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인과응보 (3)
꺼지기 일보 직전의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은 한마디·
에밀리는 번쩍 뜬 눈으로 그녀의 몸을 붙잡은 당사자를 마주하였다·
“도 도련님?”
시야가 조금 흐릿해지긴 했어도 틀림없었다·
그는 이 세상의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도련님이자 주인·
시안이었다·
-후우웅
몸을 받치지 않은 그의 나머지 한 손에 마나와 안개가 뒤섞이며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은 구체를 시안은 과감하게 에밀리의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구체는 그대로 쑤욱 하고 빨려 들어갔다·
“석션(Suction)!!”
5성급 어둠 속성 고유 마법 ‘흡수’·
대상의 몸 안에든 독이나 불순물을 빨아들여 자신의 몸으로 이동시키는 마법으로 시전자의 희생을 통해 대상을 치료 및 정화하는 마법이었다·
“안 돼요 도련님! 그러면 도련님 몸으로 독이···!”
“상관없어·”
에밀리는 만류했지만 시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독을 계속 빨아들였다·
기어이 독을 전부 흡수한 시안은 머리가 핑 돈 나머지 살짝 주춤거렸다·
허나 쓰러지진 않았다·
대신 바닥에 탁하고 침을 뱉었고 침에는 빨아들인 독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괘 괜찮으세요 도련님?”
“이 정도론 어림도 없어·”
마수의 피로 다져진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육체이기에 그리 큰 타격은 없었다·
시안은 붙잡았던 에밀리의 몸을 살며시 놓아주었으며 그녀는 바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멍한 시선으로 시안을 응시하였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저를 어지간히도 잃기 싫으셨나 봐요?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오신 걸 보면?”
“너 아니면 누가 내 뒷바라지를 하겠냐?”
“그렇긴 하죠·”
에밀리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뚝
그런데 어째서인지 바닥에 물 한 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얼굴에 손을 대보니 양쪽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안은 그런 에밀리에게 말없이 망토를 덮어주었다·
“마 망토 상태 좀 봐! 얼마나 돌아다니셨으면 이렇게나 헤진 거예요? 돌아가면 바로 수선해야겠어요!”
“그러던지·”
시안은 마음대로 하라며 이내 에밀리를 뒤로한 채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그가 지나가자 에밀리는 혼잣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저 말고 누가 도련님의 망토를 수선하겠어요?”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마음과 함께 에밀리는 시안의 망토를 꼭 부여잡았다·
“이겼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니엘은 다가오는 시안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당신의 행동은 결국 이 세상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일입니다! 제 아들이 해야 할 일을 더 늘리는 것뿐이라고요!”
인간이 벼랑 끝에 몰리면 항상 남발하게 되는 처절한 절규·
시안에게는 이런 상황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머지않아 당신의 사람들도 후회할 겁니다! 옳지도 않은 사람을 구원자랍시고 따랐던 본인들의 무지함을!”
하니엘은 악에 복받친 상태로 시안을 계속해서 나무랐다·
시안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녀를 덤덤하게 내려보았다·
“그놈의 질서· 당신은 뭣 때문에 그리 집착하는 거지?”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지겹게 들어온 그 말·
하니엘은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난 그저 인간으로서 충실하게 본능을 좇으며 살았을 뿐이에요!”
이에 시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사람이 살기 위해 배를 채우고 잠을 자며 욕망을 채우듯! 나 역시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그 긴 시간을 살아온 겁니다! 이 더러운 피를 몸속에 지닌 채!”
하니엘은 팔꿈치 사이로 흐르는 핏줄기를 시안에게 보란 듯이 내보였다·
“이걸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 아들이 저의 구원자가 아직 살아있는 한! 이 세상은 시안 베르트 당신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구원자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그 한마디에 하니엘은 바로 입을 멈췄다·
“당신이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구원자라면 이 상황에서 당신을 구해주기 위해 와야 하는 것 아닌가?”
