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비애 (3)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시안의 아공간·
밖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시안에겐 어떤 일이 닥쳤는지 등
얼떨결에 떠밀려 온 이들로선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했다·
복잡한 마음에 왔다 갔다 하는 브라이언·
잠든 루나브의 옆을 말없이 지키는 슈르츠·
소울 스톤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하스티아까지·
그 누구도 편한 심정으로 자리하지 못했다·
‘시안님····’
가장 초조해하는 이는 단연 하스티아였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소울 스톤을 꼭 붙잡으며 부디 시안이 무사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대체 왜? 어째서?’
하늘에서 황금 갑옷의 기사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하단 생각은 했었다·
외면은 낯설었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낯설지 않았다·
신의 보호를 받는 엘프로서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매우 익숙한 기운이었으니·
그 기운의 정체를 아는 하스티아로선
‘무사하셔야 해요· 시안님!’
그저 시안의 무사 안녕을 비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편 슈르츠는 공간 한쪽에서 루나브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일련의 상황을 모두 지켜봤던 그로선 마음이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가득했다·
자신이 무슨 이유로 이들을 도와 황성의 기사들과 싸웠단 말인가?
루나브를 위해? 아님 자신을 위해?
본인이 뭘 위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스스로도 굉장히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부디 무사히 깨어나 주십시오· 루나브님·”
슈르츠는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일어나 이런 한심한 자신에게 해답을 던져주길 원했다·
그렇게 멍한 눈으로 있던 것도 잠시
“···!”
슈르츠의 눈은 곧 그녀의 한쪽 품에 안긴 검은 책으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묘한 기분에 책을 쭉 쳐다보다가 슈르츠는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동작 그만·”
그러다 어디선가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바로 동작을 멈췄다·
“엄한 호기심은 죄악을 불러오는 법이지· 주인 있는 물건에 괜히 손 안 대는 게 좋아·”
목소리를 들은 건 슈르츠만이 아니었다·
브라이언과 하스티아 역시 목소리를 듣고선 바로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
“나? 음 그냥 여기 잠든 숙녀님의 시종이라고 보면 돼·”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이 공간에 없었던 낯선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을 보는 이들의 반응이 못내 재밌었는지 낄낄 웃고 있었다·
“흐음····”
그러자 잘 자고 있던 루나브의 입에서 불편한 신음이 뱉어졌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건 덤·
“어이구야· 벌써 깨어나면 곤란한데?”
못해도 반일 이상은 수면이 이어질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루나브는 서서히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모두가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도 도련님은 아직인데?”
허나 그녀가 깨어났을 때 있어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아직 이곳에 자리하지 않았다·
-후우웅
그 순간 하스티아가 가지고 있던 소울 스톤의 안개가 선명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소울 스톤이?’
-터벅터벅
그와 동시에 공간 한쪽에서 게이트가 열렸고 이내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게이트 너머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익숙한 남성·
돌아올 것을 약속했던 시안이었다·
브라이언이 가장 먼저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
“도 도련님! 무사하셨···!”
허나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분위기에 브라이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시안은 아무런 말이나 반응 없이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 나갔고 루나브의 앞에 이르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예상치 못한 낯선 모습에 공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진 상황·
그러거나 말거나 시안은 잠든 루나브가 깨어나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마침내 굳게 감겨있던 루나브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방황하던 그녀의 두 눈이 시안에게 향한 순간
“우와····”
루나브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기까지 했다·
“꿈 아니죠?”
“아니야·”
“여기 왜 계세요?”
“네가 눈 떴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보여야 한다면서?”
“그러긴 했죠····”
설마 진짜로 있을 줄은 몰랐던 건지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시안과 눈을 마주했다·
그러다가 대뜸 양손을 그에게 뻗더니
“뭐해요?”
“···?”
“저 일으켜주지 않고·”
대놓고 안아달라며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평소라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쉴 시안이었지만
이번엔 별말 없이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여 주었다·
-와락
루나브는 이때가 기회라는 듯 바로 시안의 몸을 끌어안았다·
시안은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분명 기뻐하다 못해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야 할 텐데 왜일까요? 그러질 못하겠네요?”
“····”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선배?”
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전신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떨림이 그 답을 대신해주었다·
“있었구나·”
루나브는 그런 시안의 몸을 더 꼭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럼 그 일을 해결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 거니까·”
살며시 몸을 뗀 루나브는 이번엔 시안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선배가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데?”
“····”
“그럼 그 해결해야 할 일을 다 제쳐두고 나한테 와준 거네요? 우와 나 드디어 성공했네?”
루나브는 진심으로 기뻤지만 차마 환하게 웃을 순 없었다·
“가요· 난 이제 됐으니까·”
“····”
“나한테 시간 지체할 필요 없으니까 이젠 선배가 가야 할 곳으로 가요·”
허나 말과는 다르게 순간 루나브의 눈에서 한줄기 이슬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안은 쉽사리 일어나지 못한 채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우는 거냐?”
“오해하지 마세요· 기뻐서 흘리는 거니까·”
루나브는 급히 눈물을 닦고선 시안을 일으켰다·
“어서 가요· 혹시라도 내 맘 바뀌면 큰일이니까·”
“상황은 다 끝났어· 굳이 내가 게이트를 열어주지 않아도····”
시안의 시선은 잠시 그녀의 뒤에 자리하고 있던 레미하람에게 향했다·
“알아서 나갈 수 있지?”
