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6화· 비밀 속으로 (8)
살을 엘 듯한 바람도
끝없이 펼쳐진 눈의 벌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처럼·
“성검의 주인을 죽이고 그들의 계획을 저지한다· 이것이 정말로 실현되었다면 지금 세상엔 아마 다른 질서가 세워졌을지도 모르죠·”
보이는 거라곤 내가 목을 찔러 죽인 성검의 주인뿐·
얼굴에 범벅되었던 피도 어느샌가 깔끔히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는 변하지 않습니다· 없앨 수도 없어요· 그러니 숙연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내게 이딴 걸 보여준 이유가 뭐지?”
“깨우쳐 드리기 위해서라고 할까요? 신의 비밀을 알아낸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는 걸 말이죠·”
아나스타샤는 허공을 향해 크게 손짓했다·
그러자 검은 장막으로 뒤덮였던 주위에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익숙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프루이나의 또 다른 장소였다·
사방엔 다크 엘프들이 즐비해 있었고 그 중심엔 피를 흘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케이람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엔
“이것이 진짜 과거의 기억입니다·”
또 다른 아나스타샤가 케이람에게 성검을 겨누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아주 멀쩡한 상태로·
-푹
곧 성검의 무자비한 일격이 케이람의 심장을 관통했다·
케이람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기력하게 쓰러졌고 쓰러진 그녀를 앞에 둔 채 아나스타샤는 광소를 남발했다·
나로선 굉장히 불쾌한 광경이었다·
-후우웅!
그러다 갑자기 하늘 위로 거센 돌풍이 불었다·
돌풍의 중심엔 날개를 활짝 펼친 순백의 드래곤이 자리하고 있었다·
프루이나의 수호 드래곤인 마리안이었다·
“혹한의 냉기가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지 어니····”
그녀가 주문을 읊자 일순간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나타나면서 더욱 강한 눈보라가 불어 닥쳤다·
눈보라는 곧 주변 일대로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모든 것을 얼어붙게 했다·
그 범위엔 다크 엘프들과 성검의 주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 속수무책으로 얼어붙었으며 금세 눈에 파묻히고 말았다·
“저 다크 엘프들이 인계에 퍼졌다면 분명 큰 혼란이 찾아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이유가 뭐였을 것 같나요?”
그녀의 질문과 동시에 주변 광경이 또 한 번 변했다·
백색의 구름 위 휘황찬란한 광채가 어우러진 낯선 신전·
그 안엔 익숙한 두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빛의 신 루멘델·
그리고 검은 안개의 신 아에르·
그들은 작은 탁상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물러나겠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아에르였다·
“진심이냐?”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네놈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네놈을 위한 질서를 세우든 신계에서 날 추방하든 네놈 마음대로 해라· 난 상관하지 않겠다·”
루멘델은 못 믿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제 와서 마음을 바꾼 이유가 무엇이냐?”
“당연히 네놈 때문이다· 너와 내가 공존할 수 없다는 건 불변의 이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인간들이 고통받을 이유는 없지·”
“그래 봐야 피조물들 아니더냐? 우리가 없었으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놈들이다· 고작 피조물들을 보호하겠답시고 스스로를 희생한다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아에르·”
“피조물이 아니다· 인간이지·”
아에르의 눈빛은 확고했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은 단순히 힘을 좀 더 가졌다는 것뿐이다· 너는 인간을 단순히 지배할 존재로만 보겠지· 허나 나는 인간들에게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
“이래서 내가 너와 함께 할 수 없는 거다 아에르·”
루멘델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물러서겠다는 건 아니다·”
아에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뭐 조건이라도 걸겠다는 것이냐?”
“그렇다· 네놈이 중심이 된 세상에 나를 악의 존재로 규정하는 건 좋다· 단 너와 내가 지금껏 저질러왔던 이전의 일들은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전부 지워라·”
루멘델의 미간은 다시 좁혀졌다·
“피조물들의 기억을 봉인해 달라는 뜻이냐?”
