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85)
After Story 22· 언젠가 다시
시간은 흐른다·
이날 이리야는 딸아이를 출산했다·
난산이었다·
“으으····”
“이리야? 괜찮아? 정신이 들어?”
오랜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느라 지쳐 혼절해 버린 이리야는 파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은하가 들어왔다·
“주님 여기는····”
“병실이야· 기절한 사이에 이동했어· 출산하느라 고생했어· 많이 힘들었지?”
“네에···· 그래도 견딜 만했어요·”
“거짓말· 견딜 만했다는 사람이 의식을 잃어?”
“킥···· 사실 죽는 줄 알았어요· 많이 아프기는 하더라고요·”
은하가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다·
이리야는 절로 안심이 드는 한편 가슴 속이 따스해짐을 느꼈다·
이내 그녀는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주님 우리 애는요? 애는 어떻게 됐나요? 건강해요? 혹시 어디 이상이 있다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이는 건강하게 잘 태어났으니까· 우량아래· 손가락 발가락도 멀쩡해·”
이리야의 반응은 예상한 바였다·
키득거리며 그녀를 달랜 은하는 병실에 마련된 아이용 침대에서 딸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대로 그녀에게 넘긴다·
“얘가 우리 애야· 예쁘지?”
“···뿔이 두 개나 있네요· 사전에 초음파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큰 것 같아요· 이래서 많이 아팠구나····”
솜털 같은 보랏빛이 감도는 머리칼을 지닌 딸아이·
아직 눈을 뜨지 못하는 아이는 아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머리 양옆으로는 길쭉하면서도 곱게 휘어진 뿔들이 돋아 있었으며 엉덩이에는 악마 꼬리처럼 끝이 화살표처럼 생긴 꼬리가 붙어 있었다·
등에는 조그만 날개 한 쌍이 접힌 채로 나 있기도 했다·
주로 드래곤 계열 몬스터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날개였다·
“블랙 드래곤? 서큐버스 퀸? 저랑 주님이 저주에 걸렸을 때의 영향을 받은 것 같네요·”
“그런 것 같더라· 어느 쪽이든 제3위계 몬스터가 베이스다 보니 재능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플레이어가 된다면 대성하겠네요· 아이 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줘야지·”
이리야의 품에 안겨 잠든 아이가 몸을 꼼지락거린다·
어머니의 품이란 것을 아는지 그녀가 있는 쪽으로·
이리야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 아가야· 태어나 줘서· 엄마가 열심히 사랑해 줄게·”
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리야는 강하게 확신했다·
“아이의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
“생각해 놓은 게 있기는 해·”
“어떤 건가요?”
“은혜 은[恩] 자를 써서 노유은·”
“노유은···· 좋은 이름인 것 같아요·”
노유은·
나직이 그 이름을 되뇐 이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딸아이의 이름이 결정됐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녀들을 축복하러 병실을 찾아오고는 했다·
“축하드려요 어머니·”
미래 유성도 축복했다·
한편으로는 간절히 빌었다·
“부디 오빠 말 좀 잘 듣는 착한 여동생으로만 자라 다오···· 말썽도 피우지 말고·”
* * *
노유은도 무사히 태어난 이상 미래 유성에게 주어진 과업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시대에는 없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날부로 미래 유성은 차근차근 미래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언젠가 이때가 올 것을 내심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미래 유성은 따로 그들을 만나 마지막으로 미래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건네고는 했다·
그중에는 당연히 은하도 있었다·
“아버지 꼭 명심하세요·”
“왜 뭔데?”
“이리야 어머니랑은 유은이 때문에 일단 결혼식만 올리기로 했잖아요· 신혼여행은 가지 않고·”
“어 그랬지· 이리야랑 얘기해서 신혼여행은 천천히 가기로 했지· 안 가도 된다고도 했고····”
“그 말 진심으로 믿는 거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신혼여행은 가야지· 당장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네 그러니 꼭 가도록 해요· 반드시 내년 안으로· 나중에 구박받고 싶지 않으면요·”
미래 유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화를 통해 미래를 유추한 은하는 확인하듯 물었다·
“나···· 미래에는 안 갔냐?”