허나 그 구원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니엘은 하다못해 그가 곧 있으면 올 거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이미 아는 모양이군· 그 구원자가 너를 구하러 오지 않을 거란 것을····”
어떠한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상황·
악에 복받쳤던 하니엘의 얼굴은 곧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시안은 그대로 케이람을 뽑아 그녀에게 겨눴다·
하지만 겨누기만 할 뿐 별다른 집행이나 심판은 하지 않고 그녀를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결국 검을 집어넣는가 싶더니 몸을 돌려 에밀리에게 향했다·
“···?”
자신을 처단하지 않은 것에 하니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밀리 역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허무하게 돌아온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냥 가실 거예요?”
“어·”
“하지만 저 여자로 인해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기사들이 불행한 일을 겪었어요· 도련님을 포함해서요· 정말 그냥 가셔도 되겠어요?”
“지금 네가 생각했을 때 저 여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보복이 뭐일 것 같아?”
난데없는 질문에 에밀리는 잠시 당황했다·
“아마 보여주는 거겠죠· 자신이 그토록 믿었었고 바랐었던 뭔가가 처참하게 망가지는 모습을····”
“맞아· 근데 지금 내겐 그 뭔가가 없어·”
에밀리는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지금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난 성에 차지 않아· 그럴 바엔 건드리지 않는 것만 못하지·”
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에밀리를 부축해 현장을 벗어났다·
홀로 남겨진 하니엘은 멀어지는 그들의 뒤를 허탈하게 바라보다가도 하늘을 향해 또 한 번 광소를 남발했다·
“캬하하하! 정말 어리석군요! 내가 이대로 자멸할 거라 생각했나요? 난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뜨겁게 흐르는 자신의 피를 보며 아직 현혹의 힘이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단 제 아들부터 되찾을 겁니다! 그 이후엔 진정한 마녀로서의 힘을 보여 드리지요! 이번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
“마녀?”
빠르게 차오르던 열기를 한순간에 식히는 서늘한 목소리·
하니엘은 근육과 신경이 얼어붙은 나머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네가 마녀였구나? 그 에쉘이란 놈에게 펜던트를 주고 날 분노하게 해서 인계를 침공하게 하려고 했던 그 장본인이란 말이지?”
목소리의 주인은 바닥에 널브러진 펜던트를 주워 그녀에게 보란 듯이 내보였다·
하니엘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하였다·
마왕 벨카리온·
시안에 이어 이번엔 마계의 최강자가 그녀에게 나타났다·
“난 말이지 이제껏 몸이 힘든 것보다 정신이 힘들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됐어· 정신이 힘들어봤자 뭐 얼마나 힘들다고? 그래 봐야 다 버틸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지·”
-콰직
그의 손에 쥐어졌던 펜던트는 곧 형체도 없이 부서져 버렸다·
“근데 니들 때문에 내가 아주 제대로 경험했다·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런 귀중한 경험을 해준 니들에게 나도 보답을 해줘야 하지 않겠어?”
서서히 검붉은 마기에 잠식되기 시작한 주변 일대·
하니엘은 저항은커녕 도망조차 가지 못했고 그저 몸만 하염없이 떨었다·
“그래! 다시 경험하지 못할 최악의 고통을 선사해 줄게!”
“···!”
“나 베스티 그리고 마계의 주민들이 느꼈던 고통까지 전부 더해서 다음 생에도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의 극악무도한 고통을 말이야!”
인적없는 숲속엔 누군가의 처절한 고통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지만
“에쉐에에엘!!”
그녀를 위한 구원의 존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 *
지나왔던 방향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지금 간다고 해봐야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어울리지 않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차에 에밀리가 날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딱히 널 찾으려고 갔던 건 아니야· 갔는데 그냥 우연히 찾은 거지·”
“난 또· 절 찾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줄 알았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에밀리는 계속해서 내 눈치를 봤지만 나로선 딱히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실 거예요?”
“뭘 물어봐야 되는데?”
“그냥 뭐 여러 가지요· 제가 그 여자랑 무슨 관계였는지 여긴 어떻게 오게 됐는지 도련님을 여태 속인 이유가 뭐였는지 등등····”
“말하고 싶으면 말해·”
나는 마음 가는 대로 하라며 부담을 덜어주었다·
어찌 말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에밀리는 마침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도련님을 위해서 그랬어요·”
“그래· 그거면 된 거지 뭐·”
“믿어주시는 거예요?”
