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화· 비밀 속으로 (3)
일단 당장 눈에 보이는 다크 엘프의 수는 다섯·
검과 활 그리고 마력으로 무장한 화이트 엘프들과 대치 중이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놈들이 들어오려 한다! 막아!”
“순수한 얼음의 장막이 위협을 막아주리라!”
한 엘프가 주문과 함께 마나를 발현하니 곧 다크 엘프들 앞으로 투명한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쾅! 쾅!
진로가 막힌 다크 엘프들은 벽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기세를 봤을 땐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갈 것 같진 않았다·
“어찌할까요 장로님? 돌아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아이스 월(Ice Wall)을 유지하는 일에 치중해주게! 직접 나서서 상대하는 건 위험해!”
일단은 맞서지 않고 놈들이 알아서 물러나 주길 바라는 듯했지만
-콰직!
안타깝게도 그건 힘들어 보였다·
주먹이 부서질세라 벽을 내려치던 다크 엘프들은 기어이 벽에 균열과 함께 구멍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벼 벽이?!”
돌이나 철로 만든 벽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해질 수 있는 얼음벽을 몇 번 친 걸로 파훼한 것이다·
“헛짓거리들 하지 말고 싹 다 뒤로 꺼져!”
결국 보다 못한 케이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쾅!
얼음벽을 단번에 부순 것에 이어 손에 잡힌 마검의 칼날이 맨 앞에 있던 다크 엘프의 목을 베어 갈랐다·
양분된 목에선 검붉은 피가 튀면서 그녀의 팔에 묻었다·
하지만 케이람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다크 엘프들을 차례대로 참살했다·
1분은 됐으려나?
허나 그걸로 일이 끝날 것 같진 않았다·
“이런 쓰레기들을 상대로 대체 뭘····”
“물러서십시오! 시체로부터 떨어져야 합니다!”
타타리스 장로가 어서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
이윽고 케이람은 뭔가를 발견하고선 급히 뒤로 물러섰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뭐야 이것들은?”
적잖이 놀랐는지 그녀의 눈은 꽤 흔들리고 있었다·
하얀 눈밭 위·
케이람이 죽인 다섯 다크 엘프 시체의 주변이 어느샌가 까맣게 물들어졌으며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나는 즉시 몸을 숙이고 앉아 손으로 피를 만져 보았다·
사람의 피보다 더 검고 훨씬 더 진득한 감촉·
이건 분명···
손에 묻은 피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나는 기어이 그 피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야! 너 미쳤어?”
깜짝 놀란 케이람이 내 손을 뿌리쳤다·
“이게 뒤지려고 환장했나? 아까 이놈들 피에 독 같은 게 있다는 말 못 들었어?”
독이 있는지까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피 엘프의 피 외에 또 다른 피가 분명하게 섞여 있다·
“어서 시체들을 얼려!”
뒤따라 달려온 엘프들이 마법으로 시체를 얼렸고 상황은 일단 그렇게 해결되었다·
“너 무슨 독 먹는 게 취미냐? 나중에 배탈 나도 난 모른다·”
“배탈로 끝날진 모르겠지만 일단 알아낸 게 하나 있습니다·”
“그래? 뭔데?”
“이 피 마수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그녀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지? 뭐? 마수의 피? 너 확신할 수 있어?”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마수의 피를 많이 먹어본 인간으로서 장담할 수 있다·
다크 엘프라고 불리는 이 기괴한 개체의 몸엔 분명히 마수의 피가 흐르고 있다·
“지금 네 말· 어째 이놈들이 엘프랑 마수의 혼종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아직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한 일일 테니·
“우선 팔부터 좀 보여주십시오·”
“갑자기 팔은 왜?”
“아까 목 베다가 튄 피가 묻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치유해 드리겠습니다·”
“됐어· 내 몸뚱이도 아닌데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케이람은 받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억지로 권유해볼까 했지만 괜히 그녀의 심기만 건드릴 것 같아 생각을 접었다·
나는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타타리스 장로에게 다크 엘프에 관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마 마수의 피 말입니까?”
반응은 딱 예상했던 대로·
장로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해 허공에서 방황했다·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군요· 그러니까 당신들은 그 다크 엘프가 마수와 우리 화이트 엘프의 피가 섞여 만들어진 혼종이라는 겁니까?”
“그걸 위한 조사를 지금부터 하려 합니다·”
나는 고개를 내밀어 본격적인 취조를 시작했다·
“저 다크 엘프가 처음 나타난 시점은 언제입니까?”
“이제 한 달 정도 됐습니다·”
“그 전에 다크 엘프 외 프루이나에 살지 않았던 다른 생명체 혹은 마수를 목격한 적이 있으십니까?”
“없었습니다· 다크 엘프도 다크 엘프지만 우리 일족이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산 이래로 마수를 목격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곳은 마수가 살기에도 부적합한 환경이란 뜻이었다·
“그동안 마을을 떠나거나 실종된 일족원은 없었습니까?”
“당장 인원 집계를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제가 알기론 없었습니다·”
장로는 그러면서 밖에 대기하고 있던 엘프들에게 당장 인원 추산을 해보라며 지시를 내렸다·
만약 다크 엘프가 정말 마수와 화이트 엘프의 특색이 합쳐서 만들어진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까진 좋다·
그럼 문제는 그 피와 육체의 근원이 어디냐는 것이다·
개인 혹은 무리가 의도적으로 공급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겠지·
그 범인은 이 마을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싹 다 불러 모아서 추궁시켜보면 알 거 아니야? 귀찮게 뭔 머리를 굴리고 있어?”
