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인과응보 (4)
비릿한 피 냄새가 잔뜩 퍼져있는 현장과 그 사이를 묵묵히 나아가는 로저스·
그의 코엔 피 냄새만이 아닌 다른 냄새까지 감돌고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절규와 절망에 가득 찬 냄새라고 할까?
죽음이 가까워진 생물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울부짖고 발광했을 때 자연스레 퍼지는 그런 냄새였다·
로저스는 특히 이 냄새에 매우 익숙했다·
이 냄새가 퍼진 현장에 끝자락에는 항상 같은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곧 길 자락 끝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자 로저스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주군이자 마계의 절대자·
마왕 벨카리온이었다·
“음? 언제 왔어 로저스?”
“방금 왔습니다·”
벨카리온은 피에 적신 미소를 드리우며 로저스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의 앞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기형체가 피에 범벅된 채 놓여있었다·
인사를 올린 로저스는 손에 마나를 발현하였으며 성큼성큼 마왕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가 벌여놓은 일의 뒤처리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냐 됐어· 하지 마·”
하지만 벨카리온이 이를 제지하였다·
“그냥 저 상태로 두실 겁니까?”
“딱히 흔적을 없애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어차피 이 주변은 마족의 거주지도 없잖아?”
“누가 봐도 마왕님이 한 짓이란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래 주면 더 좋을 일이고·”
벨카리온은 오히려 그쪽을 더 원하는 듯했다·
“나름 경고와 함께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않겠어?”
“무얼 증명하시겠단 겁니까?”
“마왕으로서의 내 본성이 아직 뚜렷하게 남아 있다는 걸 말이야· 언제 어디서 누구든 상관없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란 걸 다들 깨닫게 되겠지·”
벨카리온은 사체를 바라보며 음흉한 눈웃음을 지었다·
덩달아 사체를 살펴보던 로저스는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에쉘이란 남자는 아니군요····”
“응 맞아· 대신 얘가 베스티를 괴롭게 했던 그 펜던트를 만들었던 마녀래· 이년이 말하길 그 에쉘이란 놈은 이미 마계에 없을 거라 하더라고·”
“그럼 어디에?”
“자기도 모른대· 궁금하면 나보고 인계에 가보라던 걸?”
마왕의 입에서 다시 한번 인계가 언급되자 로저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가실··· 생각입니까?”
실로 많은 의미가 함축된 물음이었다·
로저스의 얼굴엔 어느샌가 긴장이 잔뜩 서려 있었고 그런 로저스를 돌아보며 벨카리온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의 뒤론 아직 피를 갈망하며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는 사검의 영령이 자리하고 있었다·
* * *
“대체 무슨 생각이지 마리안?”
“우리 서로 질문은 더 안 받기로 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이해할만한 행동을 했으면 질문할 여지도 없다· 왜 그 둘이 쫓던 사냥감을 네가 중간에 가로챈 거지?”
“가로챈 것까진 아니야· 그냥 잠시 묶어두고 있을 뿐이지· 애초에 내가 원해서 한 일도 아니라고·”
“과연 지고의 존재들도 그렇게 볼지· 의문이 드는군·”
마리안을 딱히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으며 그런 그녀를 나겔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응시하였다·
“검은 안개의 신에게 협력할 생각인가?”
“이거 왜 이래? 당신이나 나나 우리는 이 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중재자에 불과한 거 몰라? 고작 이 일 하나로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해·”
“질문을 잘못했군· 푸른 물의 여신은 검은 안개의 신과 협력할 생각을 하고 있나?”
여신이 언급된 순간 그녀의 눈살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호기심 많은 남자일 줄은 몰랐네? 왜? 당신도 끼고 싶어?”
“끔찍한 소리를 하는군· 볼일 끝났으면 빨리 내 아공간에서 나가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마리안은 바로 게이트를 생성했다·
그 길로 나가는가 싶다가도 다시 나겔을 돌아보며 말했다·
“확실히 당신 많이 인간다워졌네·”
“무슨 의미지?”
