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1화· 해방 (2)
청명하고 깨끗한 물줄기가 흐르는 물의 아공간·
한쪽엔 이 공간의 주인이자 푸른 물의 여신인 아쿠아니스가
다른 한쪽엔 여신의 계승자인 엘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두 여인은 한눈에 봐도 차이가 느껴질 만큼 서로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쿠아니스의 얼굴엔 불쾌 혹은 못마땅한 기색이 다분한 반면
엘리스의 얼굴엔 간절함과 절박함이 가득했다·
“우리를 닮은 피조물인 만큼 언제 어디서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른다더니만··· 아에르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후욱하고 내쉬어진 한숨엔 여러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좀 선을 넘는단 생각은 안 드나요 엘리스?”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엘리스는 거짓 없이 솔직하게 답했다·
“당신이 이 대륙에서 나와 가장 잘 맞는 인간이란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래서 당신에게 신의 계승자라는 길을 내줬죠·”
“그 점에 대해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한다는 사람이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해요? 당신의 개인적인 일을 위해 나보고 직접 나서 달라고요? 나를 루멘델이나 아에르 같은 얼간이 신으로 만들 생각인가요?”
여신이 소리치자 잔잔히 흐르던 물줄기가 갑자기 급류로 변하며 휘몰아쳤다·
“제 개인적인 일 때문이 아닙니다! 인계를 위해서에요! 아쿠아니스 님도 지금의 흐름이 잘못되었다는 걸 아시잖아요!”
엘리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할 말을 당당히 이어 나갔다·
급 밀려온 두통에 아쿠아니스는 머리를 부여잡았고 고조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엘리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우리 신은 그렇게 전능한 존재들이 아니에요· 내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계승자를 만든 것 같나요? 그냥 흥미를 쫓았을 뿐이에요· 개인적인 사리사욕 때문이었다고! 그러니까 제발 좀 선을 넘으려 들지 마세요! 날 끌어들일 생각 말고 그냥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아쿠아니스는 엘리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면서 대차게 선을 그었다·
“아쿠아니스님은··· 무얼 위해 사시나요?”
그런 그녀를 보며 엘리스는 물었다·
“내가 왜 물의 여신이겠어요? 물처럼 살고 있으니까 물의 여신인 거지·”
아쿠아니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물은 흐름을 거스르지 않아요· 어떤 방해나 장애물이 있더라도 고집 있게 한 방향을 고수하죠· 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어요· 변함없는 흐름·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그거 하나뿐입니다· 그것이 부정되지 않는 한 내가 나설 일은···!”
말을 잇던 아쿠아니스는 입이 돌연 멈춰버렸다·
엘리스가 아닌 허공을 넋 놓고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정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뻐해요 엘리스·”
“···!”
“그 흐름이 부정되는 순간이 오고 말았네요·”
* * *
최강자·
사전적 의미론 어떤 분야에서 힘에 절정에 오른 자를 뜻한다·
작으면 작고 넓다면 넓을 이 세계에서 최강자란 칭호를 가진 존재가 얼마나 있을까?
끽해봐야 마계의 주인인 마왕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신의 질서가 자리 잡은 이 인계에서 감히 최강자라고 불릴 수 있을 존재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딱 한 명 있었다·
구시대·
빛의 질서를 수호하며 인계의 구원자이자 최강자라고 불렸던 딱 한 명의 인간이·
아나스탸샤 스펜시아·
그녀가 지금 마리안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 어째서? 네가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난 거지?”
“이전에 루멘델 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만약 제가 없는 시대에 빛의 질서가 위협받는 순간이 도래한다면 그때 절 다시 부를 수도 있다고· 아마 그 상황이 온 게 아닌가 싶네요?”
그녀는 살아있단 기분을 다시 느끼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떤가요 마리안?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가요?”
마리안은 대답할 수 없어 그녀를 노려만 보았다·
“하기야 당신에게 물어봤자 제대로 된 말을 들을 수 있을진 않을 것 같네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은 절 저 차디찬 만년설 안에 봉인하셨던 장본인이시잖아요?”
