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 1장 호랑이 굴에 발을 딛다 (1)
천라지망(天羅之網)·
하늘을 뒤덮은 그물은 엉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없이 촘촘하다·
인연과 악연이 하늘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니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되어 있다·
설령 그것이 악연일지라도·
“아!”
황철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객잔과 기루가 잔뜩 몰려 있는 복주가 그리고 그 끝자락에 큰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백룡상단·
“드디어 돌아왔구나·”
중얼거리는 윤자명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살아남은 백룡상단의 무인들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 일그러졌다·
그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미리 들은 것인지 백룡상단의 정문에는 노태태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애야!”
윤자명과 윤서인을 발견한 노태태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코끝이 찡해오는 광경에 철기당의 무인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얼굴엔 피곤한 빛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으로 오기 위해 서장과 청해성을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거리는 물경 수천 리가 넘었고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무사히 윤자명 등을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임무를 완수했기에 그들은 웃을 수 있었다·
한동안 아들과 해후를 즐기던 노태태가 황철에게 다가왔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황 보표· 제 아들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노마님·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분들이 고생하셨지요·”
황철이 머리를 긁적이며 철기당 무인들을 가리켰다· 그 순박한 모습에 노태태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황철의 곁에 조용히 서 있는 곽문정을 향했다·
‘변했구나·’
백룡상단에 있을 때는 여느 소년과 똑같이 들뜬 눈에 동경의 빛을 가득 담고 있던 아이다· 그런데 지금 곽문정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으며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결의가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었다·
‘이 역시 그 때문인가?’
노태태는 윤서인을 구하러 간 백룡상단의 행보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문은 온통 진무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행보는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공동파의 장문제자인 무진과 싸워 이긴 것도 모자라 옥계에서는 패권회와 밀야라는 거대한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그래서 붙은 별호가 북검이다·
도저히 강호의 신진무인이라고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별호였다· 창천고성이라는 별호로 강호를 위진시킨 담수천 이후 이 정도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이는 진무원이 처음이었다·
노태태는 오히려 담수천보다 진무원을 더 높게 평가했다·
담수천이 단순히 백인비무행으로 명성을 쌓았다면 진무원은 생사가 오가는 치열한 전장에서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노태태는 곽문정이 진무원을 따라다니면서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곽문정과 같은 어린 소년들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한순간 폭발적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이번 경우에는 진무원이 그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노태태가 곽문정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용무성을 향했다·
“무사히 셋째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계약을 이행했을 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따로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를 하려면 진무원 그 녀석에게나 하십시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 일의 태반은 그가 해낸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용무성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공을 가로채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기에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용무성의 솔직한 대답에 노태태가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 역시 인걸은 인걸·’
노태태는 용무성을 인정했다·
“용 대협과 철기당이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셨으니 저희 백룡상단도 계약을 이행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곁에 있던 상인 한 명이 목함을 들고 다가왔다·
“강호에서 가장 신용 있는 대륙전장의 전표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그럴 것까지야· 저흰 백룡상단의 신용을 믿습니다·”
용무성이 목함을 받아 곁에 있는 종리무환에게 넘겨줬다·
목함 안에는 일반인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거액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용무성과 철기당의 꿈을 이를 수 있는 충분한 액수였다·
노태태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여러분을 위해 잔칫상을 준비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떠나겠습니다·”
“예? 하지만····”
“마음은 감사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운중천에 가봐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용무성의 예상치 못한 거절에 노태태는 일순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본래의 표정을 회복하며 포권을 취했다·
“정히 그렇다면 잡지 않겠습니다· 부디 장도를 무사히 마치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태태· 그리고····”
용무성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본래는 황철에 대해 이야기해 주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윤자명이나 공진성 모두 황철의 무위를 눈으로 확인한 자들이다· 그가 나서지 않아도 그들이 노태태에게 황철의 무위를 말해줄 것이다·
백룡상단 입장에서는 든든한 절정고수 한 명을 얻는데다가 불같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진무원과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니 무조건 이득이었다·
노태태가 용무성이 하려는 말을 짐작한 듯이 웃었다·
“황 보표는 저희 백룡상단의 소중한 식구랍니다· 머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용무성보다 훨씬 먼저 황철과 곽문정을 알아온 노태태이다· 굳이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다·
용무성이 포권을 취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몸 보중하십시오·”
“무운을 빌겠습니다 용 대협 그리고 철기당의 여러분·”
황철과 곽문정은 말없이 용무성과 철기당이 먼 길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곽문정이 조그만 주먹을 꽉 쥐었다·
황철이 그런 곽문정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시간이 없다· 우리는 연무장으로 가자꾸나·”