“안 믿을 이유는 없으니까·”
“생각보다 너무 덤덤하신 건 아니에요? 전 크게 한 소리 들을 줄 알고 엄청 긴장했었단 말이에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한 소리를 들어?”
내 한결같은 반응에 그녀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하니엘님의 말대로 전 그 사람에게 거둬진 길고양이예요· 베르트 공작가에 들어와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도련님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을 감시하는 일을 했었죠· 하니엘님은 그러면서 누가 에쉘 도련님에게 도움이 되고 또 위협이 될지를 가려내라 했어요·”
“난 뭐였는데?”
“도련님이야 뭐 처음엔 이도 저도 아니었죠· 일단 힘이 있어야 도움이 되든 위협이 되든 할 텐데 도련님은 열 살 때까지만 해도 그냥 무능아 취급을 받았잖아요·”
뭐 그랬기야 했지·
나도 모르게 뺨을 긁적였다·
“근데 갑자기 변하셔서는 크란츠 도련님을 죽도록 패질 않나 갑자기 전선에 가고 싶다며 공작님께 선언하질 않나 전 진짜 완전 다른 사람이 된 줄 알았다니까요?”
검술 대련에서 크란츠를 반죽이고 돌아왔을 때 봤던 에밀리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게 그려졌다·
“제 마음이 변했던 시기도 아마 그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부정적인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발전하려는 도련님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죠· 그러면서 결심했어요· 제가 모실 도련님은 이 세상에서 시안 도련님 단 한 명뿐이라고· 왠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나는 적당히 수긍만 해 줄 뿐 그 이상의 반응은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난 이미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니·
“내 방 청소는 왜 하고 간 거야?”
“아 그건· 왠지 그때 아니면 다시는 못 할 것 같아서····”
“참 너답다·”
에밀리는 배시시 웃다가도 그게 무슨 의미냐면서 쌍심지를 키며 물었다·
나는 말없이 침묵으로 응답했으며 그렇게 실랑이가 오가는 사이 저 앞에 날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이 보였다·
“에밀리 언니!”
나나가 가장 먼저 달려와 에밀리에게 안겼다·
“안 죽고 살아있었네요! 다행이다!”
“너 그게 할 소리야?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다녔는진 알아?”
“나 에밀리 언니랑 한 약속도 철저하게 지켰어요! 언니가 누구인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다녔어!”
“말 안 한 건 둘째치고 황녀님을 여기로 데려오면 어쩌자는 거야? 아오 진짜! 브라이언 그 바보 같은 남자는 대체 뭘···!”
익숙한 실랑이가 오가는 사이 아린 황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에쉘 그 남자는 찾았어?”
“못 찾았습니다· 다만 마계엔 없는 건 확실합니다·”
아까 현장에서 느낀 기운을 바탕으로 대충 어디 있는지도 알 것 같긴 하나 딱히 그녀에게 알릴 필요는 없겠지·
“그럼· 우리가 여기 있을 이유는 없다는 거네?”
“맞습니다· 이 길로 황녀님은 돌아가십시오· 저 역시 바로 뒤따르겠습니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황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나는 돌아선 황녀를 다시 불러 그녀에게 받았던 아버지의 검을 돌려주었다·
“이건 왜?”
“그 검은 현재 아버지 아니 베르트 공작이 이 세상에 없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그러니 그 검을 가지고 세상에 알려 주십시오· 대륙의 수호자의 명예로운 죽음을····”
“그래 그렇게 할게·”
황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늦지 않게 오세요· 제가 다시 마계로 오는 꼴 보고 싶지 않으시면····”
루나브의 경고 아닌 인사를 끝으로 그녀들은 전부 나나의 몸에 태워진 채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녀들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모습을 본 후에야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다 갔어· 이제 나와·”
“쳇· 하여튼 눈치는 빨라 가지고·”
그러자 뒤쪽에 숨어 있던 미슈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겔님이 좀 보자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