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안개의 질서 (1)
검은 안개의 기운이 만연한 또 하나의 아공간·
공간의 주인은 평소처럼 제단에 앉아 자신을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탁탁
잠시 후 복도 저 너머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
기척을 인지한 아에르는 이내 생각했다·
정확히 1초 뒤에
자신의 멱살이 붙들릴 거라고·
-꽈악!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1초가 지난 순간 그의 멱살이 붙잡힘과 동시에 한 인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추방자이긴 하나 그래도 한때는 신이었고 아직 그 힘을 보유하고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 올린 당돌한 인간은 바로
아에르의 계승자인 시안이었다·
시안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할 만큼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뭐라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아에르는 개의치 않고 유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시안은 아에르의 멱살만 하염없이 붙들 뿐 뭐라 말을 잇진 못했다·
(너에게서 시리카의 잔재가 느껴지는구나· 마지막까지 모든 걸 넘겨주고 떠났어·)
시안의 몸에선 이전보다 더 방대해진 안개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 말이라도 하지 그러냐? 분명 내게 오기 전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을 거라 보는데?)
아에르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시안 다물어진 입을 좀처럼 열지 못했다·
(루멘델이 있는 곳을 묻고 싶은 것이냐?)
“····”
(아님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너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하고 싶은 것이냐?)
“····”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화풀이를 하러 오기라도 한 것이냐? 루멘델이 직접 나선 상황에 왜 나는 나서질 않았는지 원망하는 것이냐?)
시안은 그 무엇 하나 묻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그저 흔들리는 손으로 그의 멱살을 붙잡은 채 시선만 굳건히 마주할 뿐이었다·
(난 그저 너희에게 똑같이 했을 뿐이다·)
그의 몸을 휩싸이고 있던 안개가 걷히며 감춰져 있던 그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무심한 표정·
아에르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7년 전 네가 브레누에 아무도 오게 하지 말라는 부탁을 내가 들어줬던 것처럼 이번엔 그 아이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다· 만약 일을 진행하다 자신이 죽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절대로 나서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말이다·)
“····”
(그게 뭐 문제라도 되는 것이냐?)
시안은 급기야 사방을 향해 괴성을 남발했다·
(이제와 말해봐야 의미는 없겠지만 난 말렸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거라고 했지·)
아에르는 자신 역시 편치 않았다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는 부정하더구나· 그러면서 말했다· 너한테 동기가 필요하다고· 나약해진 마음을 다잡을 동기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 역할을 자신이 수행해주고 떠날 거라 했다·)
“왜? 뭐 때문에?”
침묵을 유지하던 시안이 마침내 입을 열고 물었다·
“대체 왜? 내가 뭐라고? 이기적이면서도 당돌하기 그지없는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날 위해서 그 사람이 죽어야 했던 건데!!!”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세상 무심하면서도 간단한 대답이었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내게 뭐라 했는지 아느냐?)
“···?”
(살기 싫다고 했다·)
“뭐?”
시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음을 던졌다·
(귀족가의 장녀로 태어나 남 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내게 살기 싫다고 말했다· 의문이 없는 무지한 신뢰만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러면서도 모두에게 의문을 심어주고 싶다 했지·)
무조건적인 신념은 도태로 가는 지름길·
항상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의심하고 부정해야지만이 인간은 나아갈 수 있다·
이걸 일찍 깨달았던 시리카는 이 진리의 실천을 위해 아에르를 추종했고 미스트를 이끌어 왔다·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론 부족할 터이니 만약 그걸 이행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원해줄 것이라 했다·)
-턱
(이제 알겠느냐? 이것은 시리카 그 아이의 아주 오랜 바람이었다는 것을···· )
줄곧 가만히 있던 아에르가 이제는 똑같이 시안의 멱살을 붙잡으며 물었다·
(네놈이 슬퍼하고 분노할 게 아니야!)
덤덤했던 눈초리도 점점 날카로워지기 시작했으며 목소리 또한 고조되어 갔다·
(너는 내 앞에서 직접 말했다· 나를 도와 이 세상의 질서를 바꾸겠다고! 그 다짐을 한 시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냐?)
시안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난 지금껏 나를 따랐던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죽음을 봐왔다! 그저 나를 따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죽어야 했고! 난 그 모습을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봤단 말이다!)
인간은 신이 가진 성정을 답습한 피조물·
시안이 현재 느끼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아에르는 그 전부터 훨씬 더 많이 접해오고 느껴왔었다·
(시리카에게 있어 너는 무척 소중한 존재였을지 몰라도 내게는 아니다! 넌 그저 내 앞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를 그 수많은 아이들 중 한 명에 불과해!)
