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해방 (1)
“····”
숨을 쉬지 않는 시안·
그래도 심장만큼은 멈추지 않고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시안님···’
하스티아의 눈엔 비탄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질질 짜지 마· 걔 아직 죽은 거 아니니까·]
‘하 하지만····’
하스티아는 가지고 있던 소울 스톤을 꺼내 보았다·
시안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소울 스톤의 안개는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처럼 매우 희미해진 상태였다·
‘이건 시안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잖아요? 어떡하죠?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소용없다 하스티아· 그 인간은 이제 깨어나지 못해·”
그런 하스티아를 보며 엘퓨리스가 다그쳤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요?’
“당연하지 않느냐? 그 인간은 네 열쇠의 힘을 이용해서 신의 비밀을 탐하려 했다· 그럼 자연스럽게 네 안에 깃든 신의 보호 역시 발동되었겠지· 아마 지금쯤이면 절망의 나락 속으로 인도되어 정신과 감정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을 것이다·”
‘···!’
충격을 받은 하스티아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시 신의 보호란 게 그런 거였나요?’
(신께서 그걸 원하고 있습니다·)
‘서 설마 이것 때문에? 유도를····’
일족의 영령들이 시안을 프루이나로 데려고 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단 말인가?
자기 때문에 시안이 이렇게 됐단 생각에 곧 엄청난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죄송해요 시안님!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제가 무지해서····’
하스티아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볼에서 흐른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시안의 뺨을 흠뻑 적셨다·
“엘프로서의 자각마저 완전히 잃어버렸구나 하스티아·”
그런 하스티아를 엘퓨리스는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더 늦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터·
엘퓨리스는 다시 한번 마나를 발현해 울부짖는 하스티아를 향해 겨눴다·
“···?”
허나 그 마나는 더 발현되지 못하고 도중에 사라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엘퓨리스는 자신의 손을 확인하다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엘프들 또한 당황을 금치 못했다·
“마 마리안 님?”
조금 전 프루이나 전역에 감응을 전했던 마리안이 어느 틈엔가 나타나 있었다·
엘퓨리스의 마력은 다름 아닌 그녀가 무효화시킨 것이었다·
“····”
마리안은 어떠한 말 없이 케이람과 하스티아가 있는 곳으로 서서히 나아갔다·
엘프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켜 그녀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주었고 그 누구도 그녀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
가는 동안 케이람과도 눈을 마주쳤지만 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리안은 울고 있는 하스티아 앞에 다소곳이 앉아 시안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하스티아·”
그러곤 살며시 하스티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마리안 님····’
이내 맞잡은 손을 시안의 품속으로 넣어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마검의 본체를 꺼냈다·
“이젠 네가 그를 구해주면 되는 것이야·”
그 한마디에 무너졌던 정신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어느새 눈빛이 바뀐 하스티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마리안에게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물러서거라·”
그녀를 잠시 물린 마리안은 곧 손끝에서 발현한 마력을 시안의 심장으로 가져다 대었다·
-쩌저적
그러자 심장 쪽을 시작으로 시안이 온몸이 얼음으로 얼어붙기 시작했으며 머지않아 시안의 몸은 투명한 얼음 결정체 안에 갇혀 버렸다·
바닥에는 푸른 마법진 까지 생성되었다·
“인계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거라· 이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강한 마음이 한데 모인다면 틀림없이 깨어날 수 있을 거다·”
‘네···!’
하스티아는 입술을 꾹 다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법진에서 뿜어진 전이의 마력이 하스티아와 케이람의 영령을 뒤덮었다·
그렇게 하스티아는 얼음에 갇힌 시안과 함께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다·
-스윽
할 일을 끝낸 마리안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엘퓨리스가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안 님! 어찌하여 저들을 보내는 것입니까?”
“····”
“일족의 금기를 깬 자들 아닙니까? 이미 신의 분노를 산 자들이란 말입니다! 더 늦기 전에 저희가 책임을···!”
“만년설을 녹인 이유가 무엇이냐?”
순간 엘퓨리스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지 지금 뭐라 하셨는지?”
“내 마력을 약화시켜서 프루이나의 만년설을 녹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리안은 좀 전과 다르게 분노한 시선으로 엘퓨리스를 노려보았다·
“프루이나 만년설은 단순히 내가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녹은 게 아니다! 인위적으로 발생한 다른 마력으로 인해 녹은 것이다! 내 마력을 약화시킬 정도의 마력을 가진 엘프는 장로인 너밖에 없다 엘퓨리스!”
“···!”
“다크 엘프의 봉인을 풀고 싶었던 것이냐? 프루이나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 장로님! 마리안 님의 말씀이 사실입니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엘퓨리스에게 향하면서 그에게 답을 요구했다·
“····”
엘퓨리스는 그 자리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에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담겨있었다·
“신께서 그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했음을 인정하는 명백한 긍정의 대답·
그 누구보다 일족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살았던 장로가 다크 엘프를 부활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니·
엘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 마음은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일족이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기 위해선 반드시 신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 신의 뜻이 일족의 평화를 망가뜨릴 수도 있단 생각은 못 한 것이냐?”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일 뿐입니다! 잃는 것이 없다면 얻는 것도 없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피이잉!