미래 유성은 즉답했다·
“갔죠· 갔는데 내년 안에 못 가서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됐죠· 그래서 미래의 아버지는 그 일로 많이 후회했어요·”
“왜? 내년 안에 가지 못하면 기약 없이 미뤄지는 일이라도 발생하는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
“순번이 꼬여서····”
“뭐?”
은하는 눈을 깜빡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유성아 설마····”
은하는 조심스레 뒷말을 이었다·
“나 아내가 더 있는 거야?”
“···앗· 아앗!”
뒤늦게 말실수를 깨달아 버린 미래 유성·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그것만으로도 은하는 직감했다·
‘다섯 명이 끝이 아니라고···?’
한편 미래 유성은 입을 가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은하는 귀를 세우고 엿들었다·
“이건 왜 필터링이 안 된 거지? 유은이가 실수라도 했나?”
“유은이? 유은이는 왜 나와? 유은이도 관계가 있는 거야? 역시···· 유성이 너 나랑 이리야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구나·”
“윽···· 유은이는 이제 태어나서 필터링이 안 걸리는구나···· 일단 아버지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내 질문에 답하기나 해·”
“····”
“순번이 꼬여서라니 무슨 소리야· 진짜 내가 더 들인다는 거야? 필터링은 왜 안 걸린 거고?”
은하가 위협적으로 따졌다·
미래 유성은 마지못해 답했다·
“일단···· 제 생각에 필터링은 이제 돌아갈 때가 되니까 느슨해진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 뭐?”
“말해도 어차피 이루어질 거라 작동하지 않은 건지도 몰라요· 아마도····”
“···그래서 내가 더 들인다고? 누구를? 몇 명이나? 어떻게? 왜?”
“····”
은하가 사납게 노려보는 가운데 미래 유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더는 시선을 이기지 못한 그는····
“죄송해요 아버지! 그것만은 절대 말하지 못하겠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쌩하니 도망쳐 버렸다·
은하는 얼른 미래 유성을 쫓았다·
“야! 너 거기 안 서!? 돌아와!”
안타깝게도 작정하고 숨어 버린 미래 유성을 잡지는 못했다고 한다·
* * *
미래 유성은 한서현도 찾아갔다·
그녀는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쓰고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어머니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아들내미를 위해서라면 없어도 시간을 내야지· 지금 괜찮아·”
모니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며 미래 유성을 올려다보는 한서현·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벗은 그녀가 상긋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니? 나한테도 따로 조언해 줄 말이 있어서 온 거니?”
“헤헤···· 어머니는 못 속이겠네요· 네 맞아요·”
미래 유성이 멋쩍게 대답한다·
그러고는 손에 있던 쪽지를 한서현에게 건넸다·
“이건 뭐니?”
“미래의 어머니의 조언이에요· 제가 돌아갈 때 건네주라더라고요·”
한서현은 쪽지를 펼쳤다·
집중해서 내용을 읽는다·
“흠···· 여기 적혀 있는 기간에 은하와 한방을 써 달라는데···· 내가 둘째라도 가지나 보구나·”
“아···· 음···· 글쎄요?”
“얼굴에서 다 티 났어 얘· 지금 유성이도 그러는데 커서도 변함이 없나 보구나?”
“하하···· 그 얘기 미래에서도 어머니한테 곧잘 들었어요· 아버지랑 똑같다고도요·”
한서현이 피식거린다·
이내 앞으로 몸을 기울인 그녀가 손으로 턱을 괬다·
입가에는 호기심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둘째는 딸이니 아들이니?”
“···죄송해요 어머니· 거기까지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글쎄····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 기간에 임신해야만 한다면 이때 성별이 결정된다는 뜻일 테니까·”
“음···· 역시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리고 벌써부터 미리 알아 버리면 재미없지 않을까요?”
“하긴 듣고 보니 그렇겠구나· 미리 알면 재미없겠지· 알았어· 그럼 나중을 기대하도록 할게· 어떻게 네 아버지를 꼬실지나 고민해 봐야겠구나·”
“하하···· 네·”
미래 유성의 의견에 수긍한 한서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래 유성에게 다가간다·
자신보다 키가 큰 그의 머리로 손을 뻗는다·
“못 본 새 머리가 많이 길었네· 언제 잘랐니?”
