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 [LAST STAGE] 운명의 주인 (2)
롬펠러 남매는 종족신의 권능을 빌려 쓸 수 있는 아바타(Avatar)이기도 했다·
비록 권능을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힘에 익숙지 않고 또 영계로부터 현실로의 마력 공급이 약해지는 상황이라 해도-
“우와아아앗!”
추락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건질 정도의 권능은 발휘할 수 있었다·
두 남매가 블루 펄의 아래에 물로 쿠션을 만들었고 함선은 흉하게 바닥에 내려 찍혔지만 충격은 분산되었다·
“전원 퇴함!”
추락의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선원들을 수습하며 루카스가 소리쳤다·
“퇴함하라! 어서-!”
하지만 함선 밖으로 다급하게 빠져나온 이들의 얼굴에는 금세 절망이 어렸다·
“아··· 아아····”
“히이 히이이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블루 펄의 추락 위치는 전장 중앙 부근· 성벽과의 거리가 그렇게 멀진 않지만 추락의 충격으로 힘겨워하는 선원들에게는 천릿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악몽의 주인은 사뿐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롬펠러 남매가 이를 갈며 각자의 단검과 피스톨 따위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젠장 여기까진가···?”
“조금만 더 난동을 부리고 싶었는데····”
“····”
다친 병사들을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선 루카스가 굳은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그때였다·
《···?》
블루 펄의 선원들을 응시하던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의 시선이 갑자기 홱 움직였다·
크로스로드의 성벽 아니-
그 위에 설치된 한 아티팩트를 향해서였다·
커다란 금속판으로 이뤄진 아티팩트가 그 매끈한 표면에 정확하게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비추고 있었다·
아티팩트에 손을 올리고 있던 적발의 선임마법사- 릴리가 힘차게 외쳤다·
“[처음부터 다시]-!”
아티팩트 [처음부터 다시]·
그 효과는 금속판 안에 전신이 포착된 대상을 크로스로드 남쪽 벌판 끝으로 강제 순간이동시키는 것·
찰칵-!
아티팩트의 작동음이 울리고 다음 순간·
쩌어억!
금속판 위에 선명한 균열이 벌어졌다·
격이 다른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감히 다루려 한 대가였다·
연금술사들은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덜덜 떨리는 금속판을 손으로 잡아 고정하고 가진 마력을 아티팩트 내부로 모조리 퍼부었다·
영계 폐쇄의 영향으로 자체적인 마력 공급이 힘겨워 미리 비축해 둔 마력 충전로에 아티팩트를 연결해 가까스로 출력을 내고 있었으나 불안정했다·
쩌적 쩌저저적!
유리거울이 깨지듯 금속판 위로 실금이 무수하게 번졌다· 깨진 금속 파편에 손아귀가 찢어져 가면서도 모두가 버텨냈다·
그리고-
“날아가··· 버려어어어!”
릴리의 외침과 함께
챙그랑-!
금속판 전체가 휘어지고 깨져가며 결국 [처음부터 다시!]는 흉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하지만 끝끝내 최후의 임무를 완수했다·
번쩍!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남쪽 벌판 끝까지 순간이동 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저승사자가 단숨에 멀어지자 블루 펄의 선원들이 일제히 비명 비슷한 환호를 토해냈다·
하지만 기뻐하기엔 일렀다·
두두두두두-!
악몽의 주인이 정한 사냥터이기에 일대 괴수들은 그동안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있었으나 그녀가 전장의 초입까지 튕겨 나간 지금·
괴수들은 굳이 인내하지 않았다· 전장 한가운데에 떨어진 인간들을 찢어 죽이기 위해 온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리고 악몽의 주인이 부재한다면·
인류 측도 굳이 인내할 이유가 없었다·
“다들 머리 숙이시오-!”
깐깐한 노인의 외침과 함께 블루 펄 주위로 무시무시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선원들을 향해 달려들던 괴수 수백 기가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
루카스가 고개를 들어 보자 상아탑주 디어뮈딘과 염동술사 바디백이 하늘을 날아 구원을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디어뮈딘은 착용한 장비 [늙은 불사조]의 비행 능력을 이용해 창공기사단을 지원 중이었다· 바디백 역시 염동력을 이용한 비행이 가능해 그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의적절하게 구원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합시다!”
두 마법사가 블루 펄의 선원들을 일제히 잡아 공중으로 띄워 올린 뒤 성벽 쪽으로 이송했다·
괴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몰려들었으나 바디백이 역장으로 괴수들을 묶고 디어뮈딘이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구원 감사합니다 디어뮈딘님·”
루카스가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디어뮈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낙관할 때가 아니오 루카스 경· 이제 더 이상 호수왕녀에게 사용할 지연책이 없지 않소?”
