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화
이정표(10)
천번의 신분으로 중앙전선에서 겪었던 일은, 근래 레녹이 해온 일 중에서도 굉장히 위태로웠다·
온갖 세력과 강자들이 난입하는 전장에서 마지막까지 줄타기를 하면서 겨우 일을 마무리 지은 만큼·
그 결과로 인한 리스크와 리턴 역시 레녹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상당했던바·
천번에 대한 평가나 여파가 클 거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발칸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실감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나테마의 피를 버질에게 수혈해 주는 작업을 돕다가, 이번 일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거든요·]
버려진 위성도시 바이루츠· 달빛이 비추는 열차역 휴게실 끄트머리 카페 테이블·
얼굴을 가리는 검은 면사포를 쓴 채, 느긋하게 커피를 홀짝인다·
휴게실을 휘감은 경직된 분위기와는 홀로 동떨어진 듯한 이질적인 위화감·
[거래가 거래이니만큼, 이번 일에서 제게 직접 중재를 부탁해 온지라·]
맞은 편에 앉은 레녹을 향해 미소 지은 마담이 말했다·
[브로커로서 거래를 주관하고, 여차할 경우 충돌까지 책임져 달라니· 올리비에라의 부탁은 언제나 뻔뻔하기 그지없죠·]
“····”
[흐음, 발칸의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당신에게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였나요?]
“아니·”
무표정한 얼굴로 마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녹이 대꾸했다·
“카르텔의 사장단만으로는 부족한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쪽이 왔다는 건 알겠군·”
[····]
“궁금한 건 당신이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다· 현장에 직접 나서는 쪽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라라아타 아르무슈가 다시 교단의 아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저희로서도 방관할 수는 없으니까요·]
마담이 말했다·
[포혈공이 깨어나기 전에 빨리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슬슬 저도 현장에 복귀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어서·]
“····”
사아아악···!!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은밀한 속삭임· 마담 본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오싹하고도 고요한 암시·
깊이를 알 수 없는 음습한 혈향이 그녀의 그림자 아래서 짙게 풍겨온다·
발칸에서 가장 오래된 브로커· 고위 흡혈귀· 거대도시의 많은 흡혈종과 알고 지내는 원로 중 하나·
하지만 정작 마담 본인의 무력에 대해서는 견뢰의 신분으로도 상대해 본 적은 없다·
외부인이거나, 아군에 가까운 중개인이거나·
마담 스스로 나서야 할 자리를 알고 절묘한 위치에서 이득을 챙겨가는 포지션을 잡아왔기 때문이겠지만·
실제로 이렇게 천번과 대치하는 자리에 직접 나선 지금은─
[올리비에라가 손에 넣은 아나테마의 혈액 일부를 거래 조건으로 걸은 터라, 발을 뺄 수가 없더군요·]
여유롭게 대답한 마담이 말했다·
[영락한 사도의 혈액· 그것도 귀족의 푸른 피는 흡혈종인 저로서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인지라·]
“····”
[라라아타 그 여자가 사도가 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죠· 더 좋은 피를 찾다가, 끝내는 자기 자신의 피를 탐하게 되는····]
마담이 면사포 아래로 묘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 여자를 만나보았다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다만 저에 대해서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앙헬에게 설명을 들은 건가요?]
“지난번에 발칸에 왔을 때· 이 도시에서 활동하는 브로커들을 찾아본 적이 있었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왼팔에 장착한 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이 배열장치도 그때 구한 물건이다·”
[파이로키네시스가 사용하는 영능보조기구로군요·]
힐끗 배열장치를 바라본 마담이 말했다·
[과열된 체온을 강제로 체외로 배출하는 기능은 괜찮지만, 성능과는 별개로 찾는 사람이 적어 가격대가 꽤 합리적인 선에서 형성되어 있죠·]
“····”
[다만 선천이능 적성이 없다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었나 보죠?]
장물을 보자마자 성능과 조건을 읊고 가격대와 고객을 추려내는 마담의 대답·
거대도시에서 여러 아티팩트를 취급해 온 브로커다운 답변이라 해야 할까·
“쓸데없이 말이 길군·”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내밀었다·
장막의 파편이 담긴 보관함을 꺼낸 레녹이 물었다·
“이걸 가져가려고 온 것이 아니었나?”
파아앗···!!
