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 [True Ending] 이장(移葬)
장례식이 끝나고·
여러 왕의 무덤 앞에서 여러 나라의 사람들은 이장(移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드워프의 왕이었던 켈리손 엘프의 왕이었던 스쿨드 인어의 왕이었던 포세이돈 그리고 수인왕 쿠일란의 형이었던 쿠레하····
그리고 또 많은 인간 나라의 왕들과·
마지막으로 브링어 공국의 왕이었던 대공 더스크 브링어·
“····”
예를 갖추어 꺼내지는 왕들의 관을 나는 멀리서 살폈다·
3년의 전쟁 동안 목숨을 잃은 왕들이 부지기수였다·
대부분의 병사는 이곳 크로스로드 무덤터에 남을 테지만 가족이 이장을 원하는 소수의 병사와 함께 왕들은 이제 각자의 고향으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선대 드워프 킹이 모두 묻힌 카타콤이 있어·”
켈리손의 무덤 옆으로 다가가자 아들의 관을 꺼내 어루만지던 켈리베이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황금관이 반짝였다· 켈리베이는 드워프 킹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왔다·
“이 녀석도 그곳에서 쉬어야지·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
무어라 말할 수가 없어서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도리어 켈리베이가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크지 않고 조그맣게 갈 곳 없는 드워프들을 한데 모아보려 해·”
“나라를 재건하시는 게 아니라요?”
이번 전쟁 참전의 대가로 이종족 노예제는 철폐되었고 이종족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것은 세계수호전선에 참가한 모든 나라가 동의하고 공표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이제 자연스럽게 드워프의 나라를 재건하리라 생각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난쟁이들은 종족전쟁 패배 후에도 장인(匠人)으로 대우받았거든·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서 각자 잘살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각자의 터에 정이 붙고 떠나기 싫어진 놈들이 더 많아서 말이야·”
켈리베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부르면 돌아올 놈들도 많지만 대부분은 이미 각자의 터전을 꾸렸으니· 무리하게 다시 한데 모일 필요는 없겠지· 안 그래도 개인주의적인 놈들이라·”
“아하····”
“이제 나라라기보다는··· 그래 조합의 형태로 꾸려 보는 건 어떨까 싶어· 서로 각자 알아서 살다가 힘들 때마다 돕고 큰 프로젝트 있으면 같이 하고 뭐 이런····”
새 시대의 청사진을 그리는 나의 대장장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나는 빙긋 웃었다·
“응원할게요 켈리베이· ···보고 싶을 거예요·”
“뭔 벌써 이별하는 것처럼 분위기 잡는 거야? 내일 열릴 행사··· ‘해산식’은 보고 갈 거라고!”
마법이 사라진 탓에 현재 전 세계는 다양한 혼란에 휩싸였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세계수호전선의 왕들은 급하게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장례식과 추모식이 끝나자마자 해산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헤어진다 해도· 우리는 또 자주 봐야지· 안 그래?”
씩 웃은 켈리베이가 내 등허리를 팡팡 쳤다· 나는 마주 웃으며 그와 어깨동무했다·
“맞아요· 질려서 그만 좀 보자고 투정하실 때까지 보러 갈 겁니다·”
“오오냐· 누가 먼저 질리나 한번 대결해 보자고!”
나와 켈리베이는 한동안 서로 붙어서 나란히 선 채 켈리손의 관이 운구 마차에 실리는 광경을 함께 지켜보았다·
***
스쿨드의 무덤 앞으로 가자 이미 꺼내진 관 위에 베르단디가 조심스레 여러 꽃을 꽂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베르단디·”
“아 애쉬님!”
