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그가 만든 세상 (2)
우시프 가람 스파니아·
세 나라가 국경이 맞닿은 곳이자 로열 아카데미가 위치한 다국적 도시 루웬·
오늘은 우시프 제국의 주최로 열린 삼국의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새하얀 원형 테이블 의자엔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세 명의 정상들이
그 주위엔 그 정상들을 보필하기 위한 수행원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었다·
아린은 우시프 제국의 대표로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대륙은 지금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다크 엘프의 침공은 제국의 힘만으론 감당할 수 없으며 두 왕국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녀의 제안은 다크 엘프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연합군 창설·
다크 엘프의 움직임이 아직은 우시프 제국 북부 지역에만 한정되어있는 상황·
허나 만약 제국이 이를 막지 못해 대륙 내부까지 침략을 허용하게 되면 이는 인계 전체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 대륙은 우리 인간의 땅이자 우리 인간들이 지켜야 할 땅입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린의 말이 끝나자 회담장 내엔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1분 정도가 지난 후 가람 왕국의 왕 레오노르 2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답을 하기에 앞서 한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아린 황녀님·”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하신 이 제안은 우시프 제국 황제의 뜻입니까? 아님 황녀님 개인의 뜻입니까?”
그의 물음에는 다소 회의적인 느낌이 스며들어있었다·
“아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아린 황녀님이 제국의 대표라는 점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황녀님의 뜻이 곧 황제의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오노르 국왕·”
“하지만 연합군을 창설하자는 뜻은 황제로서 옳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냥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시안 베르트 그 남자만 넘기면 되는 것 아닙니까?”
회담장 내 모든 참석인의 눈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시안 베르트는 제국과 세상을 구한····”
“제국과 세상을 구했다고 해서 그가 지은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린은 바로 답을 잇지 못했다·
“이미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시안 베르트는 미스트라고 하는 비밀 집단에 속한 채 대륙 곳곳에서 암살 행위를 저질러 왔습니다· 제국만이 아니라 우리 왕실과 마법학회에서도 추적하고 있던 범죄자란 말입니다·”
실제로 지난 7년 동안 세 나라에서 발생한 미스트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살인 사건은 무려 100여 건에 달했다·
“게다가 그 새로 나타났다는 성검의 주인이 원하는 게 정말 시안 베르트 하나뿐이라면 우린 사실상 지금 회담 같은 걸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암살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몇 명이 될지도 모르는 우리 인간이 희생해야 한다니요? 우리 가람 왕국의 백성들이 그걸 용납할 것 같습니까?”
가람 왕국의 수행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로선 아직 정체도 제대로 모를 다크 엘프들과 싸우겠답시고 병력을 모으는 것보단 시안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인 길이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에 스파니아의 왕국 자네트 쟈하르칸이 손을 들며 나섰다·
“다크 엘프도 그렇고 새로 나타났다는 성검의 주인도 그렇고 우린 아직 그들의 모습을 전혀 못 본 상태지 않습니까?”
스파니아의 왕국의 수행원들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섣불리 병력을 모은다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 맞습니다· 문제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란 겁니다· 그 시안 베르트를 넘겼다고 해서 다크 엘프의 침공이 멈춘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이 역시 맞는 말이었다·
“아나스타샤 스펜시아라고 했나요? 그녀가 약속을 잘 지키는 인간일지 아닐지는 저흰 모릅니다·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 상황에 시안 베르트만 넘기면 될 일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할 순 없지요·”
자네트 국왕의 말이 이어질수록 레오노르 국왕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최소한의 대처를 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스파니아 왕국은 여기서 바로 뜻을 밝히죠· 아린 황녀님이 제안하신 연합군 창설에 동조하겠습니다·”
“···!”
“세벨러스 황실가의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네트 국왕·”
레오노르 국왕은 인상을 구긴 반면 아린은 차분한 얼굴로 화답했다·
그렇게 종료된 1차 회담·
가람 왕국으로부턴 끝내 확답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훨씬 더 부정적인 상황을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스파니아 왕국의 지원이라는 큰 성과를 이뤄냈으니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낸 셈이었다·
회담을 끝낸 아린은 바로 황성으로 귀환길에 올랐다·
“가람 왕국의 지원까지 이끌어내는 건 무리였을까요?”
“루나브도 쉽지 않을 거라고 말은 했었어· 아마 레오노르 국왕의 의견보단 리겐스 마법학회장의 의견이 반영된 거겠지·”
아린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건 방금 쥬른에서 온 소식입니다만····”
쥬른이라는 말에 아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시안 님께서 눈을 뜨셨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이야!”
어찌나 크게 소리쳤는지 말도 화들짝 놀라 앞발을 들어 올렸다·
겨우내 진정시킨 뒤 이야기를 들으려 했지만
“예· 눈을 뜨시긴 했는데····”
그리 기뻐할 상황이 아니란 것을 레시무스는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 * *
“도 도련님? 깨어나신 거 맞죠?”
“숨도 쉬시고 분명 의식도 있는 상태인 것 같긴 한데····”
“파파! 일어났어? 나나 보여?”