“한···· 한 달쯤 된 것 같아요· 자를 때가 되기는 했네요·”
“그래 가기 전에 깨끗하게 자르고 가는 게 좋겠구나· 이 상태로 돌려보냈다가는 미래의 내가 욕할 게 뻔하니까· 지금 시간 되니? 이왕 말 나온 김에 머리나 자르도록 하자·”
“···어머니가 잘라 주시는 거예요?”
미래 유성이 못 미더운 눈치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기프트로 그의 감정을 파악한 한서현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왜? 내가 잘라 주었으면 하니?”
“····”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고·”
“저는···· 어머니가 잘라 준다면···· 당연히 좋죠· 하하····”
“농담이야· 전문직이 아닌 내가 멋대로 잘랐다가 망할 일이라도 있니? 잘못해서 너를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지·”
“휴···· 다행이에요·”
미래 유성은 십년감수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서현은 키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요즘 가는 곳으로 가자· 예약은 안 해도 될 거야·”
“지금 바로요? 어머니 일은요?”
“일이야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면 되지· 샤키라 행정원 헤르미트 행정원 나 대신 부탁할게?”
“···네 업무는 걱정하지 마세요· 저랑 헤르미트 행정원이 해 둘게요·”
“하하···· 다녀오세요 이사님·”
“라라라♬”
“라라도 같이 가고 싶니? 그래 같이 가자·”
샤키라 헤르미트와 인사한 뒤·
한서현은 미래 유성을 이끌고 집무실을 나섰다·
라라도 뒤따랐다·
“저 혼자 가도 되는데···· 괜히 어머니만 지루하지 않을까요?”
미래 유성이 우려를 표했다·
그러자 따라오는 그를 뒤돌아본 한서현은 무슨 상관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랑 같이 있을 시간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라도 같이 보내야지· 그리고 내 아들이랑 보내는 시간인데 지루할 리가 없잖니·”
“····”
“그러니 가자·”
한서현이 또각또각 나아간다·
미래 유성은 뒤늦게 화답했다·
“네! 가요!”
“그나저나 거기 사람들이 자칫 내가 바람피운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네· 이참에 은하나 놀라게 해 볼까?”
“오 그럴까요? 저는 좋아요!”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미래 유성이 돌아가는 날이 밝았다·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
은하는 그가 손에 쥔 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이리야의 망상집이 미래와의 연결점이라니····”
“주님 망상집이라뇨···· 너무해요· 저건 은하신교의 성서란 말이에요· 아직은 예정이지만····”
노유은을 안고 있던 이리야가 입술을 삐죽였다·
은하는 가볍게 흘려 넘기며 미래 유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래 유성은 그 손을 맞잡았다·
“잘 돌아가고 잘 지내도록 해· 미래에서 보자·”
“네 미래에서 봐요·”
은하와 악수한 손을 푼다·
이내 한서현과 포옹을 나눈 미래 유성은 시간을 확인했다·
미래에서 문을 열어 주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 슬슬 가 봐야겠네요·”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한서현이 쓸쓸히 고개를 끄덕인다·
미래 유성은 그녀를 비롯해 배웅을 나온 사람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다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응답한다·
고개를 들어 씩 웃어 보인 미래 유성은 뒤를 돌았다·
앞으로 나아간다·
이리야의 책이 빛나기 시작하며 그의 손에서 벗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화아악!
공중에 떠오른 이리야의 책이 하늘 높이 빛을 뿜는다·
동시에 하늘에서도 빛이 떨어졌다·
“····”
빛과 빛이 만나 어우러지며 화려하고 찬란한 빛을 발한다·
그렇게 현재와 미래를 잇는 통로가 만들어진다·
신비롭고 경이롭다·
그 광경을 눈에 담은 사람들은 절로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저는 이제 돌아가 볼게요· 다들····”
“····”
빛의 기둥을 등지고 선 미래 유성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가 일부러 힘껏 손을 흔들며 쾌활한 어조로 작별을 고했다·
“언젠가 다시· 미래에서 봐요!”
“···그래·”
직후 빛의 기둥이 넓게 퍼지며 미래 유성을 집어삼켰다·
은하는 물론 사람들은 모두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그에게 화답했다·
“언젠가 다시· 미래에서 보자·”
《리라이프 플레이어》 외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