꽃꽂이를 마무리하고 내 앞에 서는 베르단디에게 나는 쓰게 웃었다·
“존댓말 쓰지 말고 서로 편하게 말할까? 이제 너도 왕이니까·”
“아참 그렇···죠···· 아니 그렇지····”
베르단디는 머쓱해 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새하얀 나뭇가지 관이 쓰여 있었다·
언니 우르드 그리고 동생 스쿨드의 뜻을 이어 요정왕가 최후의 생존자인 베르단디가 새로운 요정여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게다가 노예제도 철폐되고 속국에서도 벗어났으니·
그녀가 내게 말을 높일 이유가 하등 없었다·
“그 그럼··· 말 놓을게· 애쉬····”
적응하지 못하고 베르단디가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새롭기도 해서 나는 입을 가리고 웃고 말았다· 나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 분이 왜 이러실까·
“···저 검은호수 아래 던전에서 결국 내가 바라던 성배는 찾지 못했어·”
우리는 함께 남쪽을 보았다·
저곳의 던전화된 호수왕국에서 베르단디는 성배를 찾아 백 년을 헤맸다· 그것은 요정왕국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배였다·
하지만 끝내 찾아낸 성배의 정체는 세계수의 묘목·
심지어 고향에 심은 그 묘목조차 이제 마법의 힘을 잃은 평범한 나무가 되었으니·
그녀가 백 년간 찾아 헤맨 ‘기적의 마법’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애쉬· 너를 만났고 세계를 구했고 그리고··· 요정왕국은 구원을 얻었어·”
우리는 서로 마주 미소했다·
성배는 그 역할도 정체성도 잃고 말았으나·
성배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만난 우리는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웠고 세계를 구하는 데에 기여한 대가로 엘프들은 본래 요정왕국의 땅을 되돌려받게 되었다·
조금 멀리 다른 길을 걸었으나 결국 베르단디는 자신의 나라를 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기에 내 지난 백 년은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
베르단디가 생긋 웃었다·
“어쩌면 내가 찾던 성배는 애쉬 바로 너였을지도 모르겠네·”
“너무 추켜세우지 마· 부끄러우니까·”
괜히 능글맞게 손사래 친 다음·
나는 꽃이 가득 핀 스쿨드의 관을 살폈다·
“이제 어쩔 거야?”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그곳에서 왕국을 재건하려 해·”
베르단디는 긴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이미 지난 백 년간 이주구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이들도 많아· 그리고 세계 곳곳에 노예로 팔려가 있는 동족도 많고·”
“해결해야 할 일이 정말 많겠군·”
“뭐 하나씩 시작해 봐야지·”
베르단디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르드 언니도 스쿨드도 이제 없지만····”
그것은 악수의 요청이었다·
“그만큼이나 든든한 새로운 동맹이 생겼으니까·”
나는 기꺼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힘들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말해줘야 한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울 테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기도 해 애쉬· 우리 엘프는 네가 준 모든 선의를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한동안 손을 놓지 못한 채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싸운 전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킹 포세이돈의 관은 비어 있었다·
작전명 ‘타이탄 폴’- 초거대괴수들의 격전지에서 킹 포세이돈은 전사했기에· 시체를 찾지 못했다· 대신 그의 왕관만 회수할 수 있었다·
“롬펠러즈·”
자식이 없는 킹 포세이돈 대신 그의 조카인 롬펠러 쌍둥이가 장례의 상주를 맡았다·
상복을 입고 선 두 롬펠러에게 다가가며 나는 예를 표했다·
“고생 많았어·”
“뭐 우리는 별 고생도 안 했지·”
두 롬펠러는 비어 있는 삼촌의 관을 보았다·
“우리 삼촌께서 열심히 하셨지·”
“이 전선에서 우리는 뭐 별다른 일도 안 한 것 같은데··· 돌아가신 삼촌의 명예를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니·”
공석이 된 인어왕의 자리를 두 롬펠러가 대행해야 했다·
인어족에게 가해지던 여러 압제가 이번에 사라졌고 그 사안을 정리하고 대표할 이가 필요했기에· 이들이 나서주었다·
그마저도 킹 포세이돈이 다 손을 써두었고 롬펠러 남매는 확약 된 사안에 도장만 찍었다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그리고 인어족 사람들이 열심히 싸워준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야·”
나는 어쩐지 풀이 죽어 있는 둘을 다독였다·
“그래 이제 뭘 할 거야? 해적질은 그만두는 거지?”
“하하! 세계를 위기에서 구해낸 용사님께서 해적질이나 하고 있으면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겠지·”
“대륙 바다를 일순하면서 동족들을 만나 소식을 전하려 해· 대부분 깊은 바다 아래로 혹은 다른 대륙으로 떠난 상태지만··· 남은 이들도 있긴 하니까·”
인어족의 대부분은 이미 이 대륙을 떠난 상황·
남은 인어들은 근해에 작은 부락을 꾸리고 살거나 해안 마을에서 인간들과 섞여 뱃일을 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롬펠러는 남은 인어들이 핍박받지 않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힘쓰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제 이런 종족의 구별도 크게 의미가 없는 세상이 곧 올지도 모르지·”
“그냥 한데 섞여서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그런 세상·”
두 롬펠러의 말에 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갈지도 모르고·”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해적왕이었던 두 인어는 내게 씩 웃어 보였다·
“혹~시 해군 병력 필요하면 연락해!”
