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 1장 위기와 악연은 연이어 찾아온다 (2)
혈로가 생겨났다· 소무상이 지나온 길이다· 배가 갈라져 비명을 지르는 사람 목이 갈라져 꺽꺽거리는 무인들· 모두 소무상에 의해 상처를 입은 자들이었다·
하진월은 삼십 장을 전진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 삼십 장이 십 리 길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이제까지 수십 명을 죽였다· 하지만 남아 있는 자는 그보다 몇 배가 더 많았고 걸어가야 할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후욱! 후욱!”
소무상의 입술을 비집고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 혼자였다면 벌써 삼십 장을 전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소무상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소무상은 결코 짐스럽다고 느끼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다·
소무상은 청운검법을 펼치며 자신과 하진월 등을 보호했다· 그나마 당미려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주었기에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당미려는 암기를 날려 적들을 견제했다· 암기를 날리는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암기가 얼마 남지 않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해 놓는 건데·’
당문의 장원에 머무느라 방심했다·
평소라면 전신 곳곳에 암기들을 숨겨놓았겠지만 지금 그녀의 몸에 가지고 있는 암기의 수는 겨우 십여 개· 적들을 견제하는 데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적들은 집요하게 당기문과 하진월을 노렸다· 그들이 일행의 약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약점을 물고 늘어지다 보면 언젠가 파탄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적도 그렇게 판단하고 두 사람을 공략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적들의 공세에 손발이 어지럽고 눈이 팽팽 돌아갔다· 자연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당기문은 미처 독을 살포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소무상과 당미려가 적들과 엉켜 있기에 자칫 하독을 잘못했다가는 그들까지 중독될 수 있었다·
이런 난전에서는 하진월도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앞으로 이십여 장만 가면 된다·’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자가 책사이다· 그가 예측한 미래에는 분명 이 같은 상황이 있었고 그에 대한 대비책도 확실히 있었다· 문제는 대비를 해놓은 곳까지 가는 길이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하진월은 나았다· 체력과 민첩성이 떨어지는 당기문은 적들의 집중 공세에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크윽!”
또다시 당기문이 답답한 신음성을 흘렸다· 적들의 공격에 다리에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그나마 피륙의 상처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움직임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른 곳도 아닌 다리다· 다리를 질질 끌고 소무상의 뒤를 따르려고 했지만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어져 갔고 덩달아 하진월과 당미려도 뒤로 처졌다·
당기문의 얼굴에 단호한 표정이 떠올랐다·
“안 되겠네· 아우 먼저 가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형님?”
“보다시피 난 짐이 될 수밖에 없네· 자네라도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내가 어떻게 형님과 미려를 버립니까?”
“하지만 나와 함께하다가는 자네까지 발목을 잡히고 말 것일세·”
“형님!”
하진월의 고함에도 당기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쉬가악!
그 순간 창 한 자루가 당기문을 향해 날아왔다· 다리에 상처를 입지 않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극쾌의 공격이었다· 소무상과 당미려의 신경이 분산되어 어떻게 도와줄 수도 없는 급박한 상황에 당기문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빠각!
순간 그의 앞쪽에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당기문이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류산·”
당기문을 대신해 창을 찔러오던 자를 쓰러뜨린 자는 명류산이었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서 그를 따라가십시오· 뒤는 저에게 맡기고·”
“류산·”
“제길! 죄송합니다· 그냥 잠깐 그년의 유혹에 정신이 나갔습니다· 욕은 나중에 먹을 테니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괜찮다 류산· 그럴 수도 있지· 이제라도 잘못을 깨달았으니 그걸로 됐다·”
그제야 명류산이 환하게 웃었다·
“사부! 사부라고 불러도 되죠?”
