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개편의 날 (3)
원래 암살자는 정문보단 샛길을 더 자주 이용하는 법이다·
나만의 아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했던 순간부터
난 아에르의 아공간을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왕래해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길을 이용하려 했었는데 이게 웬걸?
내 아공간이 미스트의 아공간과 연결 짓지 못하도록 당주가 차단해버렸다·
머리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그냥 보자마자 포기할 정도로 아주 복잡하게 꼬아놓으셨지·
어쩔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와버렸다·
잠깐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나와 당주가 아카데미를 나온 시점부터 미스트는 더 이상 루웬에 있는 아지트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제국 곳곳에 아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게이트를 여러 곳에 만들어놨지·
그중 하나가 바로 여기 황성 도서관이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쪽 2층의 비밀 서고실로 가면 아에르의 아공간으로 갈 수 있는 게이트가 있다·
그럼 저길 통해서 아린 황녀를 구해온 거냐고?
저긴 엄연히 말해 정문이다·
샛길을 막아놨다 해서 정문을 안 막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내가 말하는 샛길은 여기가 아닌
아에르의 아공간으로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루트를 말하는 거다·
“설마설마했는데 기어이 다녀온 모양이구나?”
문을 열자마자 검을 후려친 당주가 나를 보며 물었다·
“차마 거기까지 막아놓을 시간은 없으셨나 봅니다?”
“막을 필요가 없어서였지· 네가 루웬에 다녀오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저 아이를 구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거든·”
“원망을 하실 거면 저 말고 머저리 신에게 하십시오·”
그렇다·
내가 다녀온 곳은 로열 아카데미가 위치한 루웬에 있는 루트·
무려 5일 만에 거기까지 달려가 아린 황녀를 구한 것이다·
왜 거기가 아직도 남아있냐고?
왜겠는가?
공간의 주인인 머저리 신께서 귀찮은 마음에 문을 안 치웠기 때문이지·
-챙!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검을 물리고 거리를 벌렸다·
당주는 아예 정문 한짝을 대차게 박살 내고선 안으로 들어왔다·
주변에 다른 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오신 겁니까?”
“널 설득하러 갔던 간부들을 네가 행동 불능으로 만들어놓는 바람에 여러모로 차질이 생겨서 말이다· 지금 전부 현장에 있다·”
“혀 현장?”
당주의 시선이 곧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린 황녀에게 향했다·
“이 판국에 팔자 좋게 데이트나 하려고 꺼내진 않았을 테고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니?”
“딱히 정해진 곳은 없습니다· 그냥 이후에 제 앞에서 벌어질 모든 광경을 지켜보게 할 겁니다·”
“재밌구나· 정말 그 아이를 황제라는 이름의 인형으로 만들 작정이니?”
“나쁠 건 없다고 봅니다·”
“···?!”
황녀의 당황한 시선이 뒤에서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남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제가 이용해 먹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기적이구나·”
지금만큼은 칭찬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당사자 없이 두 분께서만 떠드시니 재밌으신가요?”
뒤에서 잠자코 있을 줄 알았던 아린 황녀가 다소 언짢아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란 존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이 난리를 피우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조금 불쾌하네요· 전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만 멀뚱히 서 있는 인형이 아니에요·”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 좀처럼 꺼내기 힘든 당차고 소신 있는 반응이었다·
뭐 지금의 그녀라면 딱히 못 할 반응도 아니기에 그리 놀랍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황녀님께선 지금 시안이 나타나 준 것에 나름 기쁜 마음이 드셨겠지만···”
때로는 상황에 맞게 잠자코 있는 것이 더 나은 법입다·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계셨더라면 황녀님께선 적어도 이전의 삶보단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아가실 수 있었을 겁니다· 황녀가 아닌 평범한 여인으로서 말이죠·”
“누가 그런 삶을 원한다고 했던가요?”
황녀는 주눅 들지 않고 당찬 질문을 던졌다·
“지금 조회식장에선 황녀님으로 위장한 가짜 대역을 가지고 저희 대원들이 기사들과 대치 중입니다· 저희는 그 대역을 가지고 황녀님이 암살당하는 거짓 상황을 연출할 겁니다· 그럼 사람들은 충격에 빠질 거고 저희에 대한 분노가 더욱 높아지겠죠·”
당주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걸 시안이 막아버렸습니다·”
별로 개의치 않는 나로선 그냥 어깨만 들썩였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계획을 바꿔야지요· 오늘부로 아린 세벨러스라는 이름을 가진 황녀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주는 차가운 미소와 함께 내게 겨누었던 칼날을 황녀에게 돌렸다·
“···!”
