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화· 프루이나 (2)
“커헉!”
외마디 신음과 함께 검을 떨어트린 엘프는 그대로 내 앞에 고꾸라졌다·
이걸로 딱 열 명째·
죽여봐야 나한테 좋을 것도 없으니 일단은 전부 급소를 가격해 기절만 시켜놨다·
한 놈 정도는 깨워서 왜 나를 공격하는지 물어볼까 했지만
관뒀다·
엘프의 신의는 웬만한 인간 기사들 못지않게 매우 강직하고 올곧다·
그러니 어지간히 강도 높은 고문을 하지 않고서야 이들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직접 확인하는 게 낫지·
나는 고개를 돌려 어둠으로 휩싸인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감옥이라고 말했었지?
누군가를 가둬놓은 공간인지 아님 날 가둬놓기 위한 공간인지는 두 눈으로 확인해보면 알겠지·
한 200걸음 정도 걸었을까?
보통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통로가 좁아지는 것이 동굴의 기본 구조인데 이 동굴은 어째 갈수록 통로가 더 넓어지고 있다·
어째 큰 거 하나를 볼 기분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넓은 지점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듯 세찬 바람이 불었다·
이내 주위가 환히 밝아지며 가려졌던 동굴의 전경이 드러났다·
허· 이건 뭘까?
웬만한 군대 사열장과 비견될만한 넓은 공간 위로 자리한 거라곤 달랑 하나·
거대한 얼음덩이? 얼음 운석? 얼음 결정체?
아무튼 한눈에 봐도 입이 떡 벌어질 크기의 거대한 빙결체가 내 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내 눈을 의심케 한 것은 그 빙결체 안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의문체였다·
흙에 뒤덮인 듯 새까만 피부에 머리 양쪽으로 솟아오른 두 개의 뿔
거기에 엘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뾰족한 귀까지·
내가 아는 지식의 범주 중 이런 생명체를 두고 부를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다·
[다크 엘프네?]
어느새 실체화한 케이람이 나보다 얼굴을 더 내밀며 얼음 속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얘가 왜 여기 있을까?]
“그건 본인이 더 잘 알지 않겠어?”
[너는 내가 무슨 역사책인 줄 아니? 옛날 일 들춰보면 다 알게?]
“아니라곤 말 못 하겠군· 이전에 내가 아닌 다른 주인과 함께 이 다크 엘프란 놈들을 상대했던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글쎄?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서 말이지· 하나 지적해주자면 그 다른 주인과 함께하진 않았어·]
“뭐?”
[그땐 나 혼자였거든· 녀석의 몸을 완전히 잠식했었을 때니까·]
케이람은 왠지 모를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저벅저벅
그 순간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수가 아닌 엄연한 한 명의 발소리였다·
그렇담 적어도 나를 잡으러 온 경비원 엘프는 아니란 의미겠지·
아니 이건 애초에 엘프도 아니었다·
“암살자라고 하더니 과연 느껴지는 살기가 남들과 확연히 다르구나·”
여유로운 목소리를 흘리며 점차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의문의 존재·
아직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누구인지 나는 몸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냉혹한 엘프들의 영지를 지키는 수호자·
더불어 푸른 물의 여신의 하수인으로 알려져 있는 드래곤·
“이제야 너와 얼굴을 맞대보는구나· 검은 안개 신의 계승자····”
마리안·
그 뒤로 더 이름이 더 길게 있지만 거기까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째 날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구나? 날 본 적 있니?”
“드래곤이라면 얼마 전까지 지겹게 보고 왔지·”
내 중의적인 대답에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녀를 아는 것관 별개로 그녀 역시 나를 계승자라고 칭하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신상을 아는 듯 보였다·
“앞선 상황은 당신은 만든 건가?”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나도 이제 막 프루이나로 돌아온 참이거든?”
-탁탁탁
말 주고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왔던 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혼자가 아닌 다수·
다급함이 한껏 느껴지는 걸로 봐선 이번에야말로 날 잡으러 온 경비원 엘프들로 보였다·
“뭐가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 모습을 드러내기도 곤란하니····”
그러자 갑자기 마리안의 몸에서 빛이 일기 시작하더니
“잠시 네 몸을 빌려야겠구나?”
