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황녀의 순방 (3)
“야생의 마수가 아닙니다· 어딘가에 강제로 구속되어 있던 마수들입니다·”
황군의 정예 기사와 특별한 수행원들로 모인 순방단인 만큼 헬하운드의 토벌 정도는 손쉽게 이루어졌다·
토벌 후 헬하운드의 사체를 확인하던 루나브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마법으로 소환된 마수들도 아니에요·”
“그럼 그 말은 곧····”
“누군가가 협곡의 마수들을 잡아다가 의도적으로 풀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순방단 전체가 당혹을 금치 못한 상황·
일부 기사들은 사체로부터 풍겨오는 악취에 코를 움켜쥐었다·
“벨리아스 행을 속히 재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출발하면 언제쯤 도착할까요?”
“아무리 늦어도 새벽쯤이면 벨리아스 성문엔 이를 겁니다·”
어차피 마수의 습격을 받은 이상 그 흔적과 냄새로 인해 또 다른 마수나 짐승들을 유인하게 될지도 모를 일·
그런 위험한 장소에 캠프를 차릴 만큼 무모한 짓을 할 순 없었다·
“순방단의 총책임자로서 명합니다· 지금 당장 벨리아스 행을 재개하겠습니다!”
순방단은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순방단의 마차는 다시 운행을 재개했으며 달빛을 길잡이 삼아 쉬지 않고 이동했다·
그렇게 어두운 밤의 장막이 걷히고 동쪽 하늘에서 새벽 어스름이 시작될 무렵·
순방단은 벨리아스 성문에 이르게 되었다·
본래 예정된 도착 시간보다 훨씬 더 이른 시간이었지만 성문 앞엔 순방단을 맞이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아린은 사열한 기사들 앞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수호의 영지 벨리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벨리아스의 기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황녀에게 예를 표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잠시 몸에 쌓인 피로를 푸시는 게 어떻습니까? 황실 저택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피로나 풀자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지금 당장 베르트 공작에게 안내해주세요·”
아린은 기사의 권유를 거절한 채 바로 공작과의 만남을 요구했다·
이에 기사들은 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순방단을 영지 안으로 안내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영지민들은 거리로 나와 순방단의 방문을 환영해주었다·
변함없는 건물과 거리·
다른 영지나 도시들보다 훨씬 더 삼엄한 경계·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겉으로 봤을 땐 아린이 10년 전에 봤었던 벨리아스 본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편 아린의 뒤를 따르던 수행원 중에선
“이런 걸 묻기도 좀 그렇지만 벨리아스는 다른 영지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영지 아니었습니까?”
유독 영지민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슈르츠가 루나브를 보며 물었다·
“꼭 그렇진 않을 거예요· 아무래도 영지 운용비의 대부분을 전선 유지에 쓰는 곳이다 보니 자금 축적이 원활하진 않을 테니까요·”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 가난한 도시는 아니었다·
영지 운용의 절반 이상이 군수 자금에 지출된다곤 하나 벨리아스는 제국 내에서도 자금 운용이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곳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영지민들이 굶거나 입에 거미줄 치는 일은 대체로 없었으며 곡물 생산량도 적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요?”
“그것이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슈르츠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을 이었다·
“영지민들의 상당수가 며칠은 굶은 것처럼 보입니다·”
태생부터 부족함 없이 자라온 황가나 귀족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근본 없는 하층민 출신의 슈르츠로선 확연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까지·
영지민들 얼굴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아의 흔적들이 곳곳에 서려 있었다·
허나 따로 의견 제기를 하진 않은 채 일단은 순방단을 따라 이동했다·
황녀의 순방단은 곧 머지않아 경계문 앞에 이르렀다·
경계문 양옆으로 길게 뻗은 석벽 또한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은 웅장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이곳에서 베르트 공작이 순방단을 맞이하는 것이 절차이고 예의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황녀님·”
기사는 걸음을 멈지 않고 순방단을 경계문 너머까지 인도하려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이에 분노한 아린이 발을 멈추고 전선의 기사들을 쏘아붙였다·
“베르트 공작은 어디 있나요?”
