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7장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2)
“커헉!”
선혈을 흩뿌리며 용무성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그런 그의 가슴 섶은 입에서 흘린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몸은 푸들푸들 떨리고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용린도를 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용린도를 꼬나 쥔 용무성의 눈은 신체에 가해진 막대한 압력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조천우가 펼치는 권에는 엄청난 패력이 담겨 있었다·
이미 그는 완성된 무인 굳이 절초를 펼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사소한 동작 하나까지도 훌륭한 초식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내지르는 일권에 용린마형도의 절초가 분쇄되었고 그의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미증유의 거력에 용무성은 전신이 짓이겨지는 듯한 압력을 받았다·
그가 어떤 절초를 펼치더라도 조천우는 어렵지 않게 해소하며 공격을 해왔다· 조천우의 공격에 용무성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크윽!”
용무성이 소매로 입가에 흘러내리는 선혈을 닦아냈다·
‘역시 천하를 노리는 패웅이란 말인가?’
상대는 흔히 절대고수라고 불리는 자다· 그런 자를 상대로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용무성도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었다·
‘아직도 멀었는가?’
그가 곁눈질로 철기당의 무인들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철기당의 무인들과 보표들은 둥글게 뭉쳐 원진을 이루고 있었고 그 외곽을 패권회의 무인들이 완전히 둘러싼 채 공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 모습이었다·
그 순간 조천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호! 나를 앞에 두고 다른 곳을 볼 여유가 있다니 대단하군·”
조천우의 비아냥거림에 용무성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정도로는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이겠소· 늙으니 기력도 떨어진 모양이오· 그게 최선이오?”
“흥! 도발이라···· 어쭙잖군·”
그러나 말과 달리 조천우의 눈에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용무성은 자신의 도발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조천우의 몸 주위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츠츠츠!
조천우의 몸에서 흘러나온 묵빛의 기류는 마치 소용돌이처럼 그의 주위를 휘돌았다· 그의 기류에 휘말린 돌멩이와 나뭇잎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패천신권(覇天神拳)·
북천문의 역사상 가장 강한 권공으로 평가받는 무공이다· 원래는 오직 문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지만 십여 년 전 진관호의 죽음과 함께 북천문이 몰락할 때 조천우가 몰래 들고 나왔다·
조천우는 늘 진관호의 강함을 동경했다· 그는 패천신권을 익히면 자신 역시 그렇게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십 년 동안 그는 오직 패천신권 하나만을 파고들었고 결국 원하는 성취를 얻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수준이라면 석년의 진관호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제기랄! 역린을 건드렸나 보군·’
용무성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도발이 과한 것 같았다· 용무성은 극도의 위기감을 느꼈다·
용무성은 자신의 남은 공력을 모조리 용린도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용린도가 거친 용음(龍音)을 토해냈다·
“제길!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어디 끝까지 가보자·”
그의 용린도에 선명한 도강이 맺혔다·
☆ ☆ ☆
푹!
곽문정이 마지막 깃발을 꽂았다·
“하아 하아!”
그제야 곽문정의 입술을 비집고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거세게 뛰어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지만 한가히 쉴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룡상단의 보표들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가 지체하는 만큼 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터였다·
그가 원진의 중앙에 있는 하진월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하진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툭!
그가 근처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원진의 중앙에 집어 던졌다· 그러자 원진 주위로 반투명한 기류가 휘돌기 시작했다·
“뭐 뭐냐?”
“크윽! 진법이다!”
패권회의 무인들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갑자기 눈앞에 뿌예지더니 순식간에 암흑의 세상이 찾아왔다· 바로 곁에 있던 동료들의 얼굴도 구별할 수 없을 만큼의 암흑이 그들을 눈뜬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환령암흑진(幻靈暗黑陣)· 사도의 진법이긴 하지만 그 방호력만큼은 천하의 그 어떤 진법에도 결코 뒤지지 않지·”
하진월이 당황한 패권회의 무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환령암흑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적의 시야를 빼앗아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것이었다· 조천우 정도의 절대고수에겐 크게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일반적인 고수들은 그 정도만으로도 큰 불편함을 느껴 움직임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것까지 더하면····”
하진월이 당기문에게 받은 자기병을 꺼냈다·
철기당의 무인들이 그런 하진월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전멸할 수밖에 없던 상황을 반전시킨 것도 모자라 이젠 정체불명의 진법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하진월의 모습이 그들에겐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중에서 종리무환의 놀라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도 환령암흑진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환령암흑진은 결코 이렇게 쉽게 펼칠 수 있는 진법이 아니었다·
완벽한 지형지물과 시간 수많은 기물과 인력이 필요한 고난이도의 공부였다· 저렇게 깃발 몇 개로 쉽게 펼칠 수 있는 진법이 아닌 것이다· 종리무환도 환령암흑진을 펼치려면 최소 사흘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정도이다·
‘저 남자의 능력은 도대체····’
종리무환은 전신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진무원과는 다른 종류의 충격이었다· 충격의 강도는 하진월이 훨씬 엄청났다· 진무원은 무공을 익힌 무인이고 자신과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은 무공보다는 지략에 더 자신 있는 책사였으니까·
그러나 하진월은 다르다· 자신처럼 무공보다는 지략을 주로 사용하는 책사였다· 그가 하진월에게 느끼는 한계의 벽은 진무원보다 거대하면서 더욱 절망적이었다·
하진월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병의 산공독을 환령암흑진의 외곽을 향해 흘려보냈다·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간 산공독이 환령암흑진의 기류를 타고 휘돌기 시작했다·
“크윽!”
