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 [True Ending]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에도 이장을 준비하는 여러 왕들의 무덤을 순회한 뒤·
마지막으로 브링어 공국의 무덤··· 더스크 브링어의 무덤 앞으로 향했다·
“대공 각하!”
“오셨습니까 각하·”
나를 기다리고 있던 용혈기사단 기사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경례했다·
대공· 던 브링어 대공·
아직도 조금 낯선 나의 용명(龍名)을 곱씹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나는 묵묵히 더스크 브링어의 관 앞으로 가서 깍듯이 예를 차렸다·
슬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영계에서 다시 만난 그녀가 나를 웃음으로 보내주었으니까·
나 또한 행복한 마음으로 그녀의 내세를 축복하기로 했다·
“어머니의 운구를 잘 부탁하네 용혈기사단·”
“예 대공·”
“내일 해산식을 치르고 그 이튿날 브링어 공국으로 출발할 거야· 공국에 도착할 때까지 자네들이 어머니의 관을 잘 지켜줘야 해·”
“목숨으로 지키겠습니다·”
굳은 기사들의 얼굴에는 흐릿한 불안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기에 나는 그들을 향해 빙그레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말게· 나는 결코 공국을 버릴 생각이 없으니·”
“···!”
자신들의 염려가 제대로 읽힌 탓인지 기사들이 당황했다·
나는 브링어 대공의 지위를 물려받았지만 동시에 에버블랙 제국의 황태자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에 따라 브링어 공국은 그대로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 제국에 병합당하거나 혹은 갈기갈기 찢기거나 이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반대야·”
나는 기사들을 둘러보며 확신을 담아 말해주었다·
“한동안 나는 황태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브링어 대공으로서의 삶에 집중하려 하네·”
“···!”
기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제국 황제인 아버지는 여전히 건재하고 내가 에버블랙 제국을 물려받기까지는 시일이 꽤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브링어 공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나라의 통치와 세계의 정치에 대해 더 배워두려 한다·
지난 3년간 크로스로드를 다스리긴 했으나 애초에 크로스로드는 작은 도시고 그 역할도 군사 요새에 치중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아직 한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여러모로 많이 부족하다· 그것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한 에버블랙 제국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제국을 물려받기 전에 브링어 공국에서 먼저 왕으로서의 공부를 해두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브링어 공국을 제국의 형제국으로서 공고히 하고 그 지위가 흔들리지 않게 확립해 둘 생각이다·
‘···뭐 생각대로 흘러갈지 어떨지는 부딪혀 봐야 알겠지만·’
브링어 공국은 내게 소중한 나라다·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내게 확고한 배경이 되어 줄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선대 대공들의 유지가 이 나라에서 타오르고 있다·
용혈은 사라졌다 해도 그 마음은 이어져야 하기에·
나는 브링어 공국을 결단코 내버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
나는 더스크 브링어가 잠들어 있는 관을 조심스레 손끝으로 쓸었다·
지켜봐 주세요 어머니·
브링어의 이름을 이은 자로서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
그날 오후·
영주 저택· 응접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안으로 에반젤린이 성큼 걸어 들어왔다·
“선배님 부르셨어요?”
조심히 문을 닫고 돌아선 에반젤린이 쾌활하게 내뱉었다·
“내일 해산식 일정 때문에 부르신 건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제가 준비를 잘하고 있····”
말하다 말고 에반젤린은 뚝 멈췄다·
그제야 응접실에 가득 찬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눈치챈 것이다·
응접실에는 나를 비롯한 메인 파티 멤버뿐만 아니라·
이곳 크로스로드에서 오래도록 일해온 여러 신하와 장교 사용인들·
에반젤린과 함께 싸운 백병부대 전사들과 동료 영웅들· 각국의 여러 왕들·
그리고 제국 황제인 나의 아버지와 휘하 기사와 서기관들 여럿이 한데 모여 있었다·
“어서 와 에반젤린·”
놀라서 굳은 에반젤린에게 나는 손짓했다·
“아니··· 이제 이렇게 불러야겠군·”
목을 가다듬은 뒤·
나는 힘주어 그녀의 새로운 호칭을 불렀다·
“크로스 변경백·”
“···!”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호칭을 듣는 순간 에반젤린이 어깨를 찌르르 떨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는 빙그레 미소했다·
“아버지께서 지켜오신 가문의 명예로운 작위를 그리고 이 도시의 영주직을 물려받을 준비가 되었나?”