머지않아 광채와 함께 작은 정령의 형태로 변해버렸다·
그러곤 허락도 없이 내게 다가와 망토에 달린 후드 속으로 숨어버렸다·
“뭐 하는 짓이지?”
“그리 경계할 것 없다· 네 누나가 그동안 날 부려 먹은 것도 있는 만큼 잠시 신세 좀 지려는 것뿐이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누나라고?
설마 엘리스 누나를 말하는 거야?
“자 일단은 여기부터 좀 벗어나자 꾸나·”
상황 설명을 들을 여유도 없이 어느샌가 내 앞엔 수십 명의 경비원 엘프들이 내게 칼과 창을 겨누며 가로막고 있었다·
* * *
“하스티아님이 사라지셨다!”
“그 인간이 하스티아님을 납치했어! 그 인간을 쫓아야 해!”
“대체 인간을 왜 프루이나에 들인 거야?”
불안한 예감은 어째 틀린 경우가 없다·
저 엘프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 꼬여버렸다·
“졸지에 오자마자 쫓기는 신세가 되었구나?”
“그쪽이 나서서 말 한마디 해주면 다 해결될 거라 보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함부로 날 드러낼 순 없지· 너희 암살자들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원칙 아니니?”
누가 들으면 어디 암살 조직에라도 있다 온 줄 알겠군·
허나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엘프들이 무엇 때문에 나를 공격했는지 그 다크 엘프가 갇혀 있는 곳엔 왜 데려간 건지 이 드래곤은 어쩌다가 지금 내 옆에 붙어있는지 등
지금으로선 뭐 하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없다·
그런 상황에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
바로 하스티아를 찾는 일이다·
일단 나를 납치범이라고 음해하는 건 둘째치고 실종되었다고 하는 걸 봐선 아마 하스티아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친 게 아닐까 싶다·
“무슨 상황인진 몰라도 우선 하스티아부터 구해야겠지?”
“그걸 알면 그녀가 갔을 만한 장소라도 좀 알려주시는 게 어떨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마을 북쪽 경계로 나가서 쭉 올라가면 내 둥지가 있다· 일단 그곳으로 가보자꾸나·”
“둥지?”
“내 안식처를 말하는 거다· 알 같은 건 없으니 이상한 생각하지 말도록·”
누가 뭐라 했나?
“거기에 하스티아가 있을 거란 보장은?”
“이 프루이나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내 둥지다· 그녀에게도 항상 위험이 닥치면 내 둥지로 피하라고 말해뒀었으니 아마 마을을 벗어났다면 그곳으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썩 내키진 않지만 당장 갈 곳도 없으니 일단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겠지·
나는 그 곧바로 엘프들의 눈을 피해 마을 북쪽 경계로 향했다·
큰 문제 없이 빠져나오긴 했지만 마을을 빠져나온 순간 들이닥친 거센 칼바람에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아 더럽게 춥네·
-후우웅
그때 갑자기 망토에서 붉은빛이 일더니 전신에서 후끈후끈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설마?
“망토에 보온(保溫) 마법을 걸어 놓다니· 생긴 것과 다르게 추위에 많이 약한가 보구나·”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내가 한 거 아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망토를 애지중지 두르고 있었던 그녀가 걸어놓은 마법이겠지·
시키지도 않았건만 참 별짓을 다 해놨군·
그렇게 마을을 벗어나 북쪽으로 20분 정도 나아가니
높게 깎아져 내린 엄청난 얼음 절벽이 나타났다·
수백 년 동안 추위로 얼고 녹으며 다듬어진 절벽에선 날카로운 냉기가 감돌았다·
마리안의 지시에 따라 왼쪽으로 백 걸음 정도 걸어가니 거대한 입구의 얼음 동굴이 나타났다·
딱 드래곤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군·
“그래도 용케 추위에 얼지 않고 잘 찾아왔구나·”
“프루이나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하기엔 딱히 특별해 보이진 않는데?”
“항상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 위를 조심하거라·”
그녀가 위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내뱉자마자 절벽 위에서 거센 눈보라가 일었다·
그 눈보라 속의 담긴 위협을 인지한 나는 재빨리 몸을 내뺐다·
-쾅!