“그래 내가 바로 네 사부다·”
당기문의 대답에 명류산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그 빌어먹을 놈의 자존심 때문에 먼저 말하지 못했지만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이다·
이젠 됐다· 그렇게 듣고 싶던 말을 들었으니까·
“사부 어서 여길 빠져나가세요·”
“류산아 같이 가자·”
“누군가는 뒤에 남아서 이들을 막아야 해요· 이들만 막고 금방 따라갈 테니 어서 가십시오·”
“류산 꼭 오거라· 네놈에게 먹여야 할 독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떠그럴! 어서 가십시오·”
명류산은 뒤에 남아 당기문과 하진월 등을 향해 달려드는 적들을 대신 막았다· 짐승같은 비명과 고함성이 대지를 울렸다·
“가십시다 형님· 그게 저놈을 도와주는 것이오·”
하진월이 당기문의 등을 밀었다· 그에게 떠밀리면서도 당기문은 명류산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하진월이 명류산에게 말했다·
“고맙다 류산· 나는 너를 믿었다·”
“믿기는 개뿔· 그래도 고맙수· 이 말종 같은 놈에게 한 가닥 미련을 가져줘서· 덕분에 홀가분해졌수·”
“꼭 무사히 따라왔으면 좋겠구나· 진심이다·”
“할 수 있으면····”
명류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발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면서 적들의 공세를 튕겨 내거나 흘려보냈다· 그사이 당기문과 하진월은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아 씨발!”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니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명류산은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래도 사부에게 인정받았잖아? 그러니까 나도 당문의 제자가 맞지· 사천의 촌놈이 출세했다 명류산·’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행보였다·
사천의 서부 고원에서 나 잘났다고 큰소리치던 무지렁이가 진무원 일행을 만나 내력을 발산할 수 있는 고수가 되었고 혈견무랑(血犬武郞)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다·
독을 복용하는 것은 아직도 끔찍이도 싫었지만 그 덕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
“덤벼라 개새끼들아! 다 뜯어줄 테니까!”
명류산은 정말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빠각!
그의 주먹질 한 방에 적의 안면이 함몰되면서 피가 튀었다· 얼굴과 가슴에 피가 묻었지만 명류산은 개의치 않았다·
명류산은 사천의 삼류 무관에서 배운 무공 따윈 잊어버렸다· 지금 그가 펼치는 무공은 진무원에게 얻어맞으면서 몸에 익힌 동작이었다·
특별한 초식도 없고 형식의 구애도 받지 않는다· 그저 본능에 의지해 움직일 뿐이다· 그런데도 적들은 그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콰직!
“크악!”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적이 지르는 비명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명류산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자신이 적의 발목을 붙잡아놓는 만큼 당기문 등이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명류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미친 듯이 움직이다 보니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에게 약점이 있다면 단시간에 빠르게 내력과 실력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안정적인 기반이 부족했다· 특히 체력이나 내공의 운용이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명류산은 그런 체력적인 약점을 오기로 보충했다· 내력의 운용은 미친 듯한 육체적인 능력으로 대체했다·
그렇게 명류산은 피로 물든 한 마리 늑대가 되었다· 적에게 상처를 입히는 만큼 그의 전신에도 상처가 늘어났다· 지독한 통증이 전신을 울렸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가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사이 당기문 등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명류산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이 호래자식이····”
명류산에 막혀 당기문 등을 놓친 무인들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뼈를 갈아 마시겠다·”
“조까 이 씨발 놈들아! 약속도 지키지 않고 암습이나 일삼는 치졸한 새끼들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 거냐?”
명류산은 상대의 속을 터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의 도발에 무인들의 얼굴이 노기로 물들었다·
무인들도 이젠 필사적으로 명류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명류산의 옆구리에 큰 구멍이 뚫렸다· 명류산이 구멍을 뚫은 놈의 머리를 날려 버렸지만 그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크윽!”
그는 구멍이 뚫린 옆구리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내장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렸다·
지독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그사이 무인들 중 하나가 그의 등에 칼을 꽃아 넣었다· 명류산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놈의 가슴뼈가 송두리째 부러지는 것이 발끝에 느껴졌다· 하나 그 감촉을 음미하기도 전에 또다시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명류산은 이제 자신이 싸워야 하는 이유도 잊었다· 그저 미친개처럼 달려들어 적을 물어뜯었다· 그의 전신은 피로 물들었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사이 배와 어깨에 또다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명류산은 움직였다· 손과 발에 힘이 빠지자 이빨로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놈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물고 있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입안으로 놈의 살점과 피가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버둥거리던 놈의 움직임이 잦아들자 명류산이 입을 벌리고 시체더미 위에 누웠다·
“흐으!”