단단하게 밀봉된 케이스에서 별빛이 새어 나와 휴게실을 비춘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별빛에 휴게실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변했다·
주변에서 내리꽂히는 시선을 느끼면서 레녹이 말했다·
“거래의 형태를 원한다면 물건을 꺼내· 대가를 확인하고 넘겨줄 테니·”
[아이비·]
후욱!
마담의 손짓과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흐릿한 형체가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휴게실 의자를 부드럽게 한 손으로 쓸고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사라지는 인영·
은신술이 뛰어나다기보다는, 애초에 기척 자체가 인간보다는 무기물에 가까운 위화감·
기억 속에서 비슷한 상대를 찾아낸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드루이드인가·”
마담이 그 말에 순간 멈칫거렸다·
[···설마 방금 아이비를 본 건가요?]
“자연술식을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익혔군·”
눈을 가늘게 뜬 레녹이 그 존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라라벨리 출신이라면, 그 도시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걸 조건으로 삼아도 좋다·”
식물도시 라라벨리에 위치한 세계수· 미칼 젤리히가 언급했던 불사체 실험의 모체·
별의 배꼽이라 불리는 세계수에 대해 드루이드라면 알고 있는 것이 있을 터·
하지만 마담은 그런 레녹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라라벨리에서 추방당한 드루이드예요· 대답을 듣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겠군요·]
“····”
[발칸 내부에 위치한 그린벨트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녀가 제 아래서 일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거대도시의 그린벨트가, 대륙 각지의 드루이드들에게 상당한 관심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레녹이 막 이 도시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도 그린벨트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을 정도였으니·
마담이 레녹의 신경을 돌리려는 듯, 아이비가 내려놓은 케이스를 열어젖혔다·
딸깍·
작은 열쇠와 반지 하나가 케이스 안에 놓여 있었다·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가 자신의 연구실에 꼭꼭 숨겨둔 최상급의 컬렉션 중 하나죠·]
반지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기운에 레녹이 미간을 찌푸린 찰나, 마담이 말했다·
[자이로의 함궤· 그중에서도 최고위 장물이라는 5번 개인금고와 그 열쇠예요·]
“자이로의 함궤라면····”
그 말을 듣는 즉시 레녹도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기억해 냈다·
군령도시로 떠나기 전, 빅터의 신분으로 수단을 강구할 당시 사브리나가 갖고 있던 초소형 개인금고 아티팩트·
대륙 전역에 수량이 정해진 희귀품이자, 차원함수로 잠겨 있어 정해진 열쇠로만 열 수 있는 물건이라 했던가·
[청의 눈을 탈퇴한 뒤로, 마땅한 거점 없이 대륙을 떠돌고 있다고 하시던데·]
마담이 웃었다·
[당장 어딘가에 머물 생각이 없다면, 이 함궤가 그 쪽에게 무척 도움이 될 거예요·]
“개인금고가 아니더라도 품이 부족하지는 않은데·”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연구실도 아니고, 마법사에게 이런 금고가 필요할 거라 생각하나?”
[자이로의 5번 함궤는 귀중품이 아니라 인간을 숨기기 위한 금고니까요·]
마담이 대답했다·
[당신 같은 변절자에게는 굉장히 유용하게 쓰일··· 일종의 은신처인 셈이죠·]
“···은신처?”
[반지를 착용하면 은신처의 위치를 알 수 있고, 열쇠는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해요· 두 가지 물건 중 하나라도 없다면 은신처를 찾을 수 없도록 되어 있죠·]
능숙하게 설명을 이어나간 마담이 말했다·
브로커 일을 오랫동안 해온 그녀로서는 애초에 이런 식의 장물 설명에 이골이 나 있는 것이겠지·
“그럼 은신처의 위치를 카르텔 측에서도 알고 있는 건가?”
[자이로의 5번 함궤를 이용해 만들어지는 은신처는, 반지를 착용한 사용자의 반경 1km 안팎에서 무작위로 생성되거든요·]
“뭐?”
