
다들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시몬 만큼은 연례행사를 치르듯 태연했다· 그때 옷소매를 가볍게 붙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겁먹은 얼굴의 카미바레즈가 시몬의 옷자락 붙잡은 채 떨고 있었다·
시몬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가볍게 감싸주었다· 놀란 듯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가 이내 힘이 빠졌다· 미약한 목소리가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시몬·”
“국경에서 진행하는 배 내부 조사인가 봐· 금방 끝날 거야 카미·”
이내 프리스트들이 하나둘 크리스탈호 갑판에 안착했다· 저쪽도 긴장했는지 주위를 경계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적진에 들어온 기분일 테니까·
그들은 십자가 모양의 아티팩트를 세워놓고 배 위에는 연방 조사국의 깃발을 잠시 걸어두었다· 수사 중이니 연방의 함대로부터 공격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암흑연합의 룬 리그 감독관 메도우입니다·”
배의 선장인 메도우가 선원들을 이끌고 걸어 나왔다·
“신성연방의 조사국 토른이오·”
두 사람은 악수는 생략한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조사하겠소· 입항과 아공간 문제는 양측 간에 이야기가 된 부분이나 선박 조사는 엄연히 중요한 절차이니 협조해 주셨으면 하오·”
“물론입니다·”
“선내의 조사만 하겠소·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나와 있소?”
“이 인원이 전부입니다· 여기 탑승자 명단입니다·”
명단을 받아 든 토른이 손짓을 하자 조사관 프리스트들이 빠르게 흩어져 배 안으로 들어갔다· 갑판에 암흑연합 대표들과 선원들은 남아 있는 프리스트들과 조금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팽팽한 공기가 감돈다·
국제 관계와 관련된 엄중한 문제이니 프리스트들도 크게 네크로맨서들을 자극하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태도로 바닥에 검사용 순수 마나 마법진을 깐 뒤 선원들을 한 명 한 명 밟아서 지나가도록 했다· 다들 줄을 서서 빠르게 통과했다·
‘좋아 좋아· 이대로만 무사히 넘어가자·’
시몬은 집중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룬 리그는 반드시 성공적으로 개최되어야 했고 그 어떤 문제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3대 학교 학생들이 제 발로 합숙에서 나간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신성연방에 넘어가기 전의 일이니 크게 상관없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서로가 다른 문화권에 있다 보니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당장은 별일 없어 보이네·’
시몬은 슬쩍 동공을 돌려 동기들 쪽을 바라보았다· 경계하듯 장비나 무기를 느슨하게 쥔 채 대기하는 남학생들과 그 뒤에 서 있는 여학생들이 보인다· 메이린과 카미바레즈는 서로 꼭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하운드 키즈 쪽·
가끔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
갑판 바닥에 검은 그림자 같은 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걸어가고 있는 프리스트의 다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저주다·
그 저주가 뻗어 나가며 프리스트의 발밑에 연결되려고 하는 순간·
파악!
시몬이 바람처럼 나타나 그 선을 대신 밟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칠흑이 신발 아래로 거칠게 튀었다· 시몬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무 무슨 일이오!”
걸어가던 프리스트도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든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살짝 앳된 얼굴을 보니 신입 같아 보였는데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시몬은 웃는 얼굴로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실수로 칠흑을 강하게 밟고 움직였을 뿐이에요· 제가 가끔 긴장하면 이런 실수를 하거든요·”
“어 어서 들어가시오!”