“····”
그 말 그대로였다·
블루 펄이 추락하고 유격부대가 보유한 지연책을 모두 소모한 지금 더는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붙잡아둘 방법이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는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성벽 바로 앞까지 왔을 때 사용하려고 아껴둔 비장의 수단이었으나 역시 소모해 버렸다·
“저 아티팩트도 좀 기왕이면 멀리 검은 호수 입구까지 날려버려 줄 것이지 굳이 크로스로드 남쪽 벌판 끝으로만 날려버리고 말이야· 쩨쩨하게·”
디어뮈딘이 투덜거렸지만 루카스는 [처음부터 다시!]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앞선 전투에서 그리고 지금 전투에서 저 아티팩트가 해낸 역할과 벌어준 시간이 대체 얼마인가· 저 강대한 적장을 이만큼이나 밀어낸 지연책은 [처음부터 다시!] 뿐이었다·
그러나 소모했고 망가졌다·
이제 적장에게 사용할 지연책이 미봉책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
“다른 괴수들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지만 저 호수왕녀만은··· 아무리 굳건한 성벽으로도 버텨낼 수 없소·”
“····”
“더 이상의 지연 수단이 없다면 크로스로드도 더는····”
“아니요·”
크게 숨을 들이켠 루카스가 새파란 두 눈을 치떴다·
“있습니다·”
“뭐···?”
성벽 앞에 도달하자 루카스는 스스로 디어뮈딘의 비행 마법을 벗어나 지상으로 떨어졌다·
쿵!
성문 앞에 선 루카스는 새파란 눈으로 남쪽을 노려보았다·
“나머지 분들은 모두 성벽 위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뒤 본성의 방어를 보태주십시오·”
“루카스 경은?”
“저에게·”
루카스는 천천히 허리춤의 두 검을 뽑아 두 손에 쥐었다·
“저 괴수를 막을 수단이 있습니다·”
저 멀리- 크로스로드에서 가까스로 시야가 닿는 남쪽 벌판 끝까지 날아갔던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금세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본래의 그 느릿한 속도라면 적잖은 시간이 걸릴 거리였지만 불탄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는 그녀의 움직임은 눈부시게 빨라져 있었다·
그녀를 다루고 가지고 노는 외신들이 조바심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
루카스는 차오르는 숨을 정갈히 가다듬었다·
어느새 대기에 마력이 희박하다·
일평생 숨 쉬듯 자연스럽게 운용해 온 마력이 부족해지자 루카스는 문득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온몸에서 근육이 사라지고 위축되는 듯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저 괴수들 또한 그리고 저 호수왕녀 또한 이것과 같은···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상실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또한 이 상실이야말로 주군의 작전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대신 그는 믿기로 했다·
일생을 가다듬은 육체를 감각을 검술을 노력을·
모든 곳에서 싸우고 있는 동료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화아아악-!
루카스의 온몸에서 황금빛 오오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신강림]·
마력이 쇠락해 가는 이 세계에서 아마도 최후의 사용일 그의 궁극·
동시에 루카스의 왼손에 쥐어진 성검 [엑스칼리버]에 창백한 섬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신성(神性)의 빛이었다·
루카스 그 자신은 몰랐으나·
이전 여러 회차에서 루카스는 애쉬를 대신해 마왕과 맞서 싸워온 전적이 있었다·
너무 많은 회귀 끝에 애쉬가 망가지고 크로스로드 부임 직후 자아를 상실해 죽어버리기 일쑤였을 때·
루카스는 그런 회차에서 영주 대행으로서 악몽의 대적자로서 주인공으로서 크로스로드를 이끌었다·
망가진 에이더를 애쉬가 대행했듯이 망가진 애쉬를 루카스가 대행했다·
이후 애쉬가 다른 인격을 스스로에게 덧씌우는 방식으로 멸망유희를 이어가면서 더는 루카스가 그런 역할을 맡을 기회는 오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루카스는 플레이어 대행(代行)의 대행(代行)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격’이 있다·
신위(神位)에 닿을 자격이· 마왕과 그 악몽의 군세에 맞설 자격이· 이 세계를 대표해 싸울 자격이·
기사의 영혼에는 새겨져 있다·
“····”
동시에·
루카스의 오른손에 들린 검 [하사받은 검]의 빛으로 이뤄진 칼날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루카스 그 자신의 내면에 봉인해 둔 폭력적인 본능·
야수(野獸)의 힘·
치욕스럽고 외면하고 싶지만 사라지지 않을 과거· 그 후회의 동력(動力)·
그것마저도 그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아아아····”
루카스의 입가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엑스칼리버]의 창백한 빛무리와 [하사받은 검]의 새파란 빛무리가 루카스의 몸에서 나오는 황금빛 오오라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신성화’와 ‘야수화’는 반대 개념· 완전한 상극·
일신(一身)에 함께 담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루카스는 동시에 다루어 내고 있었다· 두 가지 성질을 서로 중화시키며 신성성에 매몰되지 않고 야수성에 잡아먹히지 않고 그 사이의 중도(中道)를 걸어 내고 있었다·
“나는 인간이다·”
읊조린 루카스는 천천히 두 자루 검을 자신의 가슴 앞에 모았다·
철컥 철컥 철컥!
