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73)
이전 상태로의 회귀·
나아가 무(無)로의 환원·
그것은 곧 부정(否定)이며 거절(拒絶)이다·
쏴아악!
홍화검의 빛이 은하의 신화가 궤적을 그린다·
궤적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통과하듯 놈의 창대를 자르고 지금껏 아무도 부수지 못한 갑옷을 부수고 속살을 헤집고 뼈를 절단하고 장기를 가르며 놈을 베어 냈다·
그 궤적을 따라 피가 솟구치고 눈부신 빛이 새어 나왔다·
왈칵! 푸슉!
화아악!
빛은 상처 부위를 시작으로 놈의 체내를 잠식해 나갔다·
빛이 스며드는 족족 소멸한다·
밖으로 치솟는 피를 비롯해 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마나의 입자로 환원된다·
그렇게 부정당하고 거절당한다·
쿠오오오!
놈은 어떻게든 빛을 몰아내 소멸을 피하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은하와 공략대 대표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은하는 다시금 홍화검을 휘둘렀고 놈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공략대 대표들은 있는 힘껏 백은제 장비를 찔러 넣었다·
화아악!
모든 존재와 사상을 부정하는 은하의 신화와 〈백은〉의 빛이 상충하는 일 없이 어우러진다·
백은색을 기조로 한 무지갯빛이 놈에게서 터져 나오고 나아가 세상을 잠식한다·
시야가 빛으로 물든다·
그 가운데····
‘이겼다·’
은하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 * *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공략대가 정신이 들었을 때 그들은 어느새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세상에 서 있었다·
“····”
세상이 짓누르는 것만 같던 공략대를 압박하던 거대한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심해의 던전〉의 보스 몬스터 놈이 소멸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공략대는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긴장한 채였다·
바로 그때·
하···· 축하해요 공략자 여러분· 여러분이 이겼어요·
10층 최심부에 진입한 후로 지금껏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던전 가이드가 나타났다·
하늘하늘 허공에서 힘없이 내려와 공략대와 눈높이를 맞춘 놈은 낙담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놈의 심정과 반대로 그제야 공략 성공을 확인한 공략대는 마음 편히 기뻐할 수 있었다·
“했다! 해냈다! 해냈어 해냈다고! 우리가 해낸 거야 씨····”
“아아···· 드디어 끝난 거야 드디어···· 흑····”
“쿨럭! 큭····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찮은 게 아니었잖아···· 야 누가 나 좀····”
“돌아가야 해···· 보니타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
“아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살았어···· 산 거야· 흑····”
“그 자식은 제 몸이나 챙길 것이지····”
“····”
누군가는 목청껏 환성을 질렀으며 누군가는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고 누군가는 흥분이 가시며 뒤늦게 부상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으며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으며 누군가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흐느꼈으며 누군가는 죽은 동료를 그리워하며 울분을 곱씹고는 했다·
그런 식으로 공략대는 저마다 감상에 젖었다·
던전 가이드가 불쑥 끼어들어 분위기를 깬 것은 그때였다·
기쁘고 슬픈 것은 알겠지만 거기까지만 하도록 해요· 여기서 계속 시간을 쓸 수는 없으니까·
“····”
모두 고개를 들어 주세요·
던전 가이드에게 시선을 향한 공략대는 곧 위를 올려다보았다·
“와아····”
“····”
상공에서·
눈이 부시지 않도록 은은하면서도 오색영롱하게 빛을 내는 광채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 광채를 눈에 담은 공략대는 절로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넋을 놓고 무심결에 탄성을 터뜨리기도 했다·
최초로 〈심해의 던전〉을 공략한 그중 가장 많이 공헌한 최고 공략자에게는 던전의 특혜가 주어집니다·
광채가 공략대에게로 가까워진다·
머지않아 뛰어올라 잡아챌 수 있는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높이까지 내려온다·
이윽고 광채는·
최고 공략자 노은하·
공략대 속에 있던 은하에게로 그가 내민 손 위로 내려앉았다·
당신은 던전의 특혜를 사용해 어떤 소원이든 하나 이룰 수 있어요· 단 현재 던전이 보유한 마나량에 한해서요· 당연히 던전의 규정을 위배해 소원의 개수를 늘려 달라고 할 수도 없고요· 둘 이상에 해당하는 소원을 하나로 몰아넣어서도 안 되고요·
“····”
그리고 소원은 어디까지나 최고 공략자가 바라는 대로만 이루어질 거예요· 바라는 이상으로 이루어지진 않을 거란 뜻이에요· 그러니 어떤 소원을 빌지 신중히 생각하고 말하도록 하세요·
