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3· [LAST STAGE] Titan Fall
하늘과 땅을 모조리 메우며 끝도 없이 전진해 오는 무수한 초거대괴수의 무리·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후·”
크게 숨을 들이켠 루카스가 단단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
그러자 함교의 병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꼿꼿이 폈다· 루카스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놈들은 모두 한번 우리 인간에게 물리쳐진 상대다·”
저 호수왕국의 악몽 속에서 기어 나왔다는 자체가 이미 저들이 인간에게 토벌당한 적이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 물리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미 저들을 물리칠 방법을 우리에게 주고 가셨다·”
아니 오히려 반대다·
저 초거대괴수들을 이용해야만 이 무한한 괴수 무리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
“작전명 타이탄 폴(Titan Fall)·”
애쉬가 직접 붙인 작전명을 입에 담으며 루카스가 설명했다·
“우리 쪽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초거대괴수를 모두 꺼내는 작전이다·”
루카스는 함교 안에 대기 중인 영웅 중 초거대괴수를 부릴 수 있는 인원들을 둘러보았다·
“우선 요르문간드·”
바이올렛의 목 주위를 칭칭 휘감고 있던 구렁이 형태의 요르문간드가 쉿쉿 혓소리를 냈다· 바이올렛은 이제 달관한 듯 허탈하게 웃었다·
“또 나네····”
“그리고 크라켄·”
킹 포세이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에 차인 [크라켄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얼마 전 애쉬에게 직접 받은 그 반지였다·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초거대괴수의 제어권 탈취가 가능한····”
루카스는 나란히 붙어 서 있는 포획괴수 둘을 보았다·
“우리 편에 서준 두 군단장·”
그곳에는 듀라한 군단장과 밴시 군단장이 역시 초탈한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또 헤드 헌팅 작전인가··· 후후· 좋아· 저만큼 커다란 놈의 몸을 빼앗아본 적은 없으니· 재밌겠군·》
듀라한 군단장이 먼저 말했고 뒤이어 밴시 군단장이 입을 열었다·
모두 그녀가 평소처럼 울어대거나 [천상의 목소리] 장비로 노래하거나 그도 아니면 우는 척하면서 괴악한 센스의 농을 던지거나 그럴 줄 알았지만·
《가기 전에 한 마디만 해도 되나요?》
갑자기 평범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황한 바이올렛이 식은땀을 흘리며 밴시를 보았다·
“뭐야 갑자기 왜 멀쩡하게 말해···?”
그러든 말든 밴시 군단장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곳 전선에서 지내는 동안··· 진짜 동료처럼 대해줘서 고마웠어요·》
“····”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괴물이 되기 전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즐거웠어요·》
기겁하고 그런 모습을 보던 바이올렛이 꽥 소리쳤다·
“불길하게 왜 그래?! 갑자기 이상한 유언 남기지 말고 멀쩡하게 돌아와야 해! 알겠지?”
《후후····》
웃어 보이던 밴시 군단장은 면사포를 더 깊게 내려 입가를 마저 가렸다·
《후우우우엉·》
웃음인지 흐느낌인지 알 수 없는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작전 참가자가 모두 정해졌다·
루카스는 작전 설명을 시작했다·
“개요는 단순하다· 요르문간드는 저 코끼리 같은 괴수 ‘베헤모스’를 쓰러뜨리고· 크라켄은 저 악어 같은 괴수 ‘레비아탄’을 쓰러뜨린다· 그리고 두 군단장은 블루 펄을 타고 저 독수리 같은 괴수 ‘지즈’에게 접근·”
루카스는 상공에서 접근 중인 초거대괴수를 흘깃 살폈다·
“목을 베어내고 저 거체의 제어권을 탈취한다·”
듀라한 군단장의 품에 들린 머리가 옆으로 갸웃 젖혀졌다·
《제어권 탈취야 내가 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목은 어떻게 벨 셈이지?》
“내가 벤다·”
루카스는 간단하게 말했지만 모두가 납득했다·
그는 현재 사령관 대리이기도 했지만 세계수호전선 최강의 기사이기도 했다·
루카스라면 가능할 것이다· 아니 루카스가 아니면 안 된다·
심플한 작전을 듣고 있던 킹 포세이돈이 질문했다·
“‘쓰러뜨린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
“놈들은 초거대괴수· 전진하는 것만으로도 지형지물을 모조리 파괴할 만큼 거대합니다·”
루카스는 애쉬에게 들은 대로 작전을 전달했다·
“다시 말해서 한번 쓰러뜨릴 수 있다면 주위의 다른 거대괴수는 물론이고 소형괴수들까지 모조리 휩쓸리게 할 수 있습니다·”
“···!”