“별 뜻 없어·”
마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남기며 아공간을 나갔다·
그녀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 저편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미슈카를 통해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지시했던
시안이었다·
“····”
나겔을 마주한 시안은 왠지 모를 기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보는 눈빛이 희한하구나· 마치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단 것처럼 보인다만?”
“뭔가 찔리는 게 있으니 그리 말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시안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덤덤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네가 찾던 사냥감은 내게 없다· 하물며 이미 마계에도 존재하지 않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듯 시안은 달리 묻지 않았다·
“지고의 피를 물려받은 계승체로서 이 땅의 중재자로 살아온 것이 천 년이다· 그 천 년 동안 많은 인간을 봐왔지· 너처럼 신과 계약한 인간도 있었고 성검과 마검 외에 다른 신의 무구를 다루었던 인간도 있었지· 허나 그들의 최후는 대체로 좋지 않았다·”
나겔이 말한 천 년의 시간엔 현재 기록이 지워진 구시대의 역사 또한 명백히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대체로도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부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지· 그들은 신에게 선택받았단 사실을 내심 자랑스러워했지만 아마 죽음의 순간에 전부 깨달았을 거다· 신의 선택은 축복도 은총도 아닌 파멸의 시작을 알리는 저주라는 것을····”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는 뭐지? 늦은 경고라도 할 셈인가?”
“하나 묻겠다 인간이여· 넌 네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설사 신이라고 해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냐?”
“죽일 건데?”
“너희는 피조물이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인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라 보느냐?”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시안의 반문에 나겔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애초에 난 그 잘난 창조주들의 눈엣가시가 된 지 오래야· 나 자체가 살아남으려면 그들을 부정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당신이 가능성 따위를 논할 일이 아니야·”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항해야 하는 존재·
그것이 시안 베르트라는 이름의 인간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멍에였다·
“그렇다면 프루이나로 가보아라·”
“···!”
“그곳에 네가 찾고자 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인계의 북부 혹한의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화이트 엘프의 땅 프루이나·
나겔은 난데없이 시안에게 그곳에서 길을 찾을 것을 제안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날 도와주는 이유가 뭔지 물어야겠지만····”
시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마주하다가도 이내 팔짱을 낀 자세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다른 걸 물어야겠군·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지?”
나겔은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전혀 다를 것 없는 존재라고 본다·”
시안은 멈추지 않고 재차 질문을 이었다·
“나를 데리러 왔던 그 미숙한 드래곤이 말하길 당신 한 9년 전쯤에 인계에 간 적이 있다고 하던데····”
나겔의 눈꺼풀이 살짝 내려앉았다·
“우연찮게도 내가 딱 그 시기에 찾았었거든· 인간과 드래곤 사이에서 태어난··· 용인의 알을 말이야·”
시안은 잠시 말을 멈추며 그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허나 나겔은 처음 약간의 미동만 있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드러내진 않았다·
“왜 더 말을 잇지 않는 것이냐?”
오히려 먼저 재촉하는 모습을 보였다·
“너를 찾으러 왔던 그 아이가 나와 관계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냐?”
“딱히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허나 시안은 답을 듣지 않겠다며 말을 일축했다·
“그럼 내 쪽에서 되려 묻도록 하지· 넌 그 아이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
“사람·”
일말의 망설임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내 곁에서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 그뿐이야·”
“네가 아무리 사람으로 여긴다고 해도 태생부터 갖추어진 본성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신도 방금 말하지 않았나? 인간이고 드래곤이고 전혀 다를 것 없는 존재라면서? 본인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인 거고 드래곤이라고 생각한다면 드래곤인 거다· 난 거기에 어떤 강요도 할 생각 없어·”
그 말에 나겔은 말없이 무언의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에 어떤 뜻이 담겨있는진 알 수 없으나 그리 부정적인 생각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고 멀어지는 그를 나겔은 잡지 않았다·
‘파파는 내 파파일 뿐이에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감히 자신에게 당돌한 말을 내뱉었던 나나의 모습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아른거리는 상황·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겔은 그 모습을 상기하며 홀로 나직이 속삭였다·
* * *
-후우웅
짙은 안개를 거치고 레메아 협곡이 초입이 나타나자 미슈카는 바로 날개를 접고 지면에 안착했다·
“내려! 도착했으니까!”
