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비애 (1)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역한 느낌이 차오르는 낯선 공간·
시안은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이 신의 아공간이란 것을 단번에 인지했다·
딱히 추측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것 말고는 설명 자체가 안 됐으니·
“····”
공간에 전이된 순간부터 좀처럼 팔과 다리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속이 메스꺼웠던 걸 넘어 이제는 몸에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일단 숨이라도 고르기 위해 시안은 뒤로 물러났다·
“네놈에겐 어색할 수밖에 없겠지·”
루멘델은 그런 시안을 덤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은 성스러운 내 기운으로 만들어진 아공간이다· 네가 아닌 다른 피조물들이라면 감격하다 못해 황홀에 젖을 장소지· 하지만 넌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네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못된 존재인지 알아야 할 것이야·”
시안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인정은 하겠다· 너는 그동안 내 힘과 계시를 내려받은 계승자들을 모두 이겨냈다· 성녀 성서 그리고 성검의 주인까지· 과정이 어땠든 간에 결국 너로 인해 처참히 무너졌단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야·”
루멘델은 별다른 부정 없이 오히려 시안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릇 상황만 봤을 땐 신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매우 영광스러운 상황이었다·
그것이 달갑지 않은 시안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가 친히 네놈에게 나타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내 피조물들이 해결하지 못했다면 나라도 나서서 직접 해결해야 하니 말이다· 네가 아무리 이 세상을 더럽히고 안개로 물들이려 해도 내가 만든 세상의 질서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설사····”
루멘델은 천천히 손을 올려 금빛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더럽혀진 세상을 다시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까딱하고 움직인 신호에 맞춰 기사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시안에게 진격했다·
-쾅!
곧 천둥이 울린 듯한 굉음이 퍼짐과 동시에 주변으로 거센 파장이 퍼졌다·
“크윽!”
막는 것조차 버거울 무지막지한 힘·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시안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니 내 기사를 통해 깨닫거라· 피조물의 위치란 어떤 것인지! 네가 아무리 신의 힘을 갖고 발버둥 쳐도 결국 근원의 존재 앞에선 그 무엇하나 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것이야!”
루멘델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신의 기사와 추악한 안개의 존재만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지려는 순간
“이봐 루멘델·”
루멘델은 다시 시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착각까지 한 상황·
차마 돌아서진 않고선 배길 수 없는 불길한 발언을 루멘델은 똑똑히 듣고 말았다·
무례하고 불순한 것도 정도가 있지·
고작 피조물 주제에 감히 지고한 신의 존엄을 함부로 부르다니·
루멘델로선 평생을 통틀어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매우 낯선 상황이었다·
“무검(霧劍): 검은 선혈의 가무(歌舞)!”
작지만 귀에 아련히 울려 퍼지는 주문·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
시안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던 거구의 금빛 기사의 앞으로 검은 안개의 기운이 사방으로 흩날리는가 싶더니
금속이 갈라지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기사의 육신이 사방으로 쪼개졌다·
쪼개진 신체는 곧 가루로 변해 맥없이 휘날렸으며 기사가 사라진 자리엔 기이한 가무의 자세를 취한 시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루멘델은 의문이 들었다·
저게 과연 피조물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란 말인가?
아니다·
저건 피조물의 근원인 자신들과 거의 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일치한 모습·
그중에서도 과거 신계에서 추방된 누군가의 힘과 똑 닮아 있었다·
가무의 후유증으로 얼굴을 잠시 숙이고 있던 시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자신을 불신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루멘델과 다시 시선을 마주한 순간
-탓!
시안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슈욱!
루멘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두 손가락을 내세워 시안의 검격을 막았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힘의 세기·
그렇다고 한들 아직은 신의 손가락조차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힘이었다·
“피조물로서 하나만 묻지 루멘델!”
허나 시안은 상관없다는 듯 살기 어린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무슨 기준으로 나란 인간을 더럽다고 하는 거지?”
“기어이 끝도 없이 선을 넘는구나·”
“내가 더럽게 보인다는 것도 결국 당신의 개인적인 시선 아닌가?”
“지금 내 판단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냐? 감히 피조물 주제에?”
루멘델은 가소롭다는 듯 시안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당연하지! 우린 당신들의 피조물이잖아? 당신들처럼 생각하고 의문을 품는 게 당연하다고!”
케이람을 막은 두 손가락에서 순간 작은 떨림이 일었다·
루멘델로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은 그냥 나와 아에르가 싫을 뿐이잖아? 그냥 당신 자체가 빛이기 때문에 어둠에 둘러싸인 안개를 거부하는 것 아니야? 다른 거창한 이유가 있어?”
시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닌
그냥 싫어한다는 단 하나의 사소한 이유 때문이 아니냐는 물음·
루멘델은 눈만 부릅뜰 뿐 시안의 물음에 부정하진 않았다·
“뭐 맘대로 생각해· 그런 당신을 설득하거나 개화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정말 농담으로도 못 써먹을 말이구나· 네놈 따위가 뭐라고 날···!”
“그냥 당신을 끌어 내리면 돼!!”
루멘델은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당신이 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냥 당신을 없애고 그 자리에 날 인정할 새로운 누군가를 세우면 되는 거라고! 그게 아에르가 됐든! 다른 신이 됐든! 상관없어! 설사 이 세상을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지고한 최고신 앞에서 감히 세상을 뒤엎겠다고 말하는 당돌한 피조물·
분명 분노와 살의가 치밀어 오를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당돌하구나·”
루멘델은 미소를 보였다·
“참으로 당돌한 피조물이 아닐 수 없어· 이래서 피조물을 다루는 재미가 있는 거지!”