[반지를 착용한 순간 은신처의 무작위 생성, 위치탐색, 유지와 존속이 동시에 진행되고, 반지를 빼면 사라지죠·]
듣도 보도 못한 아이템의 능력에 레녹이 멈칫거린 사이, 마담이 말했다·
[잠시 몸을 숨기는 용도로는 이것보다 좋은 아티팩트는 흔치 않을 거예요·]
“····”
반경 1km 시공간 어딘가에 사용자를 위한 은신처를 무작위로 생성하는 능력이라·
함궤의 설계자인 자이로가 차원 함수를 다룰 수 있는 뛰어난 장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생각 이상이다·
명확한 원리는 차후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당장 에반에게 있어 유용해 보이는 물건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는 일·
“···좋아· 나쁘지 않군·”
반지와 열쇠를 챙긴 레녹이, 장막의 파편이 담긴 케이스를 마담에게 던졌다·
곧바로 케이스를 열고 내부를 살핀 마담의 면사포가 눈부신 별빛으로 물들었다·
찰칵·
[이것이····]
아른거리는 별의 가루를 소복이 쌓아 담아둔 듯한 아름다운 형상·
“오····”
별가루를 처음 보는 앙헬조차 내심 감탄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
하지만 마담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케이스를 닫은 뒤 단단하게 밀봉했다·
치익!!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뒤, 그것을 케이스의 균열에 찍어 바른다·
순식간에 마킹을 끝낸 마담이 케이스를 허공에 건네듯이 들어 올린 순간,
후욱!!
흐릿한 형체가 케이스를 들고 엄청난 속도로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조심해서 간수하는 게 좋을 텐데·”
팔짱을 낀 레녹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걸 구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꽤 고생을 했거든· 다시 구해줄 수는 없을 거다·”
[그렇겠죠· 천번이 첫 번째 관문을 박살 낸 이유를 짐작이라도 누가 할 수 있을까·]
의자에 걸쳐둔 외투를 챙긴 마담이 천천히 돌아서며 말했다·
레녹을 바라보는 마담의 눈동자가 더없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충고해 두죠, 에반 마르티네스· 앞으로는 이쪽과 엮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
[이번 일로 인해 당신은 중앙에서 엄청난 명성을 손에 넣었어요· 그 영향력은 당신이 겪은 패배조차 무색하게 만들겠죠·]
쏟아지는 달빛을 가리듯이 양산을 펼친 마담이 말했다·
[무엇을 원했기에 이 일을 맡았는지 모르겠지만 맹목적이고, 과도하죠· 전 그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네요·]
“재미있는 말이군· 어째서지?”
[견뢰와 당신은 다르면서도 닮았으니까·]
마담이 걸음을 돌려세우자, 고요한 휴게실에서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범접할 수 없는 재능과는 별개로, 결정적인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마저 비슷하죠· 그렇기에 완전히 반대되는 곳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
그것은 카르텔과 마담 스스로 이미 견뢰의 편에 섰다는 인식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말이겠지·
견뢰와 상반되는 처지에 서 있으면서도, 그 무위로는 견뢰와 견줄 수 있는 마법사를 그만큼 경계하고 있다는 증거·
발칸에서 가장 흉악한 악명을 지닌 견뢰와, 중앙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천번·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프리랜서와, 주인을 위해서라면 도시를 불태우는 주시자·
재능 말고는 무엇 하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두 마법사가, 외려 그렇기에 비슷한 구석이 있음을 마담은 이해하고 있다·
그건 마담이 그만큼 아주 오랫동안 살아오며, 이성이나 논리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겠지·
[뭐, 오래된 흡혈귀가 실없는 소리를 했다고 들어도 좋고·]
한 손으로 양산을 펼친 마담이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거래였어요· 천번· 부디 다음번에는 서로 뵙는 일이 없기를·]
“····”
[저도 등대지기의 총애를 받는 마법사를 오래 붙잡아두고 싶지는 않거든요·]
검은 양산이 마담의 몸을 가린 순간, 마담의 기척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후욱!!
달빛이 비치는 적막한 휴게실· 여전히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레녹을 바라보는 카르텔의 초인들·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메릴다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톤파를 쥔 청년이 레녹을 주시한다·
정장을 입은 이사회의 임원들· 마담의 휘하 프리랜서로 보이는 독특한 마력사용자들·
하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일 없이, 끈질기게 이 침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사장단을 등진 앙헬이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레녹의 앞에 섰다·
“예, 그러면··· 여기서 끝이군요·”
“중앙에서 네 도움이 없었다면 일이 훨씬 어려웠겠지·”
이능개화전단과의 인맥으로 버나드를 만나고 수술실에 진입하기까지· 앙헬의 조력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음은 사실이다·
부드럽게 대답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다음번에 만난다면 한 번 정도는 목숨을 살려주지·”
“하, 그게 무슨 보상이라도 된답니까·”
쓰게 웃은 앙헬이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렇군요· 우리가 서로 다시 봐서는 안 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쩌저적···!!