“경계문 너머 후방 캠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사는 당황하는 기색 일절 없이 차분하게 답을 이었다·
“순방단의 총책임자로서 명합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베르트 공작을 데려오세요!”
순간 주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으며 잔잔하게 불던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이 된 것처럼 장내를 갈랐다·
전선의 기사들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에 아린은 가슴 한편에 품고 있던 황제의 임명서를 당당히 내보였다·
“전 숭고해 마지않은 제국의 황제 아바마마를 대신해서 이 순방의 총책임자로 왔습니다· 베르트 공작은 아바마마께서 오실 때도 아바마마가 아닌 다른 형제들이 순방을 올 때도 항상 경계문 밖에서 순방단을 맞이했다고 들었어요”
이는 1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저라고 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저와 황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베르트 공작은 지금 바로 경계문 앞으로 나와서 제게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전하세요· 사과를 받기 전까진 우리 순방단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아린의 태도는 확고했다·
자신은 엄연한 황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대리인·
그러니 황제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맞다·
예상치 못한 황녀의 대응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기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황녀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러곤 이 또한 묵묵히 받아들이려는 듯 공작을 데려오기 위해 일부 기사들이 경계문 안으로 향했다·
아린과 순방단은 앞서 말한 대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후
경계문 너머로 다수의 기사들과 함께 베르트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황실의 방문으로 인해 지금 영지의 모든 시선은 순방단에 집중되어 있을 터·
즉 시선이 집중되지 않은 다른 쪽은 경계가 상대적으로 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경계가 덜하다는 거지 아예 없다곤 할 수 없겠지만·
이건 뭘까?
여긴 다른 곳에 비해 경계가 압도적으로
삼엄하다·
못해도 중대급의 병력·
지금쯤 황녀의 순방단이 있을 경계문 쪽에 상주한 병력과 비슷한 수준이다·
[저택이 아니라 요새 수준인데?]
케이람은 아예 감탄까지 자아내며 감흥을 표했다·
내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베르트 가의 저택·
어릴 적 내가 살고 자랐던 고향 집에 왔다·
전선 기사들의 이목이 순방단 쪽에 끌려 있는 틈을 타 무언가를 확인할 목적으로 온 것이지만
이건 내가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다·
일단 내가 알기론 저 집엔 지금 공작부인 마가렛과 그녀의 아들 크란츠가 살고 있다·
허나 겨우 그 둘을 지키겠답시고 이리 경비 병력을 늘렸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즉 다시 말하면 그 둘 외에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저택 안에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나로선 돌아갈 이유가 없기에 바로 저택 후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후문 쪽에도 다수의 기사들이 순찰 중이었지만 그래도 정문만큼 못 뚫을 수준은 아니었다·
기사들의 순찰 동선을 1분여 정도 확인하고선 5초 정도 생긴 빈틈을 이용해 저택 안으로 신속하게 잠입했다·
오랜만에 맡는 고향 집 냄새는 눈물이 날 만큼 향기롭다던데 어째 내 코엔 칙칙한 누린내밖에 나지 않았다·
경비가 삼엄했던 저택과는 반대로 저택 안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살며시 복도 쪽으로 나와 분위기를 살펴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대체 그 많고 많던 시녀와 시종들은 어디로 갔던 말인가?
공작가의 저택이 아닌 유령의 저택이라 해도 믿을 만큼 스산함이 넘쳐났다·
일단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도착한 익숙한 방문 앞·
공작부인 마가렛 에르제스의 방이었다·
살며시 문에 귀를 대보니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조심스레 문까지 두드려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이에 직접 들어가 보고자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
위험을 감지하고선 바로 한걸음 물러났다·
마력이다·
종이 한 장 정도의 얇은 문틈 너머로 마력의 기운을 흘러 넘어왔다·
즉 지금 공작부인의 방안엔 제한 결계가 처져 있다·
그것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진·
이렇게 되면 더더욱 안 들어갈 수가 없다·
뭔가를 숨겼다는 걸 이리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을까?