그러곤 질색한 얼굴로 내게 내리라고 소리쳤다·
“거 되게 툴툴대네·”
“마지막까지 부려 먹은 게 누군데? 진짜 내가 다시 인간이랑 상종하면 드래곤이 아니다!”
“인계가 궁금하면 언제 한 번 또 넘어와· 넘어올 땐 꼭 폴리모프한 상태로 오고 안 그럼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안 가! 죽어도 안 가!”
이미 질리고도 질렸다는 외침과 함께 미슈카는 하늘 위로 쌩하고 도망갔다·
나름 나쁘지 않은 관계였단 생각에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이대로 가도 돼?]
“여기서 할 일은 다 끝났어· 끝난 마당에 굳이 더 남아 있을 이유는 없지·”
[네 할 일 끝났다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닐 텐데? 그 마왕이란 놈이 널 이대로 보낼 거라 생각해?]
“딱히 보내지 않을 이유도 없····”
덤덤히 나아가던 나는 돌연 발길을 멈추고 정면을 응시하였다·
[저거 봐·]
케이람은 그런 나를 보며 보란 듯이 웃음을 흘렸다·
정확히 스무 걸음 앞·
“어딜 그리 급하게 가냐?”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를 마왕이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할 일 다 끝나서 돌아가려는 것뿐이야·”
“끝나? 에쉘 그놈을 먼저 찾기라도 했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마왕은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서서히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하니엘이란 마녀 나한테 왜 넘긴 거냐?”
그러면서 다짜고짜 하니엘을 죽이지 않고 자신에게 넘긴 이유에 대해 물었다·
“에쉘 대신에 죽이고 그만 화 풀어라 뭐 그런 의미였냐?”
“그거야 당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나는 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년이 그러더라? 그 에쉘이란 놈은 이미 마계에 없을 거라고· 찾고 싶으면 인계에 가보라던데? 지금 네가 인계로 부리나케 돌아가려는 걸 보아하니 또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당신도 그놈을 찾아서 넘어가겠다 뭐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말을 뱉은 동시에 즉시 경계심을 세우고 돌발상황에 대비한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그가 다음 말을 어찌하냐에 따라 내 다음 행동이 결정될 것이다·
“그럴 순 없지· 애초에 네놈이랑 처음에 약속했잖아·”
“···?”
“인계로 넘어오지 말아 달라며? 난 한 번 했던 약속은 본성을 저버리더라도 지키는 남자야·”
“진심인가?”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되물었다·
그 10년 전에 했던 약속을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해 지키겠단 건가?
다른 자도 아닌 마왕 당신이?
“물론 그냥 보내겠다는 건 아니야·”
순간 그의 오른손으로 마기가 집약되는가 싶더니 마왕의 절대적 무구 사검이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은 소환한 사검을 나를 향해 겨눴다·
“한 시간· 딱 한 시간만 나랑 놀아줘라· 그럼 그냥 아무 말 없이 보내줄게· 물론 그때까지 네가 살아있단 가정하에 말이지만····”
“최후의 일전이라도 하자는 건가?”
“너도 이대로 끝내긴 아쉽지 않아? 방해꾼이나 말릴 사람도 없는 판에 너랑 나랑 딱 둘이서 재밌게 한번 놀아보자고!”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남자다·
이 판국에 자신과 마지막 일전을 향해 살아남으면 보내준다니·
뭐 다르게 말하면 뒤끝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뜻 아니겠는가?
나로선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조건이기도 했다·
나는 조용히 케이람을 꺼내 사검을 향해 겨누며 마왕의 눈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나쁠 것 없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