살짝 치켜 올려진 입꼬리는 머지않아 귀 양쪽으로 크게 승천했다·
“내 피조물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만약 네놈이 그들을 또 굴복시킨다면 그때는 내 친히 길을 열어주도록 하지! 바로 나에게 올 수 있는 길을 말이다! 와서 네놈이 하고 싶은 모든 걸 해보아라!”
안개의 계승자에게 내리는 빛의 신의 계시(啓示)·
본인이 만든 질서에 어긋나는 굉장히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허나 루멘델에게 시안은 이제껏 자신이 계시를 내려왔던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흥미로웠다·
“그렇게 찾아온 네게 나는 절망을 선사할 것이다! 내 앞에 나타난 넌 머지않아 깨닫고 말겠지! 내 앞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야! 그 진리를 깨닫고 절망했을 때! 나는 엄청난 쾌락을 누리게 될 것이야!”
루멘델의 눈에서 순간 짤막한 빛이 일더니 곧 그의 육체가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부디 그 순간이 꼭 찾아왔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끝으로 루멘델은 시안의 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시안은 루멘델이 있었던 자리를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목이나 잘 닦고 있으라지····”
* * *
인간은 참 단순하다·
하물며 그 인간의 원형이라고 하는 신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흥미가 돋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란 놈을 살려주고 떠났다·
참 어이가 없는 일이지·
그냥 이 자리에서 심판을 내려도 모자랄 판에·
-털썩
목표로 했던 대상이 사라진 순간 전신의 힘이 바람 빠지듯 빠져나갔다·
“하하····”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참 험난하기 그지없네·
[웃어? 지금 놈을 놓쳐놓고 웃음이 나와?]
텅하니 빈 내 등 뒤로 케이람이 등을 마주하며 나타났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느낌에서 그녀도 어지간히 지쳤음을 알 수 있었다·
“아쉬우면· 이대로 날 잡아먹고 잡으러 가던지·”
[됐어· 넌 이미 잡아먹기엔 너무 푹 익어버렸거든· 그냥 이 상태로 두는 게 나아· 게다가 이 누나도 지금은····]
케이람은 푸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지쳐버렸거든·]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케이람 역시 나를 돌아보며 따라 웃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니? 앞으로 감당할 수 있겠어? 이제껏 네가 접해보지 못한 더 큰 고난이 너를 찾아올 텐데?]
“이제 와서 왜 이래? 설마 약해진 거야? 내가 즐겁게 해준다고 했잖아? 그럼 끝까지 따라와야지·”
나는 전혀 문제없다는 듯 입꼬리를 들썩이며 말했다·
[그럼! 끝까지 따라가야지! 최후의 최후까지 남김없이 다 즐겨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다만····]
살며시 손을 들어 올린 그녀가 내 거친 볼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항상 차갑기만 했던 그녀의 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로 가득했다·
[그걸 네가 온전히 버틸 수 있을까?]
낯설다 못해 거부감이 들 만큼 온화한 모습·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이젠 얘들 장난이 아니야·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이 다 네가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일이라고· 너 그거 다 감당할 수 있겠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이러실까?”
[걱정해줘도 지랄이네· 정신 차렸으면 빨리 일어나! 이 역겨운 공간에 1초라도 더 있기 싫으니까·]
본인도 어울리지 않는 행위였다는 걸 아는지 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털었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후웅
짤막한 빛과 함께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하는 아공간·
딱히 벗어나려 애쓰지 않아도 곧 원래 있던 황궁 지하로 다시 전이될 것으로 보였다·
버틸 수 있겠냐는 케이람의 물음을 애써 둘러대긴 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항상 험난하기만 했던 인생이지 않은가?
여기서 더 험난해져 봐야 뭐가 달라질까 싶으면서도 자신 있게 버틸 수 있다는 말은 솔직히 못 할 것 같다·
그냥 해야겠다는 말만 할 뿐·
이제와 물러설 수 있는 뒷길은 존재하지 않기에
끝도 없이 뻗어있는 미지의 앞길로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
그런 다짐과 함께 나와 케이람은 원래 있었던 황궁 지하로 전이되었다·
“후!”
돌아옴과 동시에 짧게 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조금 전까지 있던 그 역한 공간보단 편한 느낌이 든다·
특히 지금 코에 아련하게 퍼지는 이 아찔한 피냄새가 내 마음을 더욱 아늑하게····
잠깐·
뭐야 이 냄새?
뭔가 잘못됐음을 판단한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석에 여전히 처박혀 있는 보리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주저앉아있는 비올렛 황녀와 아린 황녀·
그 옆에서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미아·
그 주변을 삥 하고 둘러선 미스트의 대원들까지·
아니 그래 뭐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뭐지?
왜 내 눈앞에 이런 상황이 펼쳐져 있는 거지?
“뭔 일 있었어?”
아무나 대답하라는 마음에 나직이 물었다·
허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보다 먼저 황궁 지하로 온 아린 황녀도 나중에 도착한 미스트의 대원들도
그 누구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묻잖아! 뭔 일 있었냐고!!”
감정을 주체못한 나머지 그대로 주변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미친 듯이 떨려오는 양손은 덤·
대체 뭘까?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잘못 봤던 걸까?
아니다·
분명 아공간으로 전이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되긴 했어도 잠깐 회복만 하면 다시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딱히 큰 문제는 없는 상태였는데
왜?
어째서?
지금 내 눈앞에!
“왔니 시안?”
죽기 일보 직전의 당주가 자리하고 있단 말인가?
“귀 울리니까 소리 지르는 건 자제하고····”
당주는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 피로 범벅진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