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조력자들 (1)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레미하람?”
“별생각 없는데? 너나 나나 주인 말을 따라야 하는 처지에 무슨 생각을 더 하겠어?”
“당신도 느꼈을 거 아닙니까? 그날 루멘델님께서 기어이 인계로 내려오셨어요! 그게 뭘 뜻하는진 당신이 더 잘 알 거 아닙니까?”
“뭘 안다고 해서 그게 막을 이유가 되는 건 아니잖아? 우리 숙녀님께서도 딱히 원하는 일은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우리가 뭐 언제는 서로 같은 미래를 보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잖아?”
날 선 눈초리를 빤히 세우고 있는 히스크레아와 그런 성서를 여유롭게 보고 있는 마서 레미하람·
히스크레아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연신 레미하람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주인을 설득해서 마검의 주인을 배척하십시오! 그럼 최소한 당신들의 존재가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아 글쎄 그러고 싶어도 못 그런다 그러네? 넌 모르겠지만 우리 숙녀님 보통내기가 아니라니까? 저 고집은 내가 아니라 신이 와도 못 꺾을 고집이야·”
레미하람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며 고래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벅저벅
“어이구야· 벌써 오나 보네·”
그러다 공간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니 레미하람은 허둥지둥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곧 가지각색의 책과 책이 꽂힌 책장들이 즐비한 공간을 지나
루나브와 슈르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 중이셨나요?”
“아니야!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어!”
레미하람은 바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딱히 편한 공간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나름 지낼 만하신가 보죠?”
“····”
히스크레아는 대답 대신 눈을 치켜올렸다·
루나브는 개의치 않고 그의 본체인 성서에 손을 얹은 뒤 마나를 발현했다·
-기이잉
곧 마력에 반응한 성서에서 검은빛이 일었고 히스크레아는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도 힘이 빠져나간 듯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 마서의 주인이시여· 저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슨 기회 말인가요?”
“당신에게서 탐구자의 냄새가 납니다· 배움을 염원하고 이 세상의 진리를 갈구하고자 하는 그런 탐구자의 냄새 말입니다· 당신도 당신이 생각하는 진리가 이 세상에 실현되기를 원하실 거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루나브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히스크레아님의 원래 주인은요?”
“그자는 실패했습니다· 주어진 미래로 이끌지 못한 실패자를 소유주라고 따를 이유는 더더욱 없지요!”
“매정하시네요·”
루나브는 짤막한 한마디를 끝으로 몸을 돌렸다·
“제가 주인을 버리고 도망친 당신을 손수 이곳으로 이끈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
“당신의 존재 자체가 저는 둘째치더라도 선배에게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물며 그런 위험한 당신을 제가 다룬다니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할 순 없죠·”
히스크레아는 기가 찬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무엇이 어리석은 일인지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이미 당신이 말하는 그 마검의 주인에겐 수많은 적이 생겼습니다! 그걸 고작 당신들 둘이서 감당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저야 모르죠· 아직 해보질 않았으니까·”
루나브는 언제나 그렇듯 덤덤한 기색을 보였다·
“결국 당신도 선배와 저에겐 적에게 불과해요· 그러니 더 이상 나대지 마시고 제 공간에서 쭉 휴식을 취해주세요·”
루나브는 그 말을 끝으로 슈르츠와 함께 공간을 떠났다·
남겨진 히스크레아는 분노와 설움에 울부짖었다·
“내가 말했잖아· 쉽게 꺾을 수 없는 고집이라고·”
레미하람 역시 그 말을 끝으로 루나브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루나브와 슈르츠는 아공간을 나와 다시 인계에 발을 내디뎠다·
“저 성서라는 것을 이대로 놔둬도 되겠습니까?”
“아무의 손에도 닿지 않게 제가 직접 관리하는 것·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에요·”
루나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저 성서의 말도 일리는 있어요· 선배에게 생긴 수많은 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저 역시 선배를 위한 아군을 만들어야 할 거예요·”
그러면서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별로 내키지 않지만 그 사람에게 전언을 보내야겠네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있어요· 감기라도 한 번 걸리면 맥을 못 추는 바보 선배라고····”
* * *
“왕자님! 왕자님!”
간절히 불러도 반응 없는 당사자·
이에 시종은 목이 떨어질세라 고개를 돌리며 왕자를 찾기에 이르렀다·
“아이고! 왜 하필 계셔도 또 저런 곳에?”
이윽고 그를 발견한 종자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목이 터지라 불러봐야 저기선 듣지도 못할 왕자이기에 종자는 하는 수 없이 그가 있는 곳으로 힘없이 발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후·
왕자가 있는 곳에 도착한 시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따지듯이 말했다·
“왕자님! 수련하시는 건 좋지만 제발 평범한 곳에서 해주십시오! 자꾸 이런 곳에 계시면 제가 찾아오기 곤란합니다!”
어림도 없다는 듯 왕자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평범한 곳에서 하면 평범한 수련밖에 더 되겠냐? 특별한 곳에서 하는 특별한 수련을 해야! 가치가 있는 법이지!”
특별하다는 말과 다르게 지금 왕자가 하는 수련은 아주 평범한 팔굽혀펴기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수련을 하는 장소가 무려 지상으로부터 위로 100m나 뻗은 사각추(四角錘) 형태의 유적 꼭대기라는 것이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몸이 수천 바퀴는 충분히 구를만큼 경사도 매우 가팔랐다·
“그래서 왜 왔는데?”
“아! 최근에 우시프 제국에서 아주 엄청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국에서? 뭐 내전이라도 일어났대?”
“비슷한 것 같습니다· 5황녀 아린 세벨러스가 무려 미스트에게 납치를 당했었는데··· 우와왓!”