“그렇다·”
“그런 귀찮은 일을 내가 왜 해야 하지? 솔직히 지금 난 너와 거래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네놈이 이렇게 꼬리를 내리지 않아도 네놈의 모든 것을 박살 낼 준비를 이미 끝마쳤으니·”
“그래서 제안하는 거다· 더 귀찮은 일 생기기 전에 여기서 끝내라·”
아에르의 눈에 순간 독기가 차올랐다·
“다크 엘프라는 존재를 이용해 인계에 혼란을 유도하고 그 주동자로 날 지목할 속셈이었나 본데 나라고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진 않을 거다·”
“다크 엘프? 그게 뭐냐? 그딴 건 난 모른다·”
루멘델은 입꼬리를 올리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래? 그럼 그 존재들을 다른 신에게 알려도 상관없겠지?”
“···내 알 바 아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1초 정도 뜸을 들였다·
“너와 상관없다니 다행이군· 이미 아쿠아니스 여신에게 부탁해 그놈들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쯤이면 전부 프루이나에 만년설 아래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곳에 있던 성검과 성검의 주인까지 포함해서·”
-쾅!
잠자코 있던 루멘델이 갑자기 탁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왜 그리 흥분하지? 너와 관계없다고 하지 않았나?”
“···!”
“프루이나는 물의 여신의 은총을 받은 드래곤이 수호하는 땅이다· 그 땅이 알 수 없는 존재로 인해 더럽혀지고 있다는데 그녀가 정화하는 것이 맞지 않나? 참고로 거기엔 내 아이도 함께 있었다·”
그의 아이라면 아마도 케이람을 말하는 것이겠지·
여유가 넘쳤던 이전과 다르게 루멘델의 얼굴엔 분노가 가득했다·
“더 말하지 않겠다 루멘델· 여기서 끝내라·”
“아에르···!”
“너는 나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고 싶겠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너 역시 치명적인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야! 나는 네놈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고 내가 소멸하는 날엔 너 역시 온전치 못할 것이다!”
두 신은 한참 동안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루멘델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득바득 이를 가는 반면 아에르는 절제된 표정을 유지했다·
“인계로 쫓겨나면 설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살아라! 행여나 딴맘을 품고 나와 또다시 대적하려 드는 날엔····”
결국 먼저 입을 연 루멘델은
“네놈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버릴 것이야!”
아에르를 향해 마지막 경고를 전했다·
“검은 안개의 신으로서 맹세하지·”
허나 아에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적어도 내가 직접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아에르의 몸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치솟았으며 이윽고 안개에 휩싸인 채 사라졌다·
“기억은 여기까지!”
앙칼진 목소리와 박수를 주변은 다시 검은 장막으로 물들여졌다·
“신의 비밀을 확인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왔다·
저 치졸하고 우스운 광경을 두고 소감이 어떤지를 묻고 있다·
결국 서로가 피해를 덜 보기 위해 추잡한 합의를 이룬 걸 가지고 비밀이라고 거창하게 붙여놨으니·
하기야 반대로 말하면 그래서 비밀인 걸 수도 있다·
원래 비밀이란 건 남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 본인들의 추잡한 치부를 의미하니 말이다·
“감동을 너무 받으셨나 봐요? 말을 못 하고 계시네?”
“넌 정체가 뭐지?”
“저요? 딱히 정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굳이 설명하자면 신의 비밀을 들추러 온 당신 같은 침입자를 위한 보호 수단 같은 거라고 할까요?”
갑자기 그녀의 몸에서 눈 부신 빛이 일었다·
짧은 발광에 불과했지만 그 잠깐 사이에 아나스타샤는 사라져버렸다·
대신 그 자리엔 새로운 누군가가 나타나 있었다·
“분명 이렇게 생기셨던 분의 몸 안에 깃들어 있었죠·”
다름 아닌 하스티아였다·
물론 진짜 하스티아가 아닌 외면만 같은 가짜일 것이다·
근데 그녀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이 낯선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았다·
“네가 그 신의 보호로군·”
그녀는 대답 없이 크게 미소만 지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살아있는 인격으로 존재했을 줄은 몰랐다·
“제가 지고의 존재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딱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일단 침입자가 궁금할 만한 것들을 전부 보여준다! 이건 성공적으로 해낸 것 같죠?”