던전 가이드가 설명했다·
손안에서 빛나는 광채를 바라보던 은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네·’
사실 일찍이 미래 유성에게 결과를 들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은하는 보람을 느끼고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내 광채로부터 눈을 돌린 그는 공략대 대표들을 찾았다·
마침 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나 노은하 플레이어가 됐군요· 가능하면 최고 공략자의 영광은 이탈리아에 주어졌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노은하 플레이어라면 인정할 수밖에요· 〈심연의 던전〉에 이어 이번 공략에서도 최고 공략자가 된 것을 축하합니다·”
“Congratulations Eunha· I knew it would be you·”
“····”
이탈리아 공략대 대표 알버트 미국 공략대 대표 에제키엘 등 그동안 공략을 진행하며 친해진 대표들이 저마다 축하를 건넸다·
은하는 겸양하게 감사를 표했다·
“다들 열심히 해 준 덕분이죠· 저 혼자였으면 못 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해 준다면 고맙죠·”
대표들이 기껍게 반응한다·
그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으로는 은하에게 주의했다·
“노은하 플레이어도 잘 알겠지만 사전에 공략국끼리 협의한 사항을 기억하리라고 믿습니다· 최고 공략자가 누가 되든 간에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하는지····”
“네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은하는 알버트나 다른 대표들이 염려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만일이라도 이기심에 눈이 멀어 사적인 소원을 빌어 버렸다가는 공략대에 불화를 일으킬 테고 나아가 불화는 공략국으로 번지며 공략국에 큰 피해를 줄 테니까·
이에 그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여 준 은하는 던전 가이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소원을 말할게·”
앞으로 뻗은 양손을 펼쳐 던전 가이드에게 광채를 내민다·
은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범죄자들은 제외하고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던전을 공략하다 죽은 모든 사람을 살려 줘·”
···좋아요· 최고 공략자 노은하· 당신의 소원을 받아들일게요·
직후 소원을 인지한 광채가 오색찬란한 빛을 발했다·
화아악!
눈이 부시도록 빛을 퍼뜨리는 광채가 은하의 손을 떠난다·
이윽고 하늘로 떠오른 광채가 입자 단위로 흩어져 휘날린다·
그 속에서 공략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하얀 빛 무리에 휩싸여 내려오고 있었다·
“아···· 아아···!”
진실로 소원이 실현됐다·
그 광경을 목도한 공략대는 모두 감격에 겨워하는 한편 급히 몸을 움직였다·
빛 무리 속에서 의식을 잃은 동료들을 받아 낸다·
“···숨을 쉬고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진짜 살아 있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흑····”
“다들 상태에 이상은 없어요! 건강해요!”
“허···· 남은 죽도록 고생했더니만 이 자식은 아주 잘 자고 있네···· 야 먼저 쉬니까 좋았냐? 실컷 잤으면 그만 일어나· 얼른 눈 떠 인마·”
사망한 동료들을 재회한 공략대는 〈심해의 던전〉을 공략했을 때보다 크게 기뻐했다·
동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자 기쁨은 배가됐다·
그들을 뒤돌아본 은하 또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이야 잘됐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세상이 입자로 변해 산화하기 시작했다·
던전 가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차 형체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소원은 이뤄졌어요·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날게요· 다음에는 안 봤으면 좋겠네요·
그리하여·
현실이 공략대를 맞이한다·
* * *
〈심해의 던전〉 공략이 진행된 지 어느덧 몇 개월이 흐른 해가 바뀌어 선력 25년·
이탈리아 로마 퀴리날레 궁전·
거의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보좌관들에게 업무를 맡긴 빅 마마는 집무실 소파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네 들어와요·”
빅 마마의 허가가 떨어졌다·
잠시 후 보좌관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창밖을 보며 햇볕을 쬘 뿐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빅 마마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요?”
