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 [Side Story] 첫 순간
전투가 끝났다·
다른 곳의 피해는 경미했으나, 제3 전진기지에서 청기사 부대를 맞아 싸운 병력의 피해가 상당했다· 전선 붕괴 때 후퇴하기도 전에 적의 공격에 휘말린 탓이다·
나는 병사와 인부들을 데리고 제3 전진기지를 수습하러 직접 왔다·
청기사의 냉기 공격에 동사(凍死)한 시체들이 지천이었다·
“···편히 잠들기를·”
한 이름 모를 병사가 적을 향해 검을 들고 달려드는 자세 그대로 얼어 죽어 있었다·
나는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 눈을 감겨주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제3 전진기지에서 전투 중에 추락한 블루 펄은 비상 착륙에 성공한 뒤, 자력으로 비공함 수리를 마치고 합류했다·
블루 펄을 모는 두 해적왕, 롬펠러 남매는 혀를 내둘렀다·
“와··· 괴수전선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이게 피해가 적은 편이라고? 쟤네들 무슨 세상을 끝장낼 기세였는데? 이게 그나마 수월하게 막아낸 편이라고?”
우리는 모두 쓰게 웃으며 준비해 온 운구함에 전사자들의 시체를 담았다·
눈을 한번 질끈 감은 두 해적왕도 전사자 수습에 가담했다·
긴급 수리를 끝낸 블루 펄이 전사자의 시체를 모두 수습해 날랐다·
뒤이어 날아온 비공함 라 만차가 제3 전진기지에서 망가진 이동성벽 3량을 들고 크로스로드로 귀환했다·
“····”
귀환하는 라 만차의 함교에 앉아,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가다듬었다·
금세 크로스로드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흔여덟 번째 방어전을 정리하고, 또 동시에 마흔아홉 번째 방어전을 준비하기 시작하며 크로스로드는 분주했다·
이제 특별히 내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도시의 전경을 살피며 나는 생각했다·
‘다음 방어전, 스테이지 49가 사실상 우리가 클리어해야 하는 최후의 스테이지다·’
게임에서 크로스로드가 막아낼 수 있는 방어전은 스테이지 49가 끝·
그 뒤에 이어지는 최후의 방어전, 스테이지 50은 ‘공략 불가’의 영역에 있다·
스테이지 50이 시작되면, 최종보스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무한한 괴수를 이끌고 검은 호수로부터 쏟아져 나온다·
최강의 괴수가 이끄는 무한한 적 군단 앞에서 승리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서 게임에서 제시되는 방법은, 스테이지 50 시작 전에 결사대가 던전에 진입,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쓰러뜨리는 것·
괴수화된 무명을, 악몽의 총집체가 된 그녀를, 우리 손으로 죽이는 것·
이것에 성공하면 게임에서 맞이했던 그 엔딩이 나온다·
루카스 홀로 적과 아군의 시체밭 위에 서 있던 그 마지막 장면이····
···하지만 이제 알 수 있다·
그 엔딩으로 가는 것은 제대로 된 공략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엔딩은, 그리고 내가 생각한 공략은··· 다른 곳에 있다·’
에이더 녀석과 내가 함께 도달하고자 했던 ‘진엔딩’은, 기존의 루트를 답습해서는 닿을 수 없다·
무대 위에서 조종당하는 배우에서 벗어나, 진정 내 운명을 스스로 이끄는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룰의 바깥에서, 룰을 부수고, 룰을 지배하고, 룰을 제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퍼즐은 이미 모두 내 손안에 모였고, 나는 그동안 무수히 반복된 이 멸망유희에서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정말 솔직히 말해서·
‘두려워·’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내가 정한 길이, 내가 찾은 공략로가, 정말로 맞을까?
정말 이대로 가면 우리가 바라던 진엔딩이 나올까?