그 분위기에 압도된 황녀의 눈동자가 심히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나가십시오·”
“뭐?”
“나가시면 저 대신 황녀님을 지킬 다른 기사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너 넌 어쩌고?”
“곧 뒤따라갈 겁니다·”
어째 어디선가 경험해본 적이 있는 듯한 굉장히 익숙한 상황·
그걸 그녀도 느꼈는지 입술을 꾹 다문 채 몸만 파르르 떨고 있었다·
“지금 걱정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또 상기시켜드려야 합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두 주먹을 불끈 쥔 모습에서 그녀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챙!
그 상황을 온전히 지켜볼 리 없는 당주가 어느새 우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난 보내주겠다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지금입니다!”
내 신호와 동시에 황녀는 정문으로 뛰쳐나갔다·
“···!”
덩달아 시선을 돌리려는 당주의 앞을 이번엔 내가 가로막았다·
“기어이 나와 피를 보겠다는 거니?”
“예상 못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아니지! 하지만 이 자리에서 피를 흘려야 할 사람은 안타깝지만 너도 나도 아니야!”
검을 들지 않은 당주의 다른 손에서 마나와 함께 검은 안개가 생성되었다·
“저 아이 하나뿐이지!”
그러곤 주저할 것 없이 생성된 안개를 아린 황녀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암무 5식: 안개 분신!”
던져진 구체는 아린 황녀의 앞에 이르렀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당주와 비슷한 사람의 형태로 변환되었다·
분신의 손엔 검은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황녀는 피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
이미 분신의 단도는 황녀의 목으로 빠르게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황녀의 앞에 다시 한 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려는 순간
-챙!
도서관 정문 밖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검이 분신의 검을 막아냈다·
아린은 놀란 눈을 번뜩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 레시무스?”
그녀의 수호 기사 레시무스였다·
“물러서십시오 황녀님!”
레시무스는 기합과 함께 분신의 균형을 무너트린 뒤 연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쐐액!
검기에 베인 분신은 바로 가루가 되어 소멸했다·
당황한 나머지 미간을 찌푸린 당주를 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암살이지 수호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겨우 수호 기사 하나로 뭘 하겠다는 거지?”
“미래의 대륙 제일 검이 될 기사입니다· 전신의 근육이 찢어지고 온몸의 장기가 파열되는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군을 지키는데 전념하는 기사죠· 간부급 대원을 몇 명 보낸다 해도 쉽게 쓰러트릴 순 없을 겁니다·”
당주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서려 있었지만 긍정의 감정이 담겨있진 않았다·
나는 살짝 시선을 돌려 이쪽을 보고 있는 레시무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아들인 레시무스는 즉시 황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당돌한 제자는 어째 한 번도 스승의 말을 온전히 듣는 법이 없구나·”
케이람과 맞닿은 당주의 검에서 더욱 짙은 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제자란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더 가르치는 맛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하지만 안일하게 생각해선 안 될 거다 시안! 난 지금 널 죽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분노에 휩싸인 상태이니····”
양팔의 털이 곤두서고 등에선 땀이 흘렀다·
정말 몇 번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분노에 찬 당주의 모습·
나로선 이제는 무뎌졌다고 생각한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을 다시금 샘솟게 하는 유일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흥분되는 일이지!
분명 우리에게 있어선 벌어지면 안 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당주의 입엔 진심이 잔뜩 담긴 희열의 미소가 서려져 있었다·
* * *
그렇게 레시무스와 함께 도서관을 빠져나온 아린·
시안을 두고 온 것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레시무스?”
“황녀님께서 방에서 사라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안님이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조회식 날 알려주는 시간에 맞춰 황성 도서관으로 향하면 아린 황녀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며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레시무스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아직도 울화가 치미는지 눈초리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제 추측이긴 하나 적어도 에쉘과 보리스님은 아린 황녀님께서 실종되실 거란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혀 놀라거나 하는 기색 없이 상황을 좀 지켜보자는 말로 어영부영 넘겼습니다!”