“네·”
루나브는 문제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안은 그런 루나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간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게이트를 열려던 시안은 이내 브라이언과 하스티아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말없이 브라이언에게 다가가더니
“잠시만 맡아줘·”
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에 브라이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 도련님! 이건!?”
시안이 건넨 물건은 다름 아닌 검·
그것도 평범한 검이 아닌 그의 애검이자 이 세상에서 한 자루밖에 없는 마검 케이람이었다·
“방정떨지 마· 잠깐만 가지고 있으라는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시안은 얼떨떨한 브라이언을 뒤로 한 채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그렇게 몸을 이끌고 나가려는 순간
‘괜찮으세요 시안님?’
뒤에서 하스티아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정신 감응을 보냈다·
이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시안은
‘아니·’
짤막한 대답과 함께 그대로 공간에서 사라졌다·
아공간엔 또 다시 적막한 감적이 돌았다·
브라이언은 시안에게 받은 마검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스스스
그러자 마검의 끝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으며 곧 케이람의 영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
케이람은 등장과 동시에 푹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우리 악랄하기론 둘째라도 서러울 케이람님께서 어찌 그런 불편한 모습을 보이실까?”
그 모습을 본 레미하람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주둥이 싸 물어라· 찢기고 싶지 않으면····]
돌아온 것은 거친 욕설뿐·
레미하람은 헛기침을 뱉으며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람은 분노가 차오른 나머지 머리를 붙잡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끝까지 맘에 안 드는 년 같으니라고!]
* * *
우시프 제국 어딘가 인적없는 평야의 언덕 한가운데·
화려한 저녁노을의 금빛을 받으며 그 숭고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루멘델·
그는 세상 평온한 얼굴로 자리한 채 손으로 무언가를 쓰다듬고 있었다·
다름 아닌 성검 듀란다르크였다·
성검은 마치 제 주인을 만나기라도 한 듯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빛을 뿜어냈다·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그리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냥 내 사소한 변덕 때문이지·”
“후회하진 않으실지요?”
“내가 후회할지는 내가 아닌 너희에게 달려 있다·”
루멘델은 쓰다듬은 성검의 본체를 그대로 지면에 내리꽂았다·
“하····”
신기(神氣)를 받아들인 듀란다르크는 그 황홀함에 취한 나머지 절로 탄성을 내질렀다·
“시작과 중간이 어떻게 흘러갔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끝에 누가 있냐가 중요한 것이지· 결국 누가 먼저 절망을 성장의 동기로 바꾸는지에 따라 그 끝을 차지하는 이가 정해질 것이다·”
루멘델은 그 말과 함께 몸이 가루로 휘날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난 그게 너희이길 바라겠다·”
듀란다르크는 그 모습을 숭고한 눈으로 지켜보며 루멘델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자리를 지켰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곤 남은 일을 위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 여긴?”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성검의 주인 에쉘이 마침내 눈을 뜨고 일어났다·
“언제까지 그럼 한심한 꼴을 보이고 있을 거지?”
성검의 단호한 반응에 에쉘은 급히 몸을 추슬렀다·
“서 성검이시여! 이 상황은 대체?”
“굳이 설명을 해줘야 하나? 넌 마검의 주인을 상대로 졌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그분의 구원이 아니었다면 네놈의 육신은 지금쯤 수만 조각으로 찢겨 누군지 조차 못 알아볼 상태가 됐겠지·”
“제 제가 졌단 말입니까?”
에쉘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 분출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감정에 이어 급격히 몰려오는 패배에 대한 치욕과 굴욕·
입에선 이유 모를 헛웃음까지 연신 튀어나왔다·
“7년 전 네놈이 내게 그랬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안개의 계승자를 이겨 보이겠다고····”
에쉘로선 차마 대답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질문이었다·
“난 네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힘을 다른 인간들에게도 나눠주자는 것도 그렇고 성서의 주인과 합세해서 안개의 계승자와 똑같은 존재를 만든다는 것도 별로 내키진 않았지· 그래서인지 성공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제대로 적중했지·”
“성검이시여! 제게 한 번 더 기회를 내려주신다면!”
“기회?”
듀란다르크는 가소롭다는 듯 바로 반문했다·
“기회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거지·”
듀란다르크는 에쉘을 금방이라도 죽일 만큼 매우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딱 한 번·”
“···!”
“무슨 변덕이 생기셨는진 몰라도 그분께서 네게 딱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겠다는구나·”
듀란다르크는 앞에 놓인 자신의 본체를 들어 다시 에쉘에게 건넸다·
성검을 받아들인 에쉘은 황홀함에 취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직접 자신의 힘까지 하사하시면서 말이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빛의 마력·
에쉘은 솟아오르는 감격을 애써 억누른 채 성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전에 보리스와 함께 이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습니다·”
듀란다르크는 한 번 이야기해보라는 듯 턱을 치켜올렸다·
“만약 우리 인간의 힘으로도 그 안개의 계승자를 막을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할까? 그에 대한 해답으론 저흰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의 힘을 이용하자고 했습니다·”
“다른 종족?”
“예· 이를테면····”
에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협곡 건너 저 먼 곳에 사는 마계의 존재들과 그들의 왕을 말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