“반드시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반복해서 놈들을 계속해서 녹다운시키고 그 과정에서 다른 괴수들을 휩쓸리게 해서 피해를 키우는 쪽이 낫습니다·”
이번 최후의 방어전에서 괴수는 전멸시킬 수 없다·
적은 무한하다· 싸워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모든 작전은 지연전을 기본 원리로 삼고 있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가능한 초거대괴수를 이용해 적의 진군을 늦추는 것이 목적이었다·
“킹 포세이돈 바이올렛 그리고 두 군단장· 모두 각자 초거대괴수를 컨트롤할 수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날뛰면서 적의 피해를 누적시키고 오랫동안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저 그런데····”
손을 든 바이올렛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시간을 끄는 건 좋은데요· 돌아올 수 있나요 저희···?”
“물론·”
이야기를 듣다가 앞으로 나선 창공기사단장 미하일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 보였다·
“우리 창공기사단이 책임지고 회수하겠다· 내 기사들을 믿어다오·”
“흐흐 좋아요·”
짧게 웃은 바이올렛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진짜 나도 어디 고장 났나 봐· 이제 이 정도는 위기라고 느껴지지도 않네·”
“위기라고 여겨라 바이올렛·”
루카스가 차갑게 덧붙였다·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도박사가 어떤 최후를 맞는지는 스스로 잘 알 테지·”
“으윽 사령관 대리는 너무 차가워어····”
울상이 된 바이올렛이 쫑알거렸다·
루카스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자신의 주군처럼 따뜻한 지도자가 될 수 없음을·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은 칼처럼 잘 벼려진 차갑고 엄혹한 현장 지휘관의 역할임을·
그리고 때로 전장에는 자신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도·
“자 시간이 얼마 없다!”
모두를 다독이는 대신 이번 작전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빠르게 숙지시킨 뒤·
루카스는 호령했다·
“지금부터 초거대괴수들을··· 쓰러뜨리러 간다!”
***
펄럭-!
해적선 형태의 비공함 블루 펄의 커다란 돛대에 널따란 돛이 한껏 펼쳐졌다·
“자 가자!”
선수에서 각자의 무기를 뽑아든 두 선장- 롬펠러 남매가 호령했다·
“전속 전진!”
“고래 사냥 시간이다-!”
투학-!
마법의 닻 후방으로 생성된 푸른 바람이 쏘아졌다·
마치 로켓처럼 쏘아진 비공함이 단숨에 속도를 높였다·
해골이 그려진 졸리 로저 대신 세계수호전선의 상징인 무상징의 흑기를 펄럭이며 비공함은 남쪽으로 쾌속 전진했다·
단숨에 괴수 무리의 선두가 가까워졌다·
망원경으로 지면을 살피던 척후병들이 앞다투어 소리쳤다·
“강하 포인트 도달했습니다!”
“지금입니다-!”
루카스가 명령했다·
“바이올렛 킹 포세이돈! 출진!”
바이올렛과 킹 포세이돈은 이미 그리폰의 뒤편 안장에 앉아 있었다·
최정예 창공기사 두 명- 미하일의 두 아내가 둘을 태우고 출격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루카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운을·”
떠나는 이들이 동시에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무운을!”
타앗!
두 기사와 두 괴수 조련사를 태운 두 마리 그리폰이 갑판을 차고 하늘로 날아오른 뒤
쐐애애애액-!
다음 순간 지상으로 급속 강하를 시작했다·
두 그리폰 라이더가 지상에 가까워지자 금세 그 존재를 눈치챈 지상의 괴수들이 요격을 시도했다·
펑! 펑! 퍼버버벙···!
불꽃과 독액 마력 투사체와 빛줄기가 어지럽게 쏟아졌다·
하지만 두 그리폰 라이더는 창공기사단원 중에서도 가장 솜씨가 뛰어난 두 명이었고 그리폰 또한 가장 강인하고 날렵한 개체였다·
산개한 두 그리폰은 공중에서 갖은 곡예를 부리며 모든 요격을 회피 급강하를 이어갔다·
그중 바이올렛이 탄 그리폰이 거대한 코끼리 괴수- 베헤모스에게 접근했다· 그 몸이 워낙 거대해 하나의 산맥이 움직이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높이 또한 높았다·
창공기사가 뒤를 돌아보았고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믿을게요 언니잇-!”
한번 크게 꿀꺽 침을 삼킨 바이올렛은 눈을 질끈 감고 안장 밖으로 몸을 던졌다·
“우와아아아아!”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몰아치는 강렬한 풍압에 마력을 일으키지 않으면 제대로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사령관 대리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역시 위기로 느끼기가 힘들어····”
베헤모스의 머리 위로 자유낙하하며 바이올렛은 솔직하게 내뱉었다·
“현실감이··· 너무 없잖아아아!”