이내 정체 모를 거구의 몸체가 방금전 내가 있던 지점에 떨어지면서 솟아오른 눈이 시야를 가렸다·
-후웅
가려진 시야 너머로 육중한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퍽!
급하게 양손을 들어 올려 막긴 했지만 충격의 여파로 몸이 다섯 걸음 정도 뒤로 날아갔다·
놈은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달려오려 하자 그 즉시 케이람을 꺼내 반격했다·
-슈욱
놈은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두르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그의 멱살을 휘감았다·
“···!”
멱살에 전해진 악력에 놈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주먹을 내질렀다·
-후욱!
딱 종이 한 장이 들어갈 만큼의 거리·
나는 주먹을 완전히 내지르지 않고 정확히 녀석의 코앞에서 멈췄다·
바람과 함께 눈이 걷히면서 그의 얼굴이 비로소 제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너 너는?”
“이름이··· 가르니안이었나?”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일전에 네프로디테 성녀의 꼬임에 넘어가 하스티아와 일족을 잠시 위기에 빠트렸었던 화이트 엘프·
가르니안이었다·
반응을 보니 그 또한 내가 여기 있단 사실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시안님!’
그때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의 감응이 퍼지면서 나는 자연스레 주먹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몸을 돌리자마자 내 몸을 와락 끌어안는 익숙한 여인·
하스티아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흐느끼며 내 품에 얼굴을 비볐다·
참나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그녀에 이어 동굴 안쪽에서 익숙한 얼굴의 엘프들이 연이어 따라 나왔다·
* * *
경비원들로부터 쫓기던 하스티아를 구해준 건 가르니안이었다·
그는 하스티아가 프루이나에 돌아왔단 소식을 듣고 마을로 몰래 잠입해 상황을 지켜보던 중 도망치는 하스티아를 발견하고선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프루이나에 오시자마자 참 경황없는 일을 겪으시게 됐군요·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로엘이 대표로 나서서 시안에게 유감을 표했다·
“됐고· 같은 일족끼리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나 설명 좀 해주시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로엘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오기 전에 저희 경비원들과 마찰이 있으셨죠?”
“있었다·”
“일족의 경비원들은 혹시 모를 외부인의 침입에 대비해 감시 및 경계 임무를 수행하는 자경단으로서의 역할만 할 뿐 마을 내에서 질서를 관리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저희가 돌아왔을 땐 뭔가 달라져 있더군요· 마을 내부에 무장한 경비원들이 줄지어 돌아다니는 데다 일족의 생활 자체를 통제하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 보자마자 진상을 물었지요· 하지만 그런 저희에게 돌아온 것은 포박과 위협뿐이었습니다· 하스티아님을 인간들에게 방치한 죄를 묻더니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마을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비상 거처로 마리안의 둥지로 오게 되었다고 로엘은 말했다·
“당신들이 여기 있는 걸 그들은 모르고 있나?”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일부러 건들지 않는 것이겠죠·”
로엘은 그러면서 가르니안 쪽을 쳐다봤다·
시안 역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일족 최고의 전사와 함께 있는데 뭐가 무서워서 그들을 제압하지 못한 거지?”
“난 일족과 하스티아님을 위기로 몰아넣은 중죄를 범했다· 이런 몸으로 일족을 지키는 일엔 힘을 쓸 순 있겠지만 그 힘으로 일족을 제압할 순 없다·”
다소 고지식하긴 했지만 일족을 향한 그의 신의를 엿볼 수 있는 대답이었다·
이에 하스티아가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제 잘못이에요· 저의 부재가 다른 분들에게 불안과 혼란을 불러오게 한 것 같아요· 그러니 제가 다시 가서 설득해 볼게요· 진심으로 호소하면 분명 들어주실····’
“팔자 좋은 소리를 하는군·”
시안이 거기에 초를 쳤다·
“외면하지 마· 너도 눈치챘잖아· 그 경비원 엘프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하스티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경비원들이 하스티아님께 무슨 말을 했었습니까?”
하스티아는 대답하지 못해 간절히 모은 두 손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그리 닦달할 필요 없다·”
갑자기 시안의 후드 위에서 밝은 광채가 치솟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