“고 공력이 모이지 않는다·”
환령암흑진 근처에 있던 패권회의 무인들이 경호성과 함께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반응이 늦은 몇몇 무인은 산공독에 중독되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진월이 수레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젠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을 뿐·”
시간이 흐르면 환령암흑진을 휘돌던 산공독도 바람에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전까진 적들에게 충분한 위협이 될 것이다·
실제로 패권회의 무인들은 산공독이 무서워서 환령암흑진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을 노려 곽문정이 환령암흑진을 향해 뛰어들었다·
하진월은 생문을 열어 그런 곽문정을 맞아들였다·
“하아 하아!”
곽문정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환령암흑진으로 뛰어드는 그 짧은 순간 그 역시 산공독에 중독되어 공력이 흩어지고 있었다·
당기문이 그런 곽문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다· 너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살았구나·”
“공력이 모이지 않아요·”
“산공독에 중독되어 그렇다· 두 시진만 지나면 자연히 없어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
곽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바닥에 몸을 누였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극도의 긴장과 부상으로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기절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곽문정은 용무성과 조천우의 싸움을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봤다·
쾅! 쾅!
두 사람 사이에서는 뇌성벽력이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용무성의 용린도는 가공할 도강을 쉴 새 없이 흩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공격은 조천우가 발산하는 묵빛 권강에 막혀 아침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용무성이 불리한 싸움이었다·
용무성은 그야말로 한계까지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당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주를 구해야 해·”
그 모습에 환령암흑진 안에 있던 철기당의 무인들이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하진월이 그들을 막아섰다·
“소용없소·”
“비키십시오· 우리를 막아서면 당신이라도 베어버릴 겁니다·”
공손창이 분노 어린 시선으로 하진월을 노려봤다· 그는 여차하면 하진월을 베어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하진월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합류한다고 해서 전황이 변하지는 않소·”
“그래도 가야 합니다· 당주를 이대로 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철기당 무인들의 완강한 태도에 하진월이 종리무환을 바라봤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오?”
종리무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감성은 용무성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나가봐야 개죽음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진을 열고 나가봐야 곽문정의 모습에서 보듯 산공독에 중독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도움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적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우리는··· 나가지 않습니다·”
“부당주?”
“무환!”
공손창과 임진엽 등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에 종리무환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하 대협 말대로입니다· 지금 진을 열고 나가봐야 개죽음만 당할 뿐입니다·”
“크윽!”
종리무환의 결정에 철기당 무인들이 분루를 흘렸다· 그들도 종리무환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채약란이 종리무환의 어깨를 잡았다·
“무환·”
“누님·”
“당주는 괜찮을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 용무성을 가장 걱정하는 이가 있다면 바로 부당주인 채약란일 것이다·
하진월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결속력이 굉장히 강하군· 용무성이라는 남자 생각보다 조직을 잘 정비했어·’
이런 유대감은 단순히 오래 생활한다고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장의 강력한 존재감과 세심한 배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수하들의 믿음이 조화를 이뤄야만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수장의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용무성은 꽤나 훌륭한 수장이었다· 최소한 자신의 수하들에게는 절대적인 믿음과 지지를 받고 있으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전신이 해체될 것처럼 힘이 없었다· 이젠 용린도를 들 기력마저 없었다· 단전은 텅텅 비어 내공 한 줌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왼쪽 쇄골이 부러져 어깨가 힘없이 덜렁거리고 있고 갈빗대가 족히 서너 대는 나갔는지 숨 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머릿속이 어지러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용무성은 용린도를 놓지 않았다· 자신이 조천우의 발목을 붙잡아놓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철기당의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씨발! 이젠 진짜 눕고 싶네· 아직도 안 오는 거냐 아니면 못 오는 거냐?’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면서 용무성은 진무원을 떠올렸다· 그런 용무성을 향해 조천우가 다가왔다·
“너는 나를 감탄하게 만든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아깝구나· 나의 편에 섰다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함께 누릴 수 있었을 텐데·”
“퉤!”
용무성은 대답 대신 조천우를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하지만 그의 침은 조천우 앞에서 무형의 막에 막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투지는 높이 사지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투지는 만용에 불과하지·”
조천우는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번 일격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는 것이다·
용무성이 눈을 감았다·
‘제길! 결국 내 길은 여기까지인가?’
따앙!
그 순간 청명한 쇳소리가 용무성의 귀에 울려 퍼졌다· 용무성이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조천우가 근처의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나를 부르는 것인가? 이 조천우를··· 건방진!”
용무성에게는 미약하게 들렸지만 조천우에겐 바로 귀 옆에서 쇠종을 울리는 듯 크게 들렸다· 그 때문에 순간적으로 조천우는 심령이 흔들리고 말았다·
조천우는 감히 자신을 겨냥해 음파를 집중한 미지의 존재에게 큰 분노를 느끼고 몸을 날렸다·
조천우가 사라지자 용무성의 몸이 더 이상 견디질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누군가 용무성의 몸을 안아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용무성을 바라보는 자는 황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