“지금 다시 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지·”
마리안이 번쩍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나스탸샤의 발밑으로 푸른 마법진과 함께 엄청난 냉기가 치솟았다·
“아무리 프루이나의 수호자라고 하셔도 명색이 드래곤이란 분이 이리 예의가 없으셔서야····”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으로 마리안을 가리킨 뒤 까딱하고 움직였다·
-쿠릉
이에 마리안의 머리 위로 또 한 번 벼락이 내려쳤다·
마리안은 몸을 앞으로 내빼 무리 없이 피했지만
-턱!
“커헉!”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아나스타샤에게 목이 잡히고 말았다·
“전 지금 최대한 예의를 갖춰 당신을 상대하고 있는데 이리 무례하게 구시면 어떡해요? 당신을 죽이지 못해 간신히 참고 있는 제 마음이 안 느껴지시나요?”
실제로 그녀의 목을 잡은 아나스타샤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게 정녕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란 말인가?
당혹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리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아나스타샤 님!”
그때 아나스타샤의 앞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우리의 구원자시여!”
어느샌가 이곳으로 달려온 장로 엘퓨리스였다·
그는 경외심에 가득 찬 나머지 눈물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드디어 대화가 통할만 한 분이 오신 것 같네요·”
아나스타샤는 마리안의 목을 놔주었으며 그 길로 엘퓨리스에게 다가갔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나스타샤 님! 해드릴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 보이는 얼굴이네요·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 다 듣는 건 무리인 것 같으니····”
아나스타샤는 엘퓨리스의 머리 위로 살며시 손을 올렸다·
“이렇게 하죠·”
곧 손과 머리가 맞닿은 지점에서 밝은 빛이 일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빛을 통해 엘퓨리스의 기억과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전부 전해 받았다·
1분조차 되지 않은 매우 짧은 시간 속에서·
“재밌네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나스타샤는 하늘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빛의 질서를 위협하는 안개의 존재라···· 이 시대의 구원자는 그를 막는 데 실패하고 말았으니 기어이 제가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건가요? 정말 루멘델님께선 절 언제까지 부려 먹으실 생각인지····”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도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풀지 않았다·
그러곤 결의에 찬 눈빛으로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높이 치켜드니
-지이잉
흐린 구름 속에서 금빛 줄기가 번쩍이면서 그녀의 전신을 내리쬐었다·
빛에 잠식된 오른손엔 작은 광채가 생겨났으며 점차 검의 형태로 변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한 성검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 얼마 만에 접하는 그리운 감각인가요? 당신도 지금 저와 감정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그렇죠 듀란다르크?”
성검은 밝은 빛을 뿜으며 그녀의 물음에 화답했다·
“자 그럼 그 검은 안개의 존재를 만나러 가볼까요? 프루이나를 떠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으니 빨리 쫓아가면 잡을 수 있겠네요·”
아나스타샤는 성검을 허리춤에 고이 모셔 놓은 채 그 길로 몸을 움직였다·
“안 된다···!”
허나 그녀를 보낼 수 없던 마리안은 포효하며 다시 한번 성체로 변신했다·
-펄럭!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와 분노와 살기로 범벅된 눈동자·
마리안은 곧 그녀를 집어삼키기 위해 크게 입을 벌렸다·
“정말 끝까지 예의가 없네요· 당신은····”
-콰직!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네 개의 검이 마리안의 팔과 다리에 꽂혀버렸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마리안은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고 몸이 그대로 고꾸라져버렸다·
“마음 같아선 당신을 흔적도 없이 짓누르고 싶지만 그러면 물의 여신께서 분노하실 테니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마리안의 입에선 대답 대신 피가 뿜어져 나왔다·
뭔가 반격을 하고 싶어도 팔다리에 꽂힌 검이 그녀의 신기를 흡수하는 탓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마리안을 뒤로 한 채 안개의 존재를 생각하며 나아갔다·
“분명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왜 이렇게 익숙한 기분이 들까요? 당신은 그 이유를 아는지 모르겠네요· 시안 베르트····”
* * *
한편 마리안의 도움으로 공간에서 벗어난 하스티아·
그녀가 전이된 곳은 프루이나의 외곽 지역이었다·
“하스티아 님!”