“그랬다간 일족원들의 두려움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장로는 아직 확실치도 않은 상황에 그런 일을 할 순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다크 엘프가 처음 발견된 지점이라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거라면 가능하죠· 마을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얼음 절벽 지대입니다· 원한다면 안내원을 붙여드리겠습니다·”
“할 일 생겼네· 가자 꼬맹아·”
케이람은 바로 출발하자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날이 이미 저물지 않았습니까? 지금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안전할 때 가면 뭐 볼 거 있다고? 위험할 때 가야지 뭐라도 보는 법이야·”
“지 진심이십니까?”
장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위치만 알려주십시오· 저희만이라도 다녀오겠습니다·”
나 역시 그녀의 생각과 마찬가지였기에 부정하려 들진 않았다·
“흠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제 아들을 안내원으로 붙여드리겠습니다· 그와 함께 동행하시지요·”
“아들 말입니까?”
“예· 들어오거라 엘퓨리스!”
장로의 부름에 나도 모르게 눈이 부릅떠졌다·
“다름 아닌 제 아들이 다크 엘프를 처음 발견한 목격자입니다· 지 한 몸 정도는 간수할 수 있는 놈이니 두 분께 방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저벅저벅
절제된 걸음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맞춰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젊고 수려한 외모의 남자 엘프·
그러면서도 내 눈에 매우 익다·
이 뭣도 모를 기억 속으로 들어오기 전 마리안의 둥지에서 보았던 현 화이트 엘프의 장로 엘퓨리스·
그가 확실하다·
설마하니 장로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엘퓨리스입니다·”
그는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기묘한 푸른 눈동자로 나와 케이람을 마주했다·
* * *
-쌔애앵
해가 저물고 밤이 되자 낮과는 비교도 안 될 더 매서운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출발 전 타타리스 장로가 걸어준 보온 마법 덕분에 그래도 더 수월하게 눈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선두에선 장로의 아들 엘퓨리스가 마법으로 만든 푸른 구체를 불빛 삼아 우리를 인도해주었다·
“난 솔직히 아직 못 믿겠는데? 대체 어떤 미친놈이 마수랑 엘프를 데려다가 그런 괴상한 놈들을 만들었다는 거야? 무슨 이유로?”
“그걸 알아보기 위해 지금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할 짓 없어서 그런 일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케이람은 못마땅한 듯 콧방귀를 뀌는가 싶더니 대뜸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손 내밀어 봐·”
“손은 갑자기 왜?”
“맞고 내밀래? 그냥 내밀래?”
다짜고짜 뭐 때문에 손을 달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순순히 내밀었다·
-콱!
케이람은 그런 내 손을 갑자기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뼈를 부러뜨릴 정도의 엄청난 악력이었다·
이에 나 또한 본능적으로 힘을 주어 되받아쳤다·
“잘 버티네?”
그녀는 그런 칼바람보다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보다가 손을 놔주었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너 마수의 피 처먹었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약한 인간 주제에 내 악력을 견딘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 근데 넌 견디는 것도 모자라서 역으로 압도하려는 모습까지 보여줬어· 이건 마수의 피를 먹은 인간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해·”
“그게 뭐 문제 있습니까?”
부정해봐야 의미는 없기에 순순히 인정했다·
“왜 문제가 없어? 마수의 피가 인간의 근력 증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아는 인간이 흔한 줄 아니? 그래 아는 것까진 그렇다 쳐· 근데 그냥 피를 맛본 정도로 마수의 피란 걸 알아냈다? 대체 얼마나 처먹었으면 그 수준까지 이른 걸까?”
그녀는 당장에라도 내 목을 조를 것 같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정체가 뭐냐 너?”
“····”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아에르의 하수인을 내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 너 어디서 온 놈이야?”
혹한의 칼바람보다 매서운 그녀의 살기 가득한 눈빛이 내게 불길처럼 쏟아졌다·
그녀가 내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지금 시점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도는 딱 두 가지·
솔직하게 말하거나
혹은 피하거나·
내가 해야 할 건 단연 후자다·
“일이 끝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때까지 기다려줄 것 같니?”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절 죽이셔도 됩니다·”
“자신만만하네? 아님 죽을 자신이 없어서 이러는 건가?”
“····”
“기대 많이 하고 있을 테니까· 대답 잘 준비하고 있어라~”
당부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을 끝으로 그녀는 몸을 돌렸다·
“다시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우리를 잠자코 기다리던 엘퓨리스는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갔을까·
“도착했습니다·”
걸음을 멈춘 엘퓨리스가 도착을 알렸다·
앞서 지나온 곳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 평범한 눈밭 위였지만 앞엔 거대한 얼음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이 위치에서 처음으로 다크 엘프를 목격했습니다· 놈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습니다·”
그는 설명과 함께 다크 엘프가 도망친 방향을 가리켰다·
“이곳은 어쩌다가 지나가시게 된 겁니까?”
“본래는 저희 프루이나의 수호 드래곤이신 마리안 님의 둥지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겁니까?”
“지금은 계시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왜 비웠는지는 묻지 않았다·
지금이 신마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시점임을 고려하면 뭐 때문에 비웠는지 대강 알 것 같았으니·
하지만
“그분의 둥지가 이 근처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안내해주십시오·”
무미건조했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살짝 흔들렸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마리안 님의 안식처를 당신들 같은 외부인에게 함부로 보여 드릴 순 없습니다·”
“둥지에 들어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입구 근처까지만이라도 좋으니 안내해주십시오·”
그 드래곤의 둥지에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허나 내가 이 기억 속으로 들어오기 불과 몇 분 전까지 난 그녀의 둥지에 있었다·
지금 우리가 위치한 이 지점은
근처가 아닌 둥지에서 아예 반대 방향으로 한참 떨어진 곳이다·
즉 다시 말해 이 엘프는 지금
“뭐 문제 있습니까?”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