“····”
입술을 꾹 깨물고 온갖 복잡한 감정이 서린 녹색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고 씩씩하게-
에반젤린은 대답했다·
“넵!”
나는 비켜섰고 내 뒤에 서 있던 황제가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섰다·
긴장된 걸음으로 다가온 에반젤린이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만세· 미천한 신하가 지존을 배알하옵니다·”
“크로스 가문의 장녀 에반젤린 크로스·”
황제는 젊은 기사를 향해 진중하게 말했다·
“이곳 최남단 변경에서 그대의 부모와 그대의 선조가 피와 눈물로 제국령을 지켜냈음을· 짐은 알고 있다·”
“····”
“자살의 거리 무덤 위의 도시 괴수전선··· 이 요새도시를 일컫는 이름은 참으로 다양했지·”
황제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제 옛 이명(異名)은 모두 버릴 때가 되었다·”
“····”
“괴수는 사라졌고 대신 남쪽에는 새로운 길이 열렸으니·”
황제는 멀리 남쪽을- 호수왕국이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크로스로드는 앞으로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명과 접경하는 제국의 또 다른 최전선이 되어야 한다·”
고개를 숙인 채 들으며 에반젤린의 에메랄드빛 두 눈이 선명한 의지로 반짝였다·
“전쟁을 위한 요새에서 벗어나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길이 서로 얽히는··· 문화와 교역의 새로운 중심지로서· 크로스로드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
“에반젤린 크로스·”
황제가 부드럽게 물었다·
“이 막중한 책임을 잘 수행할 수 있겠는가?”
에반젤린은 찰나도 망설이지 않고 늠름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폐하!”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린 황제가 호령했다·
“크로스 가문의 장녀 에반젤린 크로스는 고개를 들라!”
즉시 고개를 드는 에반젤린에게 황제는 한 걸음 다가서서····
좌우의 기사들이 가져온 은빛 창과 금빛 방패 그리고 크로스 가문의 상징이 그려진 아름다운 녹색의 깃발을 하사했다·
“이 창으로 적을 물리치고 이 방패로 도시를 수호하고 이 깃발로 에버블랙과 크로스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 세우도록 하라·”
에반젤린은 창과 방패 그리고 깃발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 자신의 앞에 놓았다·
일련의 의식이 끝나고 황제는 선언했다·
“이제 그대는 가문의 업을 이어받아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이번 대의 새로운 크로스 변경백이 되었다·”
뒤이어 황제는 나를 보았다·
“동시에 요새도시 크로스로드를 지금 이 시간부로 크로스 가문에 반환한다·”
천천히 앞으로 나선 나는 에반젤린에게 다가갔다·
내 손에 들린 하얀 천 위에는 영주로서 도시의 각종 권리를 증명하는 서류철과 도시 주요 시설의 열쇠 원본이 모인 열쇠고리· 그리고 영주의 인감이 얹혀 있었다·
내가 예를 갖추어 천에 감싸인 물건들을 내밀자 에반젤린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것을 받았다·
“지난 3년 세계를 위해 헌신해 준 이 도시에 감사한다· 또 자신의 도시를 기꺼이 황실에 빌려준 크로스 가문에 감사한다·”
나는 물러섰고 황제는 근엄하게 선언했다·
“제국 황실은 크로스 가문의 충정을 그리고 크로스로드의 용맹을 제국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황제는 빙그레 인자하게 미소했다·
“훌륭한 변경백이 그리고 좋은 영주가 되기를 바란다· 에반젤린 크로스·”
“····”
“행운을 빌겠다·”
에반젤린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일생의 영광이옵니다 폐하···! 분부하신 바대로 훌륭한 변경백이 좋은 영주가 되도록 노력하겠사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내게 눈짓했다·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린 나는 앞으로 나서며 목을 가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태연히 걸은 나는 에반젤린의 앞에 섰다·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에반젤린의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자리에서 일으킨 다음·
조그맣고 당돌한 소녀기사였던··· 그리고 이제는 완연히 성숙한 한 명의 어른이 된 차기 크로스 변경백을 마주하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전임 영주로서 신임 영주를 위해· 충고와 축사를 겸한 시 하나를 읊고자 합니다·”
“····”
“괜찮겠습니까 크로스 변경백?”