이젠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구멍 난 폐가 더 이상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할 만큼 했다· 여한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눈앞에 흐릿해져 왔다· 세상이 온통 붉게만 보였다·
‘끝인가?’
명류산은 피식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항상 자신의 마지막이 궁금했다· 다른 이들처럼 그냥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초라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모든 것을 불태웠으니 여한 따윈 남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그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아직도··· 남아 있었나? 젠장 더 이상은 모르겠다·’
마지막 한 명쯤은 소무상이 어떻게 하겠지 하고 명류산은 생각했다·
그때 새로이 나타난 자가 그의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명류산은 겨우 눈을 떴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릿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눈빛이 왠지 슬퍼 보였다·
“누 누구?”
“류산·”
귀에 익숙한 목소리다·
“무원?”
명류산과 마찬가지로 혈인이 된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그가 명류산을 품에 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씨 씨발!”
“고생했습니다·”
“지랄···· 크흐!”
“덕분에 당 대협 등이 무사히 빠져나갔습니다·”
“흐흐!”
명류산은 웃으려 했다· 하지만 얼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지막 한 올 남아 있던 진원지기마저 모두 불태웠다· 대라신선이 와도 그를 살려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진무원도 그 사실을 한눈에 알아봤다·
가까스로 묵혼대를 떼어내고 이곳까지 왔지만 늦은 것 같았다·
명류산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사··· 부가 나도··· 당문의 제····”
“당신은 당문의 제자 맞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북천문에도 모시고 싶군요·”
진무원 일개인이 아닌 북천문의 문주로서 하는 말이다· 명류산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어렸다·
“그··· 치?”
그렇게 명류산은 만족해했다· 그것이 명류산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지은 웃음이었다·
진무원은 잠시 말을 잃은 채 명류산을 내려다보았다· 웃고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다시 깨어나 자신에게 투덜거릴 것만 같았다·
“류산·”
문득 당기문이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서 명류산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류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디 무사히 와야 한다· 아직 네놈에게 먹일 독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 ☆ ☆
서문혜령은 망연한 표정으로 눈앞의 참상을 바라보았다·
시산혈해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묵혼대의 시신이 산을 이루고 그들이 흘린 피가 강을 이룬 것이다·
진무원의 무위는 그녀의 상상 이상이었다· 묵혼대도 강했지만 그는 더 강했다· 특히 마지막에 그가 펼친 초식은 그녀의 상식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렸다·
검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스무 명이 넘는 묵혼대의 몸이 두 동강이 나서 절명했다· 그것이 멸천마영검의 제삼초식인 단천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그 위력만큼은 그녀의 뇌리에 두려움으로 각인되었다·
결국 진무원은 묵혼대를 뿌리치고 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살아남은 묵혼대가 그 뒤를 따라갔지만 그녀는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진무원의 무력은 충격적이었다·
“진무원····”
“그래도 그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네·”
똑같이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건만 관대승은 그녀보다 담담했다· 서문혜령이 관대승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운중천의 천라지망은 생각보다 질기고 촘촘하다네·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기괴한 자가 그를 쫓고 있지· 그는 결코 호북성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네·”
“기괴한 자?”
“그런 자가 있네· 우리가 할 일은 이대로 그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그의 마지막을 감상하는 것이지·”
관대승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확언에 서문혜령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정말 그럴까? 정말····’
진무원은 이제까지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한 일을 이뤄온 남자다· 그와 대립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담수천이라는 위대한 남자가 없었다면 어쩌면 그녀는 진무원을 선택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를 가장 과소평가한 사람은 나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녀의 시선이 관대승을 향했다·
이제까지 단순히 운중천의 총관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세상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엿본 관대승의 실체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조부 서문화는 관대승을 조심하라고 했다· 그녀는 조부가 그렇듯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것을 처음 봤다· 서문화의 경계를 받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관대승은 위협적인 존재가 분명했다·
관대승은 진무원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모습은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서문혜령과 채화영이 그런 관대승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지금의 감정이야 어떻든 간에 진무원의 최후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두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기나긴 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