그녀의 몸에서 또 빛이 발하면서 다시 한번 내 시야를 가렸다·
나를 자극하겠답시고 또 모습을 바꾼 거겠지·
“두 번째는 바로 이겁니다·”
“···!”
인정하겠다·
이번엔 나를 제대로 자극했다·
지금 내 눈앞에 떡하니 자리한 존재는 인간도 엘프도 아니었다·
바로 인간의 탈을 쓴 악마·
에쉘 베르트였다·
“침입자를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인도해라·”
-꿈틀
대뜸 발밑에서 무엇이 꿈틀하고 밟히는 느낌을 받았다·
흠칫 놀란 나머지 바로 뒷걸음친 순간
-쑤욱
알 수 없는 뭔가가 아래에서 쑤욱 하고 솟아 나왔다·
그것은 손이었다·
붉은 핏자국이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모습이 매우 혐오스러웠다·
“시안 베르트····”
손에 이어서 누군가의 얼굴까지 튀어나왔다·
마치 녹아내리는 촛농을 보는 듯 얼굴 전체엔 핏빛 진물이 가득 흘러내렸다·
근데 이 얼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다·
“시안 베르트!!!”
피로 범벅된 괴형체가 나를 향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 울부짖음엔 원망과 비탄이 가득했다·
틀림없다·
이놈은 보리스 르헬름·
내가 죽여서 나락의 밑바닥으로 보내버렸던 성서의 주인이다·
-쑤욱
다른 곳에서도 피 묻은 손과 얼굴이 하나둘 솟아 나왔다·
그들은 내게 있어 절대 낯선 얼굴들이 아니었다·
기사 세실리아 마법사 카론 성녀 네프로디테
그 외에 내가 죽이고 처단했던 수많은 지옥의 망령들이 나를 붙잡기 위해 팔을 이리저리 퍼득거렸다·
마치 자신들이 있는 나락으로 나를 끌고 가려는 듯이·
“저항하고 발버둥 치세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악마의 얼굴을 한 녀석은 그런 나를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만 나락으로 떨어지세요· 시안 베르트·”
* * *
(해야 할 일을 하세요· 하스티아·)
(이건 일족의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당신 모두를 지켜야 해요!)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 쉴새 없이 울려대는 그들의 목소리·
하스티아는 괴로운 마음에 눈과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를 외면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목소리의 존재들은 더욱 가깝게 다가와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만! 그만해 주세요!’
하스티아는 간섭을 멈춰달라고 호소했지만 목소리는 그치지 않고 더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모르겠어·’
그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뭐가 일족을 위한 일이란 거지?’
대체 일족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한다는 일이 뭐란 말인가?
뭘 해야 하며 뭘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젠 벗어나고 싶어!’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상황에서 그녀는 이제 벗어나고 싶었다·
-벌떡
‘···!’
감겼던 눈이 뜨이자마자 하스티아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상황·
그녀는 곧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파악했다·
신에 바쳐진 나무 아르보르(Arbor) 바로 앞·
옆에는 조금 전 함께 빛에 휘말렸던 시안이 쓰러져 있었다·
‘시안님!’
황급히 몸을 흔들어봤지만 그는 깨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
‘무사··· 하신 건가?’
혹여 잘못된 일이라도 벌어진 건 아닐까?
마치 죽은 시체 마냥 시안의 얼굴엔 생기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하스티아의 마음은 자연스레 초조함이 차올랐다·
-쿠구궁
그 순간 갑자기 공간에서 큰 굉음이 울리며 진동이 일어났다·
깜짝 놀란 하스티아는 아르보르 나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우웅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빛을 뿜어내는 아르보르 나무·
하스티아는 거기에 매료되기라도 한 듯 나무의 빛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탁탁탁
그때 뒤에서 다수의 발소리와 함께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스티아!!”
소리에 끌린 하스티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급히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다수의 엘프 무리가 보였다·
선두엔 장로 엘퓨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