위협하듯 지팡이를 겨누었지만 겨냥한다기보다는 반사적 방어 태세에 가까웠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한 시몬이 등을 휙 돌렸다·
싸아아-
그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시몬은 저벅저벅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네 명의 하운드 키즈가 모여 있는 쪽이었다·
처억·
시몬이 자리에 멈추고 살짝 헨릭 왕자에게 예를 갖춘 뒤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크레이그·”
불타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크레이그 슈텔츠헨이 낄낄거리고 있었다·
“무슨 짓이란 게 무슨 말이지? 리더·”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프리스트에게 저주를 걸려고 했잖아· 이건 국제적인 외교 절차야· 룬 리그를 망칠 생각이야?”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크레이그가 두 손바닥을 어깨 위로 들어 보인 뒤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얘들아 내 말 맞지? 키젠의 학생회장은 어떻게든 룬 리그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역시 키젠에서는 이번 룬 리그에 사활을 걸었나 봐·”
시몬의 눈매가 내려갔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니 그렇잖아· 이번 행사는 너희들의 의도가 뻔히 보여서 구역질이 나·”
그가 느물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결사 때문에 흔들리는 암흑연합의 위상을 어떻게든 세워보려고 외적과의 교류전을 유치해서 키젠만이 에프넬을 막을 수 있다는 걸 암흑연합 주민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겠지·”
시몬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운드 키즈는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본래 목적은 결사의 의도를 막기 위함 그리고 그들의 목적을 알아보기 위함이지만 이건 1급 기밀이라 발설할 수 없다·
시몬이 입을 열었다·
“결사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신성연방과의 군사적 갈등을 멈출 필요가 있어· 이건 필요한 외교야· 그리고-”
시몬의 머릿속에 일순 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결사의 실험체로 팔려 나가는 사람들 죽어가며 인간을 공격하던 드래곤 거대한 재해에 삶의 터를 버리고 도망치는 주민들까지·
“지난 1 2년간 대륙은 황폐화됐고 어려운 시기인 만큼 모든 대륙민들이 이번 룬 리그를 기대하고 있어· 네 그 치졸한 장난으로 큰일을 망칠 셈이야?”
“치졸?”
발끈한 크레이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헨릭이 그의 어깨를 붙잡아 다시 앉혔다·
“여기까지 하지· 프리스트들도 보고 있고 메도우 경의 체면도 있으니·”
크레이그에게 그렇게 말한 헨릭이 이번엔 시몬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크레이그는 내가 잘 타이르겠네·”
“감사합니다 왕자님·”
시몬은 예를 취하고는 크레이그를 바라보았다·
“크레이그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그때는 가만있지 않을 거야·”
크레이그가 코웃음을 쳤다·
이내 시몬이 키젠 쪽으로 돌아오자 바로 메이린과 카미바레즈 뒤이어 클라우디아 제이미 피츠제럴드까지 몰려들었다·
“시몬! 괜찮아요?”
“뭐래? 뭐래?”
시몬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별일 아냐· 프리스트한테 장난을 치려고 한 것 같은데 적당히 주의만 주고 돌아왔어·”
그렇게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몬 일행을 바라보던 크레이그가 숨죽인 채 낄낄 웃었다·
‘네가 방해할 줄 알고 다른 계획을 준비해 놨지·’
장소는 함내 보일러실·
신성연방의 조사를 앞두고 선원들이 모두 밖으로 나갈 즈음 크레이그가 손을 썼다· 몰래 가져온 아공간 반지에서 특수한 저주 언데드들을 쏟아놓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좁은 보일러실 복도 전체가 시뻘겋게 물든 채 찐득거리는 저주들로 가득할 것이다·
선내를 조사하는 프리스트들은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테고 한 놈이라도 그곳의 문을 여는 순간·
‘모든 저주가 쏟아진다· 즉사를 피하기 힘들겠지·’
대표들이 탄 배를 조사하던 프리스트 조사관이 저주에 휘말려 사망하면 에프넬의 하늘섬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룬 리그의 존속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헨릭 왕자나 다른 동료들에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이건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크레이그는 믿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룬 리그도 키젠을 견제하기 위해 우리를 보낸 왕국의 가신들도·’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룬 리그는 끝이다·’
* * *
저벅 저벅·
프리스트들은 손전등을 들고 선내를 조사하고 있었다·
“아까 그 네크로맨서 놈들 이쪽 째려보는 거 봤나?”