나의 실책으로,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내 깃발을 따르던 모든 이들이 괴로운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습네·’
나는 복잡해지는 생각을 접고, 손으로 이마를 훑어냈다·
돌이켜보면 내 싸움은 언제나 외줄 타기였다· 언제나 배수진이었다· 언제나 생사결이었고, 언제나 최후의 한판이었다·
이제 와서 이런 불안이 엄습하는 것은, 진정 끝이 가깝기 때문이겠지·
‘당면한 방어전에 집중하자·’
최후의 결전, 스테이지 50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스테이지 49를 클리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스테이지 49에서는 높은 확률로 현재의 마왕 대리- 크라운이 무언가 수를 쓸 터·
그는 자신의 동생 무명에게 구원이 있기를 빌고 있지만, 현재는 마왕이 그에게 건 금제 때문인지 명백한 적장으로 돌아선 상태·
그리고 적장으로서 지난 46, 47, 48 스테이지를 치르며 우리 쪽을 공략할 나름의 방법을 찾아내려 했을 것이다·
놈이 정말 우리의 약점을 찾아냈을지, 아니면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다른 수를 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스테이지 49는 앞선 세 스테이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
‘계속해서 정찰을 수행하면서··· 준비를 철저히 하자·’
나는 인벤토리에 보관한, 앞선 세 스테이지에서 회수한 마력핵들을 살폈다·
대쥐모신으로부터 회수한 마력핵 5개· 탐진치로부터 회수한 마력핵 3개· 아포칼립스 나이츠로부터 회수한 마력핵 4개·
‘대쥐모신 마력핵은 상태가 영 불안정해· 이걸로는 비교적 제작이 간단한 미사일을 만들자· 탐진치와 아포칼립스 4기사 마력핵은 너무 고급 재료야··· 이건 일정이 빡빡해도 장비를 만드는 게 낫겠네·’
그리고 또 그동안 쌓인 상자들도 열고, 라 만차를 차원이동함으로 개조하는 과정도 박차를 가해야 하고, 망가진 이동성벽 3량도 긴급수리를 해야 하고····
연전만큼이나 빡빡한, 숨 막히는 전투 사이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사이 비공함이 착륙했다·
퇴함과 동시에 부하들에게 바쁘게 지시를 내리려 했는데, 주위 사람들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응?”
다들 격납고 앞의 한 공간에 빙 둘러 모여서,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입을 가리고 있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두 눈을 부릅뜨거나 심지어는 눈물마저 흘려댔다·
“꺄아아아아!”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이런···!”
“나 떠, 떨림이 멈추질 않아····”
“이런 날이 오다니··· 아아아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나는 얼른 외곽의 사람들을 헤치고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다들 왜 그러는····”
나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닥쳐야 했다·
안으로 파고들자, 그제야 내 눈에도 들어왔기 때문이다·
···걷고 있었다·
아장· 아장·
시드가·
막 전장에서 퇴근해 휠체어를 끌고 돌아온 엄마, 릴리를 향해··· 유모의 품을 벗어나서 두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시드의 첫걸음마 순간이었다·
“오 마이 갓·”
조그맣고 뽀얀 아기가 복슬복슬한 붉은 머리를 흔들며, 갈색과 녹색이 섞인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아장아장 제 엄마를 향해 걸어오는 장면은 초월적으로 귀여웠고, 또··· 어째서인지, 장엄하기까지 했다·
나도 주위에서 충격에 빠진 사람들과 똑같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전율로 온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 살이구나!’
하필 첫돌 때는 방어전 당일이라 제대로 축하해 주지 못했고· 조용히 생일 파티를 했다기에 나도 선물을 보내주었는데·
아무튼 벌써 시드가 한 살이다· 이제 충분히 걸음마를 뗄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영원히 기어다닐 줄 알았는데! 영원히 옹알이만 할 줄 알았는데! 영원히 우리 전선의 대표 응애일 줄 알았는데!
‘···아니, 잠깐만·’
걸을 수 있게 됐다는 건·
설마, 그럼 이제····
“아우····”
놀라고 기쁜 얼굴로 두 팔을 뻗고 ‘옳지! 옳지! 천천히!’ 하는 릴리를 향해·
마찬가지로 두 팔을 뻗고 아장아장 다가가던 시드가 활짝 웃더니, 갑자기·
“어마!”
···저질렀다·
릴리와 시드를 둘러싸고 이 광경을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탄식과 감탄과 기쁨의 절규가 주위를 메웠다·
첫걸음마를 떼는 것과 동시에, 첫 말도 떼버린 것이다!