그 순간 아르보르 나무에서 또 한 번 큰 빛이 일었다·
빛은 모두의 시야를 가릴 만큼 순식간에 퍼져 나갔으며 급기야 공간 전체를 에워싸게 되었다·
“절 추궁하셔 봐야 이미 늦었습니다·”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엘퓨리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안 님께서 금기를 깨고 신의 비밀을 탐한 인간을 살려 보내신 만큼 자연스럽게 그 존재도 해방된 것입니다·”
“해방?”
“이 세계를 다시 본래의 질서로 되돌릴 진정한 구원자 말입니다!”
-쿠구구궁
엘퓨리스의 외침에 이어 갑자기 주변에서 굉음과 함께 진동이 일었다·
“이 진동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지금 당장!”
이내 위협을 감지한 마리안의 꼬리가 날카롭게 세워졌다·
“얼음 절벽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 빨리 나가서 마을을 지켜라 엘프들이여!”
화들짝 놀란 엘프들은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
허나 엘퓨리스는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금빛의 아르보르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거 하나만 알아두거라 엘퓨리스·”
마리안은 그런 그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잃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얻어봐야 공허함만 느낄 뿐이다·”
“····”
“난 너희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는 수백 년간 프루이나를 지켜왔던 수호자의 진실된 마음이었다·
* * *
얼음 절벽에서 시작된 진동은 화이트 엘프들이 거주하는 마을까지 이어졌다·
“지 지진?”
“갑자기 무슨 일이지?”
“저기 좀 봐!”
한 엘프의 외침에 모든 엘프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쩌적 쩌저적
살벌할 소리와 함께 갈라지는 절벽의 얼음·
그 여파는 고스란히 엘프들에게 전해졌다·
등골이 절로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안한 기분이 전신을 잠식할 때쯤·
-쿠구궁
절벽이 높게 솟아올랐던 얼음 산이 마침내 큰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말았다·
“산이 무너졌어!!”
그 광경을 접한 엘프들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후두두두
허나 붕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곧 붕괴의 여파가 사방으로 빠르게 퍼지면서 거대한 눈사태가 일어났으며 그대로 마을을 향해 빠르게 맹습했다·
“누 눈사태다!”
“모두 도망쳐!”
혼란에 빠진 엘프들은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나약한 두 다리를 아무리 움직여봤자 몇백 배에 달하는 속도로 밀고 오는 눈사태에서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
“프루이나에 끝이 찾아왔구나····”
일부 엘프들은 아예 포기한 듯 무릎을 꿇고 앉아 탄식을 내질렀다·
그렇게 마수의 습격과도 같은 눈사태가 마을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후우웅
성체로 변신한 마리안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며 거대한 날개를 펄럭였다·
기품이 느껴지는 순백의 날개에선 고귀한 신기가 잔뜩 뿜어나왔다·
마리안은 급습해오는 눈사태를 정면으로 마주했으며 곧 힘을 결집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빛을 내며 불타올랐다·
-화악
마침내 날개를 펼치며 결집한 힘을 사방으로 퍼트리니 마을 주변으로 거대한 제한 결계가 생성되었다·
-콰콰쾅!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맹습했던 눈사태도 드래곤의 결계를 넘어설 순 없었다·
눈사태의 여파로 잠시 굉음과 진동이 이어지긴 했지만 머지않아 잠잠해졌다·
“마 마리안 님이 우릴 구해주셨어!”
“감사합니다 마리안 님!”
살아남음을 확인한 엘프들은 공중에 뜬 마리안을 향해 찬사를 보냈다·
허나 마리안의 귀엔 그 찬사들이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붕괴가 시작된 방향을 매섭게 바라만 볼 뿐·
“···!”
이윽고 뭔가를 감지한 듯 마주하고 있던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웅장했던 얼음 절벽은 모두 무너진 채 거대한 얼음 파편들만이 주변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마리안의 둥지가 있던 곳 또한 흔적도 없이 소실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푹!
그 순간 갑자기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속에서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푹! 푹! 푹!
하나에 그치지 않고 동일한 형태의 손들이 연이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그들은 손을 시작으로 얼굴과 몸을 차례대로 드러냈다·
분노와 혈기에 차오른 듯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밝히고 있는 흉포한 존재·
바로 다크 엘프들이었다·
-푹! 푹! 푹! 푹! 푹!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늘어나는 수에 마리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곧 프루이나에 사는 화이트 엘프의 수를 넘을 만큼 순식간에 불어났으며 사태에 심각성을 인지한 마리안은 그들을 향해 바로 마법진을 겨눴다·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빙결 마법을 이용해 그들을 봉인할 생각이었다·
“혹한의 냉기가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파지직
허나 주문이 다 읊어지기도 전에 하늘에서 난데없이 금빛 번개가 내려치며 마리안을 덮쳤다·
피하지 못한 마리안은 벼락을 맞고 땅으로 추락하였으며 떨어지는 동안 다시 인간형으로 모습이 변했다·
“크윽!”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어깨를 부여잡으며 다시 일어나려는 그녀의 귀로 곧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하시네요·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매정하게 다시 보내려 하시나요?”
기품이 있으면서도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
마리안의 눈은 미칠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진 모르지만 어째 얼굴이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마리안? 절 이렇게 차가운 얼음 속에 가두시고도 문제없이 잘 사셨나 보죠?”
마리안은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제어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신의 명으로 300년 전 다크 엘프들과 함께 프루이나의 만년설 안에 봉인했었던 옛 성검의 주인·
“아나스타샤···!”
빛의 신 루멘델의 최고 심복이라고도 불렸던 그녀가
구시대를 지나 현시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