부오오오오-!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존재를 감지한 베헤모스가 거대한 머리를 치켜들었다· 괴수의 기다란 코가 느릿하게 그러나 거력을 품고 휘둘러져 왔다·
바이올렛은 자신의 목에 휘감겨 있는 요르문간드를 두 손으로 잡아챘다· 그러자 뱀은 그녀의 뜻을 알아챈 듯 부드럽게 풀려 그녀의 손에 들렸다·
“요르문간드!”
바이올렛은 힘차게 외치며 요르문간드를 아래로 집어 던졌다·
“현신(現身)-!”
그러자 던져진 구렁이의 온몸이 회백색으로 빛나더니-
번쩍!
단숨에 거대한 세계의 뱀으로 변모했다·
하늘에서 등장한 거대한 뱀은 부드럽게 꼬리를 뻗어 바이올렛을 받아 낸 뒤
거대한 입을 쩍 벌려 베헤모스의 휘둘러지던 긴 코를 콱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코끼리의 몸 위로 떨어졌다·
쿠과과과광···!
두 초거대괴수의 격돌에 폭음이 일며 일대에 부연 흙먼지가 일었다·
온 사방에 충격파가 퍼져나갔고 진군하던 소형괴수들이 일제히 균형을 잃고 나자빠졌다·
그 격돌의 현장 옆을 스쳐 날아간 두 번째 그리폰 라이더는 더욱 낮게 비행했다·
건조한 겨울 대지의 일부가 폭우와 홍수로 늪지대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늪지대의 가장 앞에 거대한 악어 같은 생김새의 괴수- 레비아탄이 느리게 헤엄치며 전진하고 있었다·
제 몸에서부터 끊임없이 빗줄기를 토해내며····
“신화시대에도 이런 풍경은 없었을 것 같은데·”
그리폰의 안장을 차고 떨어져 내리며 킹 포세이돈이 읊조렸다·
“아니··· 바로 오늘이 새로운 신화의 한 장(章)이로구나·”
역사의 현장에 자신의 이름 한 줄이 새겨진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킹 포세이돈은 반지에 힘을 집중했다·
“크라켄!”
반지에 깃든 꿈틀거리는 악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킹 포세이돈은 능숙하게 그 악의를 컨트롤해냈다·
이보다 더한 악의도 이미 상대해 본 데다가 또한····
“우리는 같은 바다의 자식이다!”
이 괴물 또한 같은 세상의 출신이었으니까·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막고자 하는- 동맹이니까!
“소환-!”
번쩍!
킹 포세이돈의 등 뒤에 수없이 많은 마법진이 겹치더니 거대한 두족류 생명체가 그 마법진을 문처럼 통과했다·
쿠오오오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최강의 해양괴수 크라켄은 킹 포세이돈을 제 몸 위에 태운 뒤 그대로 레비아탄을 향해 떨어졌다·
크고 두터운 촉수들이 악어형 초거대괴수의 위로 폭우처럼 쏟아졌다·
레비아탄은 피하지 못했다·
쿠과과과광···!
늪지대 전체가 터져나가며 사방으로 검고 거대한 물보라를 토해냈다·
***
지상에서 네 기의 초거대괴수가 서로 격돌을 시작한 사이·
계속해서 비행을 이어간 블루 펄은 이제 독수리 괴수 지즈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비행형 독수리 초거대괴수 지즈를 쓰러뜨리기 위해····
루카스와 미하일이 출격할 차례였다·
“준비됐나 사령관 대리?”
자신의 그리폰에 먼저 몸을 올린 미하일이 싱긋 웃었다·
“하늘을 베어낼 준비·”
“이미 가장 어두운 밤을 베어봤습니다·”
사뿐하게 미하일의 뒷자리에 올라탄 루카스가 건조하게 답했다·
“하늘 정도 못 벨 것도 없지요·”
“하핫···!”
가벼운 웃음을 흘린 미하일은 정면에서 가까워지는 초거대괴수를 노려보며 주홍빛 두 눈을 부릅떴다·
“그래도 조금 더 베기 쉽도록 흠집 정도는 내가 내주지·”
“버밀리온 제일의 창공기사가 함께 해주시니 영광입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제국제일검·”
미하일은 장난스레 말했으나 그 호칭에 루카스는 문득 숨을 삼켰다·
제국제일검·
한때 그 호칭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가문은 그리도 무던히 집착하고 애를 썼지만····
결국 그 호칭을 되찾은 것은 그런 호칭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살던 지금이었다·
“····”
루카스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쌍창을 고쳐 쥔 미하일이 그리폰을 출발시켰다·
“자아 가볼까! 에버블랙 최고의 검과 버밀리온 최고의 날개가 한번 역사에 기록될 협공을 펼쳐보자고!”
타앗-!
갑판을 박찬 왕의 그리폰이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눈부신 속도로 도약했다·
눈앞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독수리를 향해····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