“애쉬 네 아래에서라면 믿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어째서인지 머잖은 미래에 이들에게 연락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바다에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킹 포세이돈의 관을 향해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걸음을 옮겼다·
***
쿠일란의 형 쿠레하의 관은 막 운구 마차에 실리는 중이었다·
쿠일란과 형벌부대 파티원들이 함께 관을 옮긴 뒤 예를 차렸다·
잠시 기다렸다가 다가가며 말을 붙였다·
“쿠일란· 그리고 형벌부대·”
“오 대장·”
“오셨슴까 대두목님-!”
반갑게 나를 맞는 5인을 둘러본 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제 형벌부대라는 이름은 떼야 하지 않나? 형벌 끝난 지가 언제인데·”
“그 이름이 워낙 익숙해져서 말이우 하하!”
웃어젖힌 쿠일란이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래··· 이제 나도 수인왕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고향으로 돌아갈 테니까· 이 친구들도 새 칭호를 받아야겠지·”
그러자 신이 난 형벌부대원들이 펄쩍펄쩍 뛰었다·
“뭐라고 붙여줄 겁니까 두목?!”
“수인왕의 친위대?!”
“오랑대장군(五狼大將軍)은 어떻습니까!”
“아니면 단풍권사대(丹楓拳士隊)라든가-”
고민하던 쿠일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쿠일란과··· 그 제자들?”
“····”
짜게 식은 형벌부대원들이 차가운 눈으로 쿠일란을 보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허허 웃었다·
이번에 쿠일란은 고향을 돌려받았다·
그가 세계수호전선에 기여한 바를 생각하면 아주 값싼 대가였지만· 정작 쿠일란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제값 주고 땅을 사겠다며 끝까지 가격을 치르려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받고 대신 그 돈으로 여러 물품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폐허가 된 부락을 재건하려면 필요한 게 많을 테니까·
“단풍랑 부족뿐만 아니라··· 모든 수인 부족이 그리고 난민들이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볼까 싶수·”
쿠일란은 형 쿠레하의 관을 손으로 슥 쓸어냈다·
“우리 형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깊어진 눈으로 쿠일란은 어른스레 미소했다·
“형이 내게 준 기적을 이어가야지·”
“응원할게 쿠일란·”
잠시 새로 복구될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다음 화제를 조심스레 꺼냈다·
“윤은 좀 어때?”
“···아직·”
쿠일란은 씁쓸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잠이 많은 여자라서 말이우·”
“····”
“이 세상에서 마법이 사라지면서 윤에게 걸렸던 저주에 가까운 부상은 사라졌다고 하는데· 처음에 관통당한 부위가 치명적이었는지··· 일어나질 못하니·”
뒤이어 쿠일란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게다가 윤이 저 먼 아리안 왕국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도 위험하잖수· 그 멀고 춥고 험한 길을 윤의 약해진 몸이 버틸지가 걱정이우· 장거리 이동을 도울 마법이나 아티팩트도 모두 무용지물이 된 마당에····”
“····”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가 혼약을 치른 뒤 쭉 간호해 주고 싶은데 이제 아리안 왕국의 법이 문제더군· 법적으로 혼약 등의 중대사는 증인 입회하에 본인이 동의 의사를 밝혀야 한다더라고·”
아리안 왕국으로서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혼수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윤을 아리안 왕국까지 육로로 데려가자니 너무 위험하고 그렇다고 크로스로드에 두기에는 기약이 없고·
이때 쿠일란이 윤과 혼약을 올린 뒤 간호하며 보살피겠다고 나섰다·
두 사람이 서로 정인(情人)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게다가 쿠일란이 수인왕이 되면서 자격도 충분해졌지만·
아리안 왕국의 법제상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그것도 왕녀를 결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
이래저래 꼬여 있는 상황 앞에서 쿠일란이 길게 한숨을 토했다·
“해서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수다·”
“크흠 안 그래도 그래서 말인데 쿠일란·”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쿠일란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윤의 아버지인 밀러 아리안이 너한테 몰래 물어보라 한 ‘제안’이 있거든····”
쿠일란의 눈이 의아하게 뜨였다·
나는 히죽 조금 질 나쁘게 웃으며 물었다·
“어때 전(前) 산적왕· 한번 들어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