“그게 말입니다····”
보좌관이 보고했다·
간단히 요점만 정리하자면····
“〈심해의 던전〉이 공략됐다고요? 정말인가요?”
그렇다고 한다·
소식을 접한 빅 마마는 그제야 보좌관에게 시선을 향했다·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통신에 따르면 알버트 발렌타인 플레이어가 직접 연락을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알버트 플레이어가···· 정말 잘됐네요·”
“네 이탈리아에 복운입니다·”
한 번 흑색던전에 발을 들인 사람은 던전을 공략할 때까지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러니 알버트와 연락이 닿았다는 의미는 그가 밖으로 나왔으며 곧 〈심해의 던전〉 공략대가 던전을 공략했다는 뜻이다·
즉 이탈리아가 흑색던전 공략에 성공한 것이다·
빅 마마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만약 최고 공략자가 이탈리아 공략대에서 나온다면 더더욱 바라마지 않겠지만····
“최고 공략자는 누구라고 하나요?”
안타깝게도·
마냥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최고 공략자는····”
“····”
“한국 공략대 대표를 맡은···· 노은하 플레이어라고 합니다·”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자연히 빅 마마의 기분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이번에도 그 사람··· 〈오버로드〉가 된 거군요····”
“네···· 그리됐다고 합니다· 다른 대표들도 인정할 만큼 〈오버로드〉의 역할이 컸다고····”
세계 최초로 흑색던전을 공략한 〈심연의 던전〉의 최고 공략자·
한글이나 한자에는 익숙지 않은 주로 라틴어 계통 문화권에서는 〈오버로드〉라고 불리는 존재·
노은하·
필시 그는 던전 공략 과정에서 다른 국가의 공략대들로부터 여러 견제를 받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심해의 던전〉에서도 최고 공략자가 됐다는 뜻은·
“그만큼 대단했나 보네요 정말· 알버트는 물론 다른 트레디치들 각국 공략대에서 내세우던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
〈오버로드〉 노은하·
직접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은 빅 마마는 쓴웃음을 흘렸다·
보좌관은 괜히 송구하다는 듯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그녀가 물었다·
“혹시 한국의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 사람처럼 뛰어났다고 하나요?”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마도 한국 공략대의 모든 플레이어가 〈오버로드〉처럼 뛰어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가 특별한 겁니다·”
“그가 특별한 거다라···· 하긴 그 말이 맞는 거겠죠· 어찌 보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네요· 최고 공략자가 우리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그리스 등에서 나왔더라면 괜히 자존심이 상했을 테니까요·”
“네 그 점은 다행입니다· 차라리 우리와 우호 관계에 있고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에 최고 공략자의 영예가 주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은 〈심연의 던전〉도 공략해서 공략에 참가한 다른 국가들도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우리가 되지 못해서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닌데요?”
“···죄송합니다·”
“그만 나가 봐요· 공략대로부터 다른 소식이 오는 대로 알려 주고요·”
“네 알겠습니다·”
보좌관은 눈치가 빨랐다·
자칫 빅 마마의 심기를 거슬러 그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펴고 대답한 그는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빅 마마는 조용히 품속을 뒤졌다·
시가 휴미더를 꺼내 든다·
안에서 시가 하나를 집어서는 입에 문다·
그녀는 체내 마나를 발현해 손가락 끝에 피워 올린 불꽃으로 시가에 불을 붙였다·
“후우····”
길게 들이쉬고 연기를 내뱉는다·
멍하니 창밖의 전경을 바라보던 빅 마마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노은하라···· 가지고 싶네····”
처음에는 호기심에 불과했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탐이 난다·
“한국 정부의 눈치가 보이지만 어떻게 꼬셔 볼 수는 없을까·”
시가 끝이 타들어 간다·
재떨이에 톡톡 꽁초를 떨어뜨린 빅 마마는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