“····”
말없이 입술을 앙다문 릴리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며 들어찼다·
다급하게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은 릴리가 마주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응, 그래! 엄마야! 이리 온, 우리 아가···!”
시드는 신이 나서 앞으로 다급히 걸음을 떼다가····
휘청!
앞으로 홱 넘어졌다·
기겁한 릴리가 휠체어를 박차고 앞으로 몸을 날리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으랏차차!”
“아자자잣!”
내 뒤에 서 있던 두 해적왕이 괴상한 기합성과 함께 다급하게 손을 뻗어, 바닥에 물 쿠션을 생성해 시드를 받아내 준 것이다·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자리의 모두가 두 해적왕에게 엄지를 치켜주었다· 롬펠러 남매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몽실거리는 물 쿠션 위에 엎어져 있던 시드는 쿠션의 감촉이 재밌는지 까르륵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혼자 쿠션을 디디고 일어서서는····
“어마!”
릴리를 향해 다시금 아장거리며 걸어갔다·
이 짧지만 위대한 몇 걸음을 기어코 다 내디딘 아들을 릴리는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잘했어, 우리 아들· 정말 잘했어····”
릴리는 시드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시드가 걸음마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 혹시 같이 있는 자신이 걷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가 아닌지·
말문을 트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 항상 옆에 있어주지 못하고 전선에서 업무 처리로 바빠서 그런 것은 아닌지·
그도 아니면 혼혈이기 때문인지, 난산의 후유증은 아닌지····
그간 마음고생이 많아 신전에 상담을 자주 해왔다고 들었는데, 그 모든 고민이 해소되는 한순간이었다·
“고마워, 이렇게 잘 커줘서····”
릴리의 품에서 시드는 천진하게 웃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나, 나도 불러줘! 루카스 형님이라고!”
“시드야! 에반젤린 누나다! 누나아!”
“나도! 베르단디 누나라고 해줘! 어서!”
“아니 양심이 있으면 이모라고 하세요····”
“켈리베이 삼촌이다, 아가! 자! 삼촌이라고 해봐!”
“삼촌은 무슨 할아버지겠지!”
주책을 부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나도 외쳤다·
“대, 대부(代父)님이라고!”
아기의 맑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마주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대부님이라고 불러다오, 시드야!”
스테이지 49가 시작되기 전·
우리 전선에 찾아온, 평화롭고 기적 같은 어느 순간이었다·
그리고····
***
····
***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
의식이····
노이즈가 낀 것처럼, 명확하지 않다·
***
···나는·
***
나는···?
***
“대부님·”
멍한 사고(思考)를 느닷없이 깨부수며, 어리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대부님· 정신 차리세요·”
“어···?”
혼탁한 의식이 점차 깨어난다·
머나먼 과거의, 행복하던 시절의 꿈으로부터 깨어나, 현실로 되돌아온다·
나는 살을 엘 듯한 추위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이곳은, 어느 산중의 동굴 입구다·
나는 낡고 더러운 털이 덕지덕지 붙은 방한용 코트를 입은 채, 동굴 입구에 쪼그려 앉아 선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상태였다·
동굴 바깥의 하늘에서는 끝없이 눈이 쏟아지고 있다·
아니, 아니- 이것은 눈이 아니다·
이것은 잿가루다·
멀찍이 보이는 희게 얼어붙은 대지가 휘몰아치듯 검게 불타고 쪼개지며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이렇게 하늘로 솟구쳐 올라간 대지가 잿가루가 되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온통 차게 얼어붙은 대지를 불태우는 검은 폭풍·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잿가루의 비·
“····”
나는 잠시, 멍하니 멸망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래, 마왕과의 마지막 결전에서 패배하고····
인세는 완전히 파멸·
그로부터 어느덧 15년이 지났지·
“대부님·”
다시금 부르는 목소리에, 동굴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제 엄마를 닮은 붉은 머리칼을 찬바람에 휘날리는, 제 아빠를 닮은 녹색과 갈색이 섞인 눈을 곧게 뜬····
인류 최후의 대마법사·
시드가 15년 전처럼 또렷한 시선으로 나를 향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조금 전에, 엄마가 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