“말조심하게· 국제 관계에 피해를 줄 만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공문이 내려왔는지 알지 않나·”
조사관 프리스트들은 방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창고를 확인해 보기도 하며 신성연방에 해를 끼치거나 부정한 선전물 따위가 있는지 확인했다·
“여긴 이상 없어·”
“여기도·”
킁킁·
한 방의 냄새를 맡아보던 프리스트가 헛웃음을 쳤다·
“요즘 네크로맨서들은 향수도 쓰나? 시체 썩은 내나 풀풀 풍기던 놈들이·”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저들도 달라졌다고 하네· 스켈레톤이 사람보다 더 깨끗하다더군· 심지어 향까지도 난다고 하고·”
“하하하하! 하여간! 저쪽이나 이쪽이나 요즘 젊은것들은 유난이야!”
퉁퉁·
그때 벽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한 프리스트가 걸음을 멈추고 벽면에 귀를 댔다·
“이 너머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보고 오겠네·”
“조심하게·”
프리스트는 성큼성큼 선실 복도로 나가서 다시 기관실 쪽으로 들어왔다·
내부는 습기가 차 있었고 덥고 어두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랜턴을 비추며 걸어갔다·
퉁퉁·
퉁·
소리가 조금씩 크게 났다· 갑판에 있던 네크로맨서들에겐 나지 않던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일러실 앞에 멈춘 뒤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이 훅 몰려든 그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짧게 기도했다·
“위대한 데바 여신이여· 신도를 지켜주소서·”
그가 땀이 고인 손으로 보일러실 문 손잡이를 잡고는 조심스럽게 열었다·
* * *
한 시간 뒤·
“철수해라! 움직여!”
“수고하셨소!”
선내에 들어갔던 프리스트들이 하나둘 배 갑판 위로 올라왔다·
이들의 리더 격이던 신성연방 조사국의 토른이 함장 메도우에게 다가갔다·
“선내는 확인했소· 이상 없더군·”
“수고했습니다·”
“피차 국민들이 기대가 많은 것 같던데 후회 없이 잘해보십시다·”
토른이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고 메도우도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토른이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 돌아왔나?”
“예!”
“철수하라!”
그렇게 조사국의 프리스트들이 떠나고 있는 가운데 초조해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뭐야? 왜 아무 반응도 없지?’
보일러실에 흉계를 꾸민 크레이그였다·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갔다면 틀림없이 저주에 휘말려 죽었을 터 운이 좋아도 최소한 목숨이 위중한 중상이어야 했다·
‘보일러실에 들어가지 않은 건가? 아니면 룬 리그를 강행하려고 신성연방 놈들이 그냥 시체를 버려두고 온 건가?’
관리국 프리스트들이 처음에 타고 왔던 십자가 모양의 아티팩트를 하나둘 붙잡았다· 이내 십자가가 하늘로 서서히 떠오르며 그들의 몸도 두둥실 떠올랐다·
그들이 떠나고 크리스탈호도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학생들도 비로소 긴장을 풀고 기지개를 켜며 움직였다· 다들 자유롭게 흩어지고 선원들도 일을 하러 걸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크레이그가 벌떡 일어나 보일러실로 향하려는 그때·
저벅· 저벅·
그의 옆으로 누군가 느릿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집사복을 입고 외눈 안경을 쓴 남자였다·
한 손에는 밀대 걸레를 어깨에 짊어지고 다른 한 손에는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이곳의 선원이라 생각한 크레이그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려 했지만·
[실례합니다·]
“?”
섬찟한 뭔가를 느낀 크레이그가 뒤를 돌아본 순간 집사복을 입은 남자가 손에 든 양동이를 그의 머리에 끼얹었다·
푸화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크레이그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자리에 쓰러졌다· 양동이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끈적하고 시뻘건 저주들이 그의 몸에 옮겨붙어 소리를 내고 있었다· 크레이그가 보일러실에 준비했던 바로 그 저주였다·
“제길! 이게 뭔! 아아아아악!”
[선내에 오물을 싸고 오셨더군요· 치우느라 애먹었습니다·]
퉁·
아직 안에 저주가 드글거리는 양동이를 내려놓은 집사가 외눈 안경을 추켜올렸다· 크레이그가 얼굴에 엉겨붙은 저주 덩어리를 떼어놓으려 애를 쓰며 외쳤다·
“네놈은 누구···!”
[제 주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겁니까? 한 번만 더 같은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7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 좀비집사·
그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주눅 들 만한 거대한 살기를 뿜어내며 크레이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