“아 아바마마께선? 아바마마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
“전혀 없으셨습니다····”
“결국 우리만 또 몰랐던 일이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거네·”
아린은 분한 마음에 이를 갈았지만 그래도 좌절하진 않았다·
“시안님께선 만약 자신이 따라가지 못할 상황이 오면 아린님을 조회식장으로 모시라 했습니다· 이후 거기서 벌어지는 광경을 전부 눈으로 지켜본 뒤 해야 할 일을 직접 결정하라고 하시더군요”
시안도 비슷한 말을 직접 하긴 했다·
간단해 보이지만 굉장히 어려운 주문이었다·
결정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인 만큼
아직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아린으로선 머리가 매우 어지러웠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는지요?”
그런 그녀들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린과 레시무스는 걸음을 멈춘 동시에 눈을 번뜩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린 황녀님·”
“에 에쉘 공?”
심각한 그녀들과 다르게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한껏 짓고 있는 에쉘·
그 옆엔 무덤덤한 얼굴의 미아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그의 기운이 느껴져요· 저 먼저 가도 될까요?”
“그러시죠·”
미아는 정작 황녀에겐 관심이 없다는 듯 그녀들을 지나쳐 도서관으로 향했다·
두 여인은 차마 그녀를 막지 못해 불안한 시선만 보냈다·
“조회식장으로 가시는 거죠?”
에쉘은 그런 그녀들을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에쉘 공은 왜 여기 있는 건가요?”
“황녀님을 모셔가기 위해섭니다· 지금부터 제가 지켜드릴 터이니 함께 가시도록 하죠·”
에쉘은 호위를 자청하며 그녀를 이끄려 했지만 아린은 다가가지 않았다·
“이런 저를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7년 동안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나누었던 절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에쉘은 안타깝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의문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인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키는 근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인정하죠· 전 아린 황녀님께서 알지 못하시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것을 말씀드리진 않았던 건 전적으로 황녀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절 위해서였다고요?”
“예· 황녀님께선 절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전 황녀님을 무척 가치 있는 분으로 보고 있었으니까요· 이건 진심입니다·”
에쉘을 아린을 칭찬함과 더불어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가서 황녀님이 보셔야 할 모든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시안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레시무스는 불안한 마음에 아린을 쳐다보았지만 그 불안은 한순간에 말끔히 사라졌다·
이미 아린의 눈은 어떤 달콤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무척이나 확고한 상태였다·
“···!”
“레시무스· 검 좀 빌려줘·”
레시무슨 급히 비상용 검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아린은 받은 검을 그대로 에쉘에게 겨눴다·
“우시프 제국의 5황녀 아린 세벨로스로서 명합니다·”
“····”
“베르트 공작가의 장남 에쉘 베르트는 지금 당장 제 앞에서 물러나와세요·”
에쉘의 눈동자가 순간 눈에 띄게 요동쳤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에쉘 공은 제게 있어 무척 의미 있는 분입니다· 첫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향한 조언과 좋을 말을 아끼지 않고 해주셨죠· 단 한 번도 나쁜 말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저 제가 가려는 길이 올바른 길이라는 듯 무한한 믿음을 심어주셨죠·”
에쉘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관된 신념은 저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 자체를 망치는 행위에요· 때로는 그런 신념에도 의문을 품어야 하는 법이에요· 그래야 무엇이 더 옳은 길인지 판별할 수 있는 경험과 안목이 생기는 거니까요· 그럼 다음엔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겠죠·”
“맞는 말이십니다· 하지만····”
“에쉘 공은 제게 변함없는 믿음만 주셨을 뿐 단 한 번도 의문을 품게 하지 않았어요· 에쉘 공을 비롯한 그 누구도 제게 의문을 품게한 사람은 없었죠· 단 한 명 시안을 제외하고서요!”
감정을 이어받은 아린의 검에선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제 앞에서 물러나세요· 절 이끌 사람은 에쉘 공이 아니에요·”
근 5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캬하하하!”
환희에 겨운 에쉘의 웃음소리가 주변에 쩌렁쩌렁 울려댔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감격의 박수를 치는 에쉘의 손에서 금빛의 오라가 일렁거렸다·
이윽고 오라 속에서 성검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에쉘은 그 검 끝을 아린에게 겨누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 미래를 함께 봐야 할 사람은 비올렛 황녀님이 아닌 아린 황녀님인 것 같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