전언을 읽으려던 시종은 깜짝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갈 뻔한 몸을 간신히 붙잡았다·
뒤도 안 돌아보고 수련에 집중하고 있던 왕자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와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납치를 당해?”
“그 그러니까 그게····”
시종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뒤 제국에서 있었던 일을 왕자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왕자는 급기야 기가 찬 듯 혀를 내둘렀다·
“나 참! 7년 만에 나타나선 또 화려하게 일을 저질러 줬구만! 그런 재미난 일을 하면서 난 왜 안 끼워준거야?”
“그 그게 무슨 망언이십니까 왕자님!”
시종은 손사래를 치며 질색을 표했다·
“그 반대쪽 손에 있는 건 뭐야?”
왕자는 시종의 반대쪽 손에 든 또 하나의 서신을 가리켰다·
“아! 이건 왕자님 앞으로 온 편지입니다!”
“편지? 나한테 개인적으로 편지 보낼 사람이 있었던가?”
왕자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편지를 받아 곧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킥!”
편지를 개봉한 지 10초도 되지 않아 튀어나온 외마디 웃음·
“이 후배님도 참 여전하네·”
이내 왕자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간만에 외출이나 해야겠다! 왕성엔 알아서 전해줘!”
그러곤 일 초의 망설임 없이 꼭대기에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와 왕자님! 어딜 가시는 겁니까!?”
“우시프 제국~!”
“가시는 건 좋은데 저는 좀 내려주고 가십쇼 세트 왕자님!!”
시종의 간절한 구원 요청이 사방에 아련하게 퍼졌지만 세트 왕자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 * *
색이 보이지 않는 흑백의 하늘·
그녀는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이 현실이 아닌 꿈속이라는 걸 단번에 인지했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종종 꿈을 꾸곤 했다·
생기 한 점 없는 흑백의 전경과 그 중심에 홀로 서 있는 검은 머리의 남성·
남성의 몸엔 미지의 검은 안개가 감돌고 있었다·
그 주위엔 이미 목숨을 잃은 수많은 시체가 즐비했으며 전부 그에 의해 목숨을 잃은 듯 보였다·
그런 남성의 머리 위엔 세상의 모든 어둠을 밝힐듯한 찬란한 빛이 내리고 있었다·
허나 그 빛은 절대 남성을 구원하거나 찬미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학살의 현장에 홀로 선 그를 비난하고 규탄하려는 듯
굉장히 위협적인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이 그를 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에 여인은 생각했다·
자신이 당장 달려가서 그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힘껏 달려가 공허한 그의 손을 잡아주려는 순간·
“···!”
그만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흡!”
자신이 물속에 있음을 깨달은 여성은 황급히 손을 휘저어 몸을 움직였다·
-푸확!
곧 물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슴을 붙잡으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축하한다· 최장 시간을 돌파했구나·”
이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색 빛의 정령이 무심한 목소리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좋은 꿈이라도 꿨던 거니?”
“모르겠어요· 매번 이렇게 손을 잡을 때마다 끝나버리니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네요·”
그녀는 아쉬운 마음에 이마를 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신수(神水)에 빠져 있는 동안 저 먼 곳에서 재밌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재밌는 일이요?”
“그래· 네 동생과 관련된····”
동생이라는 말에 여인은 눈을 부릅뜨며 금세 정령 앞으로 달려갔다·
정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빛으로 바로 옆에 자리한 바위 위를 가리켰다·
그곳엔 우시프 제국 황실의 인장이 찍혀있는 공문이 놓여있었다·
공문을 읽은 여인은 이내 복잡미묘한 감정이 서린 얼굴로 다시 정령을 돌아보았다·
“그런 얼굴로 날 볼 것 없다· 내가 늘 말하지 않았니? 네가 만족하는 순간이 오면 떠나도 상관없다고·”
“····”
“뭐 네 얼굴을 보니 아직 만족을 느끼진 못한 것 같지만····”
여인은 급기야 공문을 구기며 쓰라려 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7년 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전 또 그 아이의 곁에 없었네요·”
“그 아이도 딱히 네가 있기를 원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정령은 애먼 걱정이라며 그녀를 타이르려는 듯싶었지만
“제가 원하지 않는 일이에요!”
여인의 얼굴은 이미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요·”
그러곤 새롭게 마음을 다잡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추슬렀다·
“이제는 그 아이의 곁으로 가줘야 해요· 그만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마리안님!”
“그리 비장하게 말할 것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보내줄 것이니· 다만 떠나기에 앞서 이거 하나만큼은 말해줘야겠구나·”
-피이잉
순간 오색 빛을 일렁이는 정령의 몸에서 더 큰 광채가 솟아올랐다·
광채는 곧 주변 전체를 아우를 만큼 크게 번져 나갔으며 이내 빛은 사라지고 광채가 있던 자리에 광활한 신기를 내뿜는 순백의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은 굳건히 서 있는 여인에게 긴 얼굴을 들이밀며 웅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그 아이를 돕는 순간 빛의 신을 비롯한 많은 지고의 존재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 거니?”
“네! 상관없어요!”
여인은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듯 바로 응답했다·
“그 아이로 인해 구원받은 목숨이에요! 그러니 그 아이를 위해 쓰는 게 당연하죠! 설사 이 세상 전부가 그 아이를 적으로 돌린다 해도 전 끝까지 지켜줄 거예요!”
“참으로 확고하구나· 정말 처음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그게 누나로서 해야 할 도리니까요!”
마치 수천 수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순수한 물의 흐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더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드래곤은 바로 날개를 펼쳤다·
“가자꾸나· 엘리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