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 2장 바람이 구름을 부른다 (2)
운중천 내부에는 수십 개의 대소 전각을 비롯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의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얼핏 보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매우 엄격한 규칙에 의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전각도 다수 있었고 그런 전각들은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엄금됐다· 높은 담장으로 구별되는 각 구역은 엄격한 신분 인증 절차를 밟지 않으면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연각(大淵閣) 역시 그런 전각 중 하나였다·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벽면의 장식이 일품인 대연각의 출입구에는 항시 서너 명의 무사가 번을 서고 있었고 전각 내부 곳곳에도 경계의 눈길이 존재했다·
그곳에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평범한 체구에 날렵한 몸매를 가진 남자였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두 눈에서는 정광이 흐르고 있고 꽉 쥔 주먹은 마치 나무의 옹이처럼 툭 불거져 나와 경지가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남자가 경계를 서고 있는 무인에게 물었다·
“백부님은 도착하셨는가?”
“지금 안에 계십니다·”
“내가 왔다고 알리거라·”
“예!”
경계를 서고 있던 무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젊은 남자의 이름은 조운경·
권마 조천우의 장남이자 패권회의 후계자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안에서 곧 들이라는 연락이 왔고 조운경은 대연각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들어선 곳은 대연각 내부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심처였다·
심처에는 그 흔한 장식이나 어떤 가구도 없이 벽면에 십여 자루의 검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벽에 걸린 검은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커다란 장검과 패검 두껍기 이를 데 없는 중검 화려하게 장식된 보검까지 마치 중원의 모든 명검이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명검으로 장식된 방 한가운데 한 남자가 앉아 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푸른 비단 옷을 입은 채 영웅건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사십 대 후반의 남자·
마치 쇠꼬챙이처럼 삐쩍 마른데다 체구도 작아 볼품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신광이 번뜩이고 있었고 몸에서는 사위를 압도하는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잘 벼려진 한 자루의 명검을 연상시키는 남자·
조운경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백부님·”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들어 조운경을 바라봤다·
“운경이구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부님·”
조운경의 목소리는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백부라고 부르는 남자는 천하에서 가장 검을 잘 쓰는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소수귀검(素手鬼劍) 연천화·
그의 아비 조천우와 같은 북천사주의 일원이고 중검보의 보주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백부님의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연천화의 목소리는 외모만큼이나 차가웠다· 말 한마디에도 날카로운 예기가 흐르고 있었다·
“척마대를 뽑는 행사 때문에 먼저 운중천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래 네 아비는 잘 지내느냐? 네 아비를 못 본 지도 꽤 오래되었구나·”
“그게····”
“무슨 일이 있느냐?”
조운경이 머뭇거리자 연천화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기세가 일어나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말하거라· 무슨 일이냐?”
“그게 얼마 전부터 아버님과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천우의 연락이 끊겼다?”
“예! 정예들을 데리고 패권회를 나간 후 홀연히 종적을 감추셨습니다·”
“으음!”
연천화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단순히 외유를 나간 것이 아니더냐? 북천문에 있을 때도 천우는 그렇게 가끔씩 사라지곤 했다·”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이번에는 그 기간이 조금 깁니다· 아버님은 외유를 나가실 때도 결코 사흘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락이 되지 않는 게 한 달이 넘어갑니다·”
조운경의 대답에 연천화의 표정이 처음으로 심각해졌다·
누가 뭐래도 조천우는 그와 같은 반열에 있는 극강의 무인이다· 그리고 패권회라는 거대 문파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하루라도 소홀히 하면 엉망이 되는 것이 문파였다· 그런데 거의 한 달 동안 연락도 없이 부재중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조천우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연천화였다· 그가 아는 조천우는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패권회는 지금 어찌 운영하고 있느냐?”
“일단 장로님들이 힘을 합쳐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아버님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내분이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음!”
연천화의 입술을 비집고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사적으로는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지만 크게 본다면 북천사주라는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였다· 때문에 연천화는 북천사주라는 한 울타리 안에 묶여 있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조천우의 실종은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자세히 말해보거라·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잘 벼려진 명검이 검집을 빠져나오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실내에 감돌았다· 그 속에서 조운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무원은 밤이 깊어서야 장원으로 돌아왔다·
장원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에는 복잡 미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좌문호를 비롯한 후기지수들과의 싸움은 머리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황학루에서 만난 괴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누굴까?’