잠시 치솟았던 감정을 이제는 억누르려는 듯
아에르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선택해라· 남겨진 저 아이들을 네가 직접 이끌고 세상을 바꿀 건지· 아니면 더 이상 사람을 잃기 싫다는 나약함에 빠져 혼자 도태되며 살 것인지를 말이다· 어느 쪽이든 절대 순탄하진 않을 것이야·)
“하····”
시안 역시 그를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슬그머니 그의 멱살을 푸는 동시에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던 아에르의 손도 직접 떼어냈다·
“이번이”
(····)
“마지막이야·”
실로 여러 의미가 담긴 마지막이라는 한 마디·
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제단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시안을 아에르는 잡지도 더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뿐·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였다·
그렇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시안이 도착한 곳은 아공간의 광장·
그곳엔 시안을 기다리고 있던 미스트의 전 대원들이 저마다 결의된 표정과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시안은 아무런 말 없이 그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몇 걸음 안 가 멈춘 곳엔
영면(永眠)에 든 시리카의 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은은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시안의 그 미소를 잠시 멍하니 지켜보았고
이내 살며시 그녀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스스스
그러자 두 살결이 맞닿은 곳에서 검은 안개가 치솟았다·
안개는 시리카의 전신을 휘감으며 포근하게 감싸 주었으며 그 모습을 시안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내 시리카의 몸 또한 점차 안개로 변하기 시작하고
곧 그녀의 몸 전체가 완전하게 뒤바뀐 순간
안개는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를 위한 마지막 의례를 마친 시안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곤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무심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미스트 대원들에게 고한다·”
대원들은 일제히 자세를 다잡았다·
“지금 이 시간부로 내가 미스트의 당주다·”
실로 일방적이면서도 독선적인 선포·
허나 광장에 있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당주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그동안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으며 우리 스스로의 진면을 숨기며 살아왔지만····”
음울하지만 강렬하게·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
담담하지만 담대한 마음으로·
시안은 대원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 땅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살 것이다· 더는 우리가 미스트라는 것을 숨길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질서이고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인 것처럼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다·”
“새로운 미스트의 당주에게 경의를!”
대원들은 그런 시안에게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경의를 표했다·
더 이상 음지에서 존재를 숨기며 사는 것이 아닌 이 땅에 필수적인 구성원으로서 떳떳하게 존재할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새로운 당주가 원하는 세상이자 앞으로 만들어갈 질서였다·
설사 그것을 반대하는 이가 신이라 할지라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 *
“멋대로 사라진 것도 모자라 이제와 한다는 소리가 참으로 기막히구나· 루나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이제는 달관하실 때도 되지 않으셨나요?”
“더 말할 필요 없다! 당장 학회의 이름으로 사절단을 보내겠다! 제국으로부터 이번 일에 대한 확실한 대가를···!”
“그러시라고 지금 전령 드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 애먼 짓 하지 마시고 그쪽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번지지 않도록 잘 진정시켜주세요· 할아버지·”
“잠깐! 끊지마라 루나브!”
리겐스의 다급한 외침에도 루나브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전령구의 통신을 종료시켰다·
“그렇게 끊으셔도 괜찮은 겁니까? 학회장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습니다만?”
그 모습을 쭉 지켜본 슈르츠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별수 있나요? 이미 저질러진 일인데· 할아버지도 참 정정 하시다니까요? 이제 나이도 있으니 화도 좀 자중하시는 게 좋을 텐데····”
루나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넘겼다·
둘은 이내 골목에서 나와 사람들이 즐비한 대로변으로 몸을 이끌었다·
불과 일주일 전
난리가 벌어졌던 현장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거리·
루나브는 그 광경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참 신기하죠? 그 난리가 벌어진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범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네요·”
“황실이 대처를 잘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뭐 물론 그런 것도 있겠죠· 하지만 애써 외면하려는 것도 있을 거예요·”
“외면 말입니까?”
슈르츠는 이해하지 못한 듯 바로 되물었다·
“지금의 삶이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다소 의문이 들어도 사람들은 그냥 외면하고 있어요· 내일을 살기 위해서 어제의 일을 잊는 거죠·”
뭐라 질문을 이으려던 슈르츠는 차마 말을 뱉지 못해 주먹만 꽉 움켜쥐었다·
“아직도 마음이 복잡하신가요?”
그 마음을 눈치챈 듯 루나브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대체 자신은 뭘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지 스스로도 답을 낼 수 없는 자신이 무척 한심하게 느껴지시나요?”
“전 평생 뭘 위해 산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제 한 목숨 고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의미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련의 이런 큰일을 겪은 제가 앞으로는 대체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
슈르츠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냈다·
“좋은 흐름이에요·”
루나브는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느 누구도 슈르츠 씨에게 그 해답을 전해줄 순 없어요· 그러니 지금의 의문을 계속 품고 생각하세요· 그럼 언젠가는 이르게 될 거예요· 자신은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
슈르츠의 표정은 여전히 난해함으로 가득했다·
“제 경험담이에요·”
“루나브님의 말씀 꼭 명심하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슈르츠는 바로 수긍하였다·
루나브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골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지금의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보죠·”
그러곤 허공에 글씨를 쓰듯 손가락을 움직이니 곧 그들의 앞으로 흑색의 게이트가 나타났다·
둘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안으로 발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