창가에 손을 갖다 대고, 스스로의 몸을 차가운 서리로 바꾼 앙헬이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의 의사가 바뀌지 않는 이상, 저희는 결국 반 님의 편일 수밖에 없으니까·”
“····”
“저도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고 싶지는 않단 말입니다·”
경망스럽기는 했지만, 혼자 너스레를 떠는 앙헬의 태도는 꽤 유쾌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앙헬 역시 관문도시의 일을 겪으면서 에반에게 나름의 친밀감을 느꼈다는 증거겠지·
아니면, 단지 레녹이 이런 성격의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뿐일까·
“참고하도록 하지·”
피식 웃으면서 턱을 괸 레녹이 고개를 젓자, 앙헬이 씩 웃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레녹을 주시하던 카르텔의 초인들이, 하나둘씩 천천히 기척을 감춘다·
동시에 바이루츠 전역을 포위하고 있던 무수한 기척들이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희미해졌다·
후욱!
순식간에 고요해진 열차역 휴게실·
너른 광장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레녹의 모습·
발 아래를 비추는 달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레녹이, 천천히 무릎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 그럼····”
장막의 파편도 카르텔에게 넘겼고, 그에 대한 대가도 챙겼다·
카르텔의 관계자들도 떠나고 홀로 남은 이 자리·
마지막으로 처리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 * *
거대도시 발칸 49구역· 견뢰의 마탑 최상층 집무실·
“반!!”
노크도 없이 벌컥 집무실 문을 열어젖힌 제니가 소리쳤다·
“출근했으면 얘기를 해줘야지· 지금 네 명의로 결제해야 되는 서류가 며칠째 밀려 있는─!!”
품 안에 가득 안아 든 종이를 내려놓던 제니가, 레녹의 모습을 보고 말을 멈췄다·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안대를 쓰고 기대 누운 마법사의 모습·
한눈에 보기에도 피로함을 감추지 못하는 행색에 제니가 멋쩍은 기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연구가 바빴다는 건 알아· 하지만 48구역까지 아이템 사업을 확장하는 안건에 대해 네 동의가 없으면 일을 시작조차 할 수 없─”
“펜· 부탁하지·”
제니가 순순히 품 안에서 만년필을 꺼내 레녹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레녹이 제니가 가져온 서류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너····”
레녹의 눈에 짙게 어린 다크서클을 본 제니가 무어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사각사각·
레녹이 직접 손에 쥐고 서명해야만 정당한 권한으로 인정되는 아티팩트·
대부분의 업무는 제니가 대신 처리하지만, 탑주의 인가를 직접 받아야 하는 사안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순식간에 서명을 끝낸 레녹이 만년필을 제니에게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하군· 혹시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나?”
“···아니· 이걸로 끝이야· 내가 좀 무신경했네·”
레녹의 눈치를 보던 제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근에 카르텔이랑 같이 협업하는 일 때문이지?”
“비슷해· 그쪽과 엮인 일이 좀 있지·”
관문도시의 일을 마치고 마탑으로 복귀한 다음 날·
며칠 내내 중앙전선을 뛰어다닌 만큼, 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명의 배려로 인해 부상도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장막의 파편을 구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 어디까지 커졌다가 수습되었는지·
에반의 신분을 정리해 둔 지금은 그나마 부담이 덜하긴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아도 카르텔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어·”
제니가 그렇게 말하며 작은 편지 한 통을 서류 사이에서 꺼내 내밀었다·
“회장이 너를 찾는대· 즉시 답신을 달라던데, 어떻게 할래?”
“바로 가겠다고 전해·”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동안 확인하지 못한 바깥의 소식만 확인하고 출발하지·”
대외적으로는 연구에 집중하다 막 나온 셈이니, 미뤄두었던 일을 손봐야 한다·
펠릭스와 페이샤의 수련은 물론이고, 바일런 연구소에 맡겨둔 휴대폰 어플 개발·
다비가 개발 중인 딥웹의 검색엔진과 레녹이 습득한 여러 아티팩트와 술식의 최적화까지·
결정적으로─
“아, 바깥의 소식은····”
제니 역시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곤란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긴, 반 너도 당연히 알아야 하니까· 중앙전선에 대해 수집해 둔 자료를 보내줄게·”
“자료?”
벌컥!