노인의 눈빛 왠지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지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진무원이 복잡한 상념 속에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으하하! 드디어 나도 내공을 쓸 수 있게 됐다!”
갑자기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무원은 고개를 저었다·
단지 웃음소리만 들어도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명류산·’
그의 예상처럼 경박한 웃음소리의 주인은 바로 명류산이었다· 진무원이 명류산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연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의 의자에는 당기문과 하진월이 앉아 있고 그 한가운데서 명류산이 예의 경박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진월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저놈이 기어이 미쳤구나·”
“미칠 만도 하지· 불과 며칠 만에 내기를 외부로 방출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당기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명류산의 앞에는 조그만 바위가 두 쪽이 나 있는데 방금 전 명류산이 내기를 발출한 결과물이다·
명류산이 독기를 받아들이는 속도는 그야말로 가공할 정도였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아직은 임독이맥이 막혀 있어 내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지만 지금 정도의 진전이라면 머지않아 뚫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만큼 당기문이 명류산에게 들인 노력과 공은 대단했다· 그는 아예 명류산을 끼고 독을 조절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명류산의 내공은 급속히 증가했다·
하지만 내공이 빠르게 늘어나는 만큼 명류산의 간덩이도 급속히 커졌다· 처음엔 하진월이나 당기문의 눈치를 살살 보던 그가 이제는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 명류산의 모습이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억눌린 것이 얼마나 많아서 그런가 싶어 안쓰럽기도 했다·
그때 진무원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오 왔느냐?”
두 사람이 진무원을 반갑게 맞이했다· 진무원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명류산이 진무원을 삐딱하게 바라봤다·
“왔냐?”
명류산의 자못 도발적인 언사에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명류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무원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흐! 드디어 이 몸이 내기를 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요?”
“조금만 기다리라 이 말씀이야· 이 몸이 금방 따라잡을 테니까· 우하하!”
그의 경박한 웃음에 진무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당기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당기문이 어깨를 으쓱했다·
“독기 때문에 뇌가 상한 모양이다· 그냥 미친놈의 발악이려니 생각하거라·”
내기를 외부로 방출하는 데 성공한 명류산의 자신감은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내력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네놈에 비할 수 없겠지· 하나 금세 따라잡을 것이다· 충분히 가능해· 이런 속도라면·’
명류산은 진무원을 향해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우하하!”
명류산은 광소를 터뜨리며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하진월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야 원 어린아이에게 큰 칼을 쥐어준 격이구나· 형님 계속 녀석에게 독을 복용시킬 생각입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일단 독을 복용한 이상 절대 멈출 수 없다네·”
“에휴!”
하진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거 아닌데도 신경이 쓰이는 존재가 있었다· 하진월에겐 명류산이 그랬다·
당기문이 화제를 바꿨다·
“그래 나간 일은 잘됐느냐?”
진무원은 그들에게 황학루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당기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고수가 있었단 말이냐?”
절대의 고수라면 강호의 정국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엄청난 존재이다· 그런 고수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았다·
하진월이 진무원을 바라봤다·
“그건 겨우 시작에 불과할 게다· 앞으로도 어떤 고수가 얼마나 더 이곳에 들어올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척마대를 뽑는 행사를 통해 강호의 다양한 욕망이 표출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의 눈가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운중천이 척마대를 뽑는 행사는 마치 무한의 위를 가진 아귀(餓鬼)처럼 강호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강호의 수많은 문파와 무인들이 욕망에 눈이 멀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양한 욕망과 야망이 얽히고설켜 새로운 은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무한과 운중천은 이미 전장이라 할 수 있었다·
‘역시 서문화의 작품이련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는 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상황을 연출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지금부터는 약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네놈도 그 사실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기지수들과의 싸움은··· 매우 잘했다· 한번 우습게 보이기 시작하면 끝없이 양보해야 하고 속절없이 밀려나는 곳이 강호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손바닥만큼의 설 자리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 누구도 너를 우습게 보게 하지 말거라·”
“알고 있습니다·”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의 대답에서 그가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 네놈뿐이다· 서문화와 운중천이 짜놓은 판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존재는·’
하진월이 진무원의 어깨에 손을 척하니 올렸다·
“어디 우리 거하게 똥물 한번 뿌려볼까?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