에반젤린은 마주 생긋 미소해 보였다·
“기쁜 마음으로 경청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나는 숨을 들이켠 다음·
언젠가 에반젤린이 다음 대의 크로스 변경백이 될 때 읽어주려 준비해 두었던 시를·
이제 사람을 다스리는 지위에 오를 그녀에게 필요할 잠언(箴言)을 나지막이 읊었다·
때로 사람들은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며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네가 선을 행해도 사람들은 이기적인 속셈이 있다며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네가 성공하면 거짓된 친구와 진정한 적을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네가 오늘 한 좋은 일은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솔직함과 정직함은 너를 취약하게 만들고 상처입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정직하라·
가장 위대한 꿈을 품은 사람도 저열한 소인배에게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꿈을 품어라·
사람들은 약자를 보다 기꺼워하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네가 수년간 공들여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룻밤 새에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룩하라·
사람들은 도움을 바라지만 정작 도움을 주면 너를 공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도와라·
세상에게 최선을 다한다 해도 세상은 네게 가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게 최선을 다하라·
낭송이 끝났다·
길고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나 에반젤린은 잠언의 내용을 곱씹으며 나의 말에 끝까지 집중했다·
“그대가 앞으로 되어갈 영주의 모습을 그리고 그대가 앞으로 일궈갈 이 도시의 모습을·”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기대하며 지켜보겠습니다· 크로스 변경백·”
에반젤린은 조심스레 내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지 못하고 에반젤린의 커다란 눈 아래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으나·
“아직도 어리고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지만····”
그 목소리는 의연하고 굳건했다·
“황제 폐하께 황태자 전하께 그리고 선대 영주님들께··· 아버지와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도록·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힘주어 악수하고서 내가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와아아아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환호와 함께 박수를 쏟아냈다·
언제 소식이 퍼진 것인지 저택 바깥에 몰려든 시민과 병사들이 창밖에서도 환호성을 내지르고 갈채를 퍼부었다·
황제의 안전을 염려한 기사와 서기관이 시민들을 진정시키고자 했으나 황제는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즐거운 분위기에 찬물 끼얹지 마라·”
황제는 이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내게 눈을 휘어 보였다·
“이 또한 변경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니까·”
마주 웃은 나도 황제와 함께 이 시끌벅적한 변경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와아아아아···!
저택 바깥에 몰려든 시민과 병사들이 쉬지 않고 에반젤린의 이름을 연호했다·
신임 영주 에반젤린은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는 손으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낸 뒤 환하게 웃으며 그런 사람들에게 크게 인사해 보였다·
“····”
착각일까·
문득 몰려들어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선 선대 변경백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피투성이 갑옷 차림이 아니었다·
장성한 딸을 바라보며 뿌듯하게 눈물짓는 그런 평범한 아버지였다·
‘자랑스러워하셔도 좋습니다 변경백·’
눈을 감았다 뜨자 변경백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 어깨 위에 져 있던 오랜 죄책감 또한 한결 가벼워지며 사라졌다·
‘당신의 바람대로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간 끝에··· 당신의 딸은 당신의 길을 이었으니까요·’
나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힘껏 박수를 쳤다·
사람들 사이에서 광채를 발하며 눈부시게 웃는····
새로운 변경백이자 새로운 크로스로드의 영주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