곧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르니안 일행이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여러분들이 여긴 어떻게?’
“마리안 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하스티아 님을 안전한 곳으로 이끄···!”
하스티아가 무사한 것에 안도한 것 잠시
그녀와 함께 전이된 시안의 상태를 본 엘프들은 저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인간은 왜 이런 상태가···?”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한시라도 빨리 시안 님을 데리고 인간들의 나라로 가야 해요!’
“아 알겠습니다!”
전후 사정은 나중에 들을 일·
일단은 다 함께 프루이나를 벗어나려던 순간
-쿠구궁
갑자기 얼음 절벽 쪽에서 굉음과 함께 진동이 일었다·
“저 절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프루이나의 상징과도 같은 얼음 절벽이 무너지는 광경에 엘프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어서 산사태가 벌어지고 마리안이 나타나 그것을 막는 광경까지 그 과정을 전부 지켜봤다·
-지이잉
뒤이어 구름 속에서 커다란 빛줄기가 나타나 지상 아래로 드리워졌다·
그 위치는 다름 아닌 붕괴된 얼음 절벽의 잔해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저 빛은 설마?’
그 빛은 하스티아에게 있어서 너무나 익숙한 빛이었다·
‘성검의 빛?’
-기이잉
그때 갑자기 엘프들의 눈앞으로 푸른 빛의 게이트가 나타났다·
게이트 안에선 한 여인이 다급하게 뛰쳐나왔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엘프들의 저마다 눈이 부릅떠졌다·
“에 엘리스 님?”
“엘프 여러분?”
시안 이전에 화이트 엘프 일족이 유일하게 받아들였던 인간 엘리스였다·
엘리스 역시 오자마자 하스티아 일행을 본 것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시 시안?!”
엘리스의 눈은 곧 얼음에 갇힌 시안에게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동생의 상태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왜? 시안이 이런 상태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콰직
저 멀리 얼음 절벽에서 퍼진 심상치 않은 소리에 엘리스는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시안은 아직 무사한 거죠?”
하스티아는 엘리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눈 맞춤이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엘리스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윽고 뭔가를 다짐한 듯 그녀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시안을 부탁할게요 하스티아! 인계로 가서 도움을 요청해주세요!”
그러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프루이나 쪽으로 달려갔다·
이미 엘리스에겐 다년간 프루이나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던 만큼 이곳 지리에 대해선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마리안의 둥지가 있던 얼음 절벽 부근이었다·
허나 저 멀리서도 보이는 얼음 절벽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마리안 님은 무사하시겠지?”
그녀를 향한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두 발의 속도를 더 높이려는 순간
“어머? 여기 인간이 다 있네요?”
“···!”
갑자기 어디선가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스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바로 고개를 돌렸다·
화이트 엘프의 장로인 엘퓨리스
그리고 이름 모를 금발의 낯선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쿠아니스 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봐선 그분의 계승자인 것 같은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직 그녀의 정체가 뭔지 알 수 없지만 엘리스는 그녀로부터 이유 모를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다·
그 이유는 곧 그녀의 허리춤에 꽂힌 검을 보고선 알게 되었다·
“성검?”
분명 자신의 아공간에서 에쉘과 함께 갇혀 있어야 할 성검이 왜 저 여인에게 있단 말인가?
의문과 당혹감에 사로잡힌 엘리스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흠· 이상하네요? 왜 당신에게서 빛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죠?”
그런 엘리스를 향해 여인은 서서히 다가갔다·
이윽고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엘리스의 바로 앞에서 싸늘한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당신이 데리고 있군요? 이 시대의 구원자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