반쯤 떠진 눈꺼풀 앞으로 이리저리 손을 흔드는 나나·
허나 시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눈은 뜨고 있는데 의식은 없는 상태라니· 이런 걸 무슨 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굳이 정의하자면 코마(Coma) 상태라고 해야겠죠·”
루나브는 핏기없는 시안의 눈을 안쓰럽게 보며 말했다·
“선배의 정신은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망가져 있는 것 같아요·”
시안의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힘을 쓴지도 어느새 일주일째
스스로 숨도 쉬고 눈도 뜨는 등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좀처럼 완전히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영영 안 깨어나는 건 아니겠죠?”
“그러지 않기 위해 저희가 더 노력해야죠·”
루나브는 애써 사람들을 위로하다가도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쥬른의 북쪽 성벽 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다크 엘프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기사들이 철통 경계를 서고 있었다·
성벽을 조용히 걷던 루나브는 이내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발을 멈췄다·
“얼마나 될 것 같으세요?”
“뭘?”
“선배가 깨어날 가능성 말이에요·”
“우리 숙녀님께서 이미 다 계산하신 거 아니었어?”
레미하람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 있냐는 듯 짤막한 웃음을 흘렸다·
“신의 보호란 것이 정확히 뭘 의미하나요?”
“글쎄? 나도 엄연히 신적 존재로 인지라 함부로 발설할 순 없어서 말이지·”
“선배가 그 비밀을 탐했다면서요? 누설된 비밀은 더 이상은 비밀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 없는데····”
레미하람은 어쩔까 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에라 모르겠다는 듯 눈을 딱 감으며 입을 열었다·
“고통이야·”
“고통이요?”
“그래· 그 비밀을 탐한 대상에게 있어 가장 괴롭고 고통적인 상황과 존재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면서 정신을 망가트리지·”
“빠져나올 방법은요?”
“직접 깨고 나오는 거 말곤 없어· 하지만 쉽진 않을 거야· 너희가 아무리 기억을 보내서 그의 정신을 유지한다고 해도 완전히 회복할 가능성은 아마····”
마서가 말한 확률은 루나브가 추산한 확률과 단 0·1%의 차이도 없이 정확했다·
“하····”
루나브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혹시라도 본인의 계산이 틀리길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그럴 가능성은 사실상 시안이 깨어날 확률보다 더 희박할 텐데·
이런 상황에서 철저한 계산을 해내는 자신이 새삼 질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레미하람은 제가 뭘 무서워한다고 생각하세요?”
“무서워하는 거? 숙녀님한테 그런 게 있었어?”
시안을 위해서라면 항상 서슴없이 목숨을 걸고 마왕과의 대면에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던 그녀지 않은가?
“없었죠· 적어도 지금까지는····”
루나브 역시 자신에게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근데 이젠 생겼어요·”
“뭔데?”
“선배 없는 세상이요·”
대답과 동시에 루나브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배를 만나기 전엔 정말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멸망하든 말든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눈물에 이어 흐느낌 또한 흘러나왔다·
“이젠 무서워요· 선배가 없고 나만 있어야 하는 세상이라니· 저 그런 세상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야 하죠?”
시안에 의해 만들어졌고
시안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던 지금까지의 시간·
이제 와서 시안이 없어진다고 하면 대체 무슨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곧 찾아올지 모를 그 엄청난 공허함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루나브는 정말로 두려웠다·
졸지에 난처해진 레미하람·
그녀를 어찌 위로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도
“이봐 숙녀님?”
“···말씀하세요·”
“이걸 위로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숙녀님께서 무섭다는 그 세상이 과연 지금 저 광경보다 무서울지 좀 묻고 싶은데?”
루나브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
슬픔에 젖어 들었던 눈은 순식간에 곤혹으로 변해버렸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 위 아린과 함께 아나스타샤와 접촉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다크 엘프?”
눈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다크 엘프 군단이 살기를 뿜어내며 쥬른을 마주하고 있었다·
* * *
“다크 엘프의 침공이다!”
다크 엘프의 엄청난 군세에 혼란에 빠진 쥬른·
예상을 훨씬 벗어난 압도적인 수에 기사들은 일제히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이 이게 말이 돼? 이 수를 막으라고?”
“이런 건 불가능이 하잖아····”
이건 필사의 의지로 싸운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후퇴··· 해야 하지 않아?”
후퇴·
사실상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는 기사들만의 생각이 아닌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피하세요!”
급히 시안이 있는 동굴로 돌아온 루나브는 모두를 보며 소리쳤다·
“이건 우리가 물리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에요! 빨리 선배를 데리고 대피해야 해요!”
잠시 어리둥절하던 모두는 황급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식을 알린 루나브는 또다시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깐만 후배님! 대피하자며! 넌 어디 가려고?”
“전 시간을 벌게요·”
“뭐?”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세트는 입에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정신이야 후배님? 혼자서 무슨 시간을 벌어?”
“물러날 땐 물러나더라도 저들의 기세를 잠시 꺾을 필요는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왜 혼자···!”
그녀를 말리려던 세트는 어차피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머리를 붙잡았다·
“좋아· 그럼 나도 남는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이럴 땐 그럴 필요 없다고 한 번이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이런 다급한 상황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급 밀려온 세트는 잠시 두 눈을 끔뻑였다·
“저도 남을게요·”
그런 와중에 한 명이 더 남겠다고 자청하는 이가 있었으니
“여러분을 두고 차마 가진 못하겠네요·”
바로 엘리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