두 자루 검이 변형하며 하나로 합쳐진다·
실체는 손잡이뿐인 [하사받은 검]이 [엑스칼리버]의 손잡이 아래쪽에 마법적인 번개를 뿌리며 들러붙었다·
동시에 분리된 가드 파츠가 역시나 마법적인 번개를 일으키며 [엑스칼리버]의 손잡이를 따라 위로 올라가 [엑스칼리버]의 가드에 부착되었다·
그리고
투학-!
창백한 빛이 맺힌 성검의 새하얀 검날을 따라 푸른색 빛의 기류가 솟구쳤다·
[엑스칼리버]의 검날을 감싸듯 [하사받은 검]의 빛의 칼날이 거대하게 휘몰아치며 뿜어져 나왔다·
신성성과 야수성이 결합된 그 희고 푸른 오오라는 이윽고 평온한 황금색으로 가라앉았다·
EX등급 무구 [별을 향하여(Ad Astra)]·
너무나도 불안정해 본래라면 한정된 시간만 사용할 수 있는 이 무기가 지금은 흔들림 없이 고요하게 루카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 주인이 스스로의 마음을 공고히 했기에·
무기 또한 휘몰아치는 두 가지 힘 사이에서 평온을 찾았다·
“나는 나의 길을 나의 의지로 선택하는··· 내 운명의 주인이다·”
창백한 신성의 빛과 새파란 야수의 빛이 모두 황금빛 오오라로 완전히 합쳐졌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정면을 보며 루카스가 물었다·
“너는 어떻지 무명?”
어느새 악몽의 주인은 지척·
온몸을 외신들의 시선에 묶인 채 마리오네트처럼 삐걱거리며-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정면으로 쏘아졌다·
루카스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네 운명을····”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의 손에 어둠의 검이 뭉쳐졌다· 지금까지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어둠의 대검이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그에 맞서 루카스는 [별을 향하여]를 정직하게 휘둘렀다·
진심을 담아 작게 읊조리면서·
“···저들이 결정하게 내버려 두지 마라·”
어둠의 검과 빛의 검이 충돌했다·
어떤 소리도 나지 않고 대신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어둠과 빛이 휘몰아치며 전장이 초토화되었다· 일대에 서 있던 괴수들이 모조리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크로스로드 성벽 전체가 크게 들썩일 정도였다·
고오오오····
그리고 충돌의 여파가 가라앉았을 때·
“····”
충돌 지점으로부터 루카스는 열 걸음 이상 물러서 있었다·
가까스로 대검을 바닥에 박아 넣고 뒤로 미끄러진 끝에 그의 등은 거의 성문에 닿기 직전 힘겹게 멈췄다·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는·
《····》
충돌 지점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루카스는 열 걸음을 물러날 동안 그녀는 고작 한 걸음 밀려났다·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내려다보는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조종하던 외신들은 당황했다·
누구도·
지금까지 무한히 반복된 회차 속에서 그 누구도·
어떤 고대의 존재도 신화 속 괴물도 전설의 영웅도 인류의 모든 지혜가 집약된 병기와 가장 현명한 이들이 자아낸 전략 전술도·
그 무엇도 그녀와 정면으로 맞서서 그녀를 뒤로 한 걸음 물러서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외신들의 동요가 전해진 것일까·
《····》
처음으로·
어둠의 검을 쥔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의 손끝이 떨렸다·
“···주군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피 섞인 침을 옆에 탁 뱉은 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새파란 눈을 번뜩이며 루카스는 다시금 검을 다잡았다·
“여긴 못 지나간다· 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