“예!”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수련을 했다· 하지만 시간은 늘 부족했다·
곽문정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형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강해져서 찾아갈 테니까·”
반드시 강해져야 할 이유가 있었다· 잠시의 시간도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그는 황철을 따라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북성 무한은 근래 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었다·
수많은 무인이 운중천으로 입성하기 위해 들어왔고 또 무인들을 보기 위해 중원 각지에서 상인들과 구경꾼들이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다·
객잔과 주점은 몰려드는 손님들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청루와 홍루 같은 유흥업소들 역시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방은 진작 동이 났고 거리의 상인들은 연일 최고의 매출을 올렸다·
그 때문에 뒤늦게 무한에 들어온 무인들이나 사람들은 머물 방을 잡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들은 웃돈이라도 주고 방을 구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진무원 일행은 수월하게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강호의 명문들은 운중천과 가까운 곳에 따로 거처를 두고 있었다· 당문도 다른 문파들과 마찬가지로 무한에 따로 관리하는 거처가 있었다·
무한 외곽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조그만 장원이 있었다· 그 흔한 현판 하나 걸리지 않은 장원이 바로 당문 사람들이 간혹 운중천에 올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당기문 덕분에 진무원 일행은 당문의 장원에 머물 수 있었다· 장원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 만큼 규모는 작았지만 대신 안락한 구조와 높다란 담 덕분에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저녁 무렵 진무원은 홀로 장원을 나와 무한 거리를 거닐었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지만 누구도 진무원을 알아보지 못했다·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얼굴을 아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역동적이면서도 흥청망청하는 분위기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런 거리 곳곳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흑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제법 큰 기루였다· 창가에는 곱게 차려입은 기녀들이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고 안에서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이 보는 것은 기녀들이 아니라 창가 밑에 걸려 있는 조그만 검은 깃발이었다·
모르고 봤다면 그냥 천 쪼가리가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흑월의 표식이 분명했다·
진무원은 망설이지 않고 기루로 들어갔다· 그러자 기녀들이 간드러진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호호! 어서 오세요 잘생긴 공자님·”
“어머나! 이렇게 헌칠한 공자님이 찾아오다니· 오늘 저희가 운이 좋네요·”
기녀들의 호들갑에도 진무원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기녀들이 더 안달 나 그의 곁을 맴돌았다·
“혹시 찾는 아이라도 있으세요? 아니면 제가 모실까요?”
“술 마시러 온 게 아닙니다·”
“호호! 그럼 기루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 무얼 먹나요?”
“난 흑월을 찾아왔습니다·”
순간 장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기녀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공자님은 누구신가요?”
단순한 기녀의 눈빛이 아니었다· 내가고수만이 가질 수 있는 맑은 안광이 진무원의 눈을 자극했다·
“내 이름은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북검?”
진무원의 대답에 차갑기만 하던 기녀의 표정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북검 진무원 소협이 맞나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따라오세요·”
기녀가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진무원을 흘끔 바라보았다·
진무원의 짐작처럼 이곳은 흑월의 무한지부였다· 일파의 종주나 장로급이 아니라면 절대 이용할 수 없는 곳이 바로 흑월이다· 자격 조건이 엄격한 만큼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이나 보증하는 사람 없인 이곳에 출입할 수 없었다·
절차대로 하면 진무원도 스스로의 신분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 월주의 이름으로 된 명령서가 하달됐다· 그곳엔 북검 진무원에게 협조를 아끼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진무원 본인이 찾아왔을 시 즉시 지부장에게 안내하라고 쓰여 있었다·
흑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말 그가 북검 본인이 맞을까?’
기녀 역시 흑월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진무원이라는 무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사실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다·
기녀를 따라가던 진무원의 입가에 고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복도 끝에 도달한 그녀가 벽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짧게 두 번 길게 두 번을 두들기자 갑자기 벽 한쪽이 통째로 열리며 비밀의 공간이 드러났다·
익숙한 광경이기에 진무원은 놀라지 않고 기녀를 따라 벽 뒤쪽의 비밀 공간으로 들어갔다· 이곳이야말로 흑월 무한지부의 진정한 근거지였다· 기녀는 진무원을 데리고 한참 동안이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두꺼운 철문이 나타났다·
기녀가 문을 두드리자 조그만 창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눈이 보였다· 기녀가 그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를 끝낸 기녀가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먼저 온 손님이 있다네요·”
“음!”
진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기녀가 그런 진무원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소문 속의 진무원은 매우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막상 직접 본 진무원의 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남자답게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절세의 미남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남자가 초절정에 이른 검객이란 말이지?’
문득 소문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철문이 둔중한 소리와 함께 열리고 먼저 들어와 있던 선객이 밖으로 나왔다·
마치 누더기 같은 커다란 천을 두른 육십 대 후반의 노인이었다· 봉두난발은 얼마나 오래 감지 않았는지 떡이 져 있고 커다란 천 사이로 보이는 옷은 꿰매고 기운 자국이 가득했다·
노인의 허리는 잔뜩 굽어 있어 마치 꼽추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커다란 지팡이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순간 진무원이 눈을 떠 노인을 바라보았다·
“클클! 그놈 참 실하게 생겼다·”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무원은 멀어지는 노인의 뒷모습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기녀가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진 소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