대답 대신 집무실을 나선 제니의 기척이, 순식간에 마탑 층계 사방을 뛰어넘는다·
탑에 설치해 둔 공간전이 시스템 라이트닝 커넥터·
우로보로스 마법체계를 익힌 제니가 탑의 기능을 능숙하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인가·
“····”
제니가 말한 자료를 모아오려면 어차피 시간이 좀 걸리겠지·
여기서 계속 눈을 붙여봤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차라리 마탑을 돌아다니며 밀린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편이 나을 터·
무거운 눈꺼풀을 문지르며 일어선 레녹이 곧바로 집무실에 위치한 전화기를 들었다·
[예· 딜런입니다~]
“딜런· 나다·”
[···반?]
“웨이안은 지금 어디에 있지?”
* * *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
두꺼운 털옷을 뒤집어 쓴 일련의 사람들이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 속을 걷고 있었다·
철퍽!!
“큭···!!”
눈 속에 숨겨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남자가, 어깨를 떨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통과 분노, 추위로 범벅이 된 얼굴·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지는 배에는 봉합되지 않은 상처가 길게 나 있다·
이를 악물고 앞서가는 일행을 노려보던 남자가 이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야차·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거냐···!!”
“조금만 더 참지, 블레이버 마탑주·”
그제야 앞서 걷던 일행 중 한 명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나운 인상의 키가 큰 청년· 탑주를 바라보는 눈동자의 흰자위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흰자위와 홍채의 색이 반전된 역안으로 물끄러미 탑주를 바라보던 청년이 말했다·
“곧 있으면 정지술주(停止術主)의 권역이다· 네 발화기관의 폭주를 억제할 수 있는 건 그의 술식밖에 없겠지·”
“관문도시를 탈출한 뒤로 40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어···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렵단 말이다·”
탑주가 힘겹게 배를 움켜쥔 채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상처를 임의로 봉합한 탓에, 장기가 흘러내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
접합술주의 패배가 확정되기 전 수술실을 탈출한 마탑주가 홀로 움직이고 있던 것은 아니다·
주문연맹 산하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회복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바·
하지만 수술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한 채 이어지는 강행군은, 탑주의 몸으로 버티기 어려운 고행이었다·
안정이 필요한 이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오히려 탑주의 초인적인 정신력을 증명하는 바·
“우, 움직이기 힘들면··· 제, 제가 도와드릴까요?”
청년의 옆에 서 있던 창백한 안색의 여성이, 탑주를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면서 입을 연 여성이 손을 들어 올렸다·
“와, 완전히 죽어주시면 시, 시체 정도는 제 술식으로 우, 움직이게 할 수 있는데····”
“····”
“시귀술주· 그만 둬라·”
탑주가 그 황당한 답변에 입을 다문 사이, 야차라 불린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살려서 맹주에게 데려가야 해· 네 시귀가 되면 며칠간 한 일이 쓸모가 없어진다·”
“어, 어차피 지금도··· 제 술식 대상에 조금씩 자, 잡히고 있는데요···?”
“그래··· 맹주·”
흐릿해져 가는 탑주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맹주··· 주문연맹주를 만나게 해 다오· 그와 직접 만나서, 협상하겠다·”
“···블레이버 마탑주·”
탑주의 앞으로 다가온 야차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접합술주가 사망하며 대연결의 축에 상당한 공백이 생겼다· 그 부담을 감당하는 것은 남은 대술주들의 몫이지·”
“····”
“정지술주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그 술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술주인 그가 직접 대연결의 축을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야·”
풀썩!
힘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는 탑주의 어깨를 잡아 세운 야차가 말했다·
“곧 있으면 군단의 열병식이 열린다· 그 전까지는 대연결의 조정을 끝내야 하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 부탁하지·”
“이, 이미 기절한 것 같은데····”
“아, 그런가? 탑의 마법사들은 참 다루기 까다롭군·”
의식을 잃고 혼절한 탑주를 가볍게 어깨에 들쳐 멘 야차가 걸음을 옮겼다·
“결국 대부분의 마탑은 본질적으로 연구기관에 가까운 경우가 많으니· 이래서 블레이버가 아니라 토르번을 원했는데·”
“토, 토르번의 탑주는····”
“자기애가 충만한 그 늙은 마법사의 성정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해·”
야차의 시선이 지나쳐 온 설원을 넘어, 지평선 끝을 향했다·
“하지만 도무지 집중을 하지 못하던 그 마법사가, 마침내 발칸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니··· 이번에는 좋은 구경거리를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