허나 술식이 워낙 복잡하게 짜여진 탓에 순수하게 마력으로 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그냥 결계 자체를 부숴버리는 거지만
그럼 몰래 잠입한 보람이 없어져 버리겠지·
-저벅저벅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인기척과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난 재빨리 복도 반대쪽 모퉁이로 꺾어 몸을 숨겼다·
그러곤 지그시 고개만 옆으로 젖힌 채 다가오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해 보았다·
무장한 다섯 명의 기사들과 그사이에 자리한 낯선 금발의 여인·
어디서 본 적이 있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없다·
나로선 초면인 여자다·
베르트 공작가에 저런 여자가 있었던가?
그들은 곧 공작 부인의 방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으며 기사들은 곧 여인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려는 듯 옆쪽으로 몸을 내뺐다·
그러자 앞으로 나선 여인의 손에서 빛과 함께 백색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결계를 풀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마나를 발현한 지 10초도 되지 않아 결계를 완벽히 풀어냈다·
그러곤 세 명의 기사와 함께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두 명의 기사는 문밖에서 대기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저 복잡한 결계를 무슨 땅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푸는 걸 보니 아무래도 결계를 만든 장본인인 것 같은데·
순간 저택 밖의 저 수 많은 병력이 지키려 하는 존재가 방금 저 여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쩌겠어? 확인해 봐야지·
여인이 다시 나올 순간을 노리기 위해 잠자코 지켜보던 순간
“흐으····”
돌연 복도 다른 쪽 방향에서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
“들었지?”
[어·]
나도 케이람도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건 분명 고통을 동반한 누군가의 신음 소리·
나는 자연스레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윽고 이어진 복도 끝에 위치한 낡은 방 앞에 도착했다·
내 기억상 이곳은 가재도구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는 방이었다·
앞선 방과 마찬가지로 살며시 문에 귀를 대보니
“흐으····”
이전보다 더 선명한 신음이 들려왔다·
공작부인의 방과 다르게 이곳은 제한 결계가 서려 있지도 않았다·
나는 한 번 더 주변을 살핀 뒤 잽싸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쌓여 있는 가구와 가재도구들을 제치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니
곧 먼지에 휩싸인 채 온몸이 묶여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누 누구야?”
내가 온 것을 인지한 듯 그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헝겊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목소리를 통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즉시 그에게 다가가 헝겊을 벗겨 주었다·
“···!”
놈은 나를 보고선 놀란 토끼처럼 눈을 번뜩였다·
누가 보면 귀신이라도 본 줄 알겠군·
“뭐야? 너 설마 시안이냐?”
“목소리 낮춰· 목 졸라버리기 전에·”
피가 섞인 형제이긴 해도 나로선 딱히 친한 척 하고 싶지 않은 베르트 가문의 넷째·
크란츠 베르트였다·
“질문은 네가 아닌 내가 한다· 먼저 입 열지 말고 얌전히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그의 목을 붙잡고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니 그는 삐질 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 못 보던 여자가 있던데 그 여자 정체가 뭐야?”
저택이 왜 이리 조용한지 이놈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그런 쓸데없는 걸 하나하나 물어볼 필요는 없다·
그냥 간단하게 이거 하나만 물어보면 되겠지·
크란츠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선 입을 열었다·
“너 에쉘 형님이 너 때문에 벨리아스로 온 건 알고 있지?”
굳이 나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저의가 궁금하긴 하나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지·
“형님이 벨리아스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온 사람이야!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고!”
그래서 대체 누구란 건데?
한 번 더 딴소리하면 바로 목을 조르겠다고 생각한 와중
-저벅저벅
또다시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끼릭
더불어 문을 여는 소리까지·
또 다른 누군가가 이 방 안으로 찾아온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