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3)
우시프 제국의 수도 세벨리너스와 가장 인접한 도시 로랑드·
도시라고 하기엔 작고 마을이라고 하기엔 조금 규모가 크긴 해도 황성과 가깝다는 이점으로 인해 통행 인구가 대단히 많은 도시였다·
그만큼 상점 식당 여관 등의 시설들이 입구에서부터 쭉 즐비해 있었으나
루나브와 슈르츠가 향한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낡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비교적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자그마치 7년만의 도시 방문·
루나브로선 아카데미 재학생 시절 처음 들른 이후 두 번째 방문이었다·
아무 감흥이 없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훨씬 더 자유로우면서도 감흥이 넘쳤다·
그렇게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루나브는 거리에 전단처럼 퍼져있던 황실의 공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빛의 기사단이 구원의 기사단으로 개명을 한다니· 개인적으로 정감이 더 안 가는 이름이네요·”
“이름을 바꾸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요?”
“무언가의 이름을 바꾼다는 건 사실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행위에요· 그 이름을 통해 유지해왔던 기존의 흐름과 관념을 모두 바꾸겠단 뜻이니까· 겉으로는 빛의 기사단의 원형을 계승한다곤 하지만 아마 완전히 계승하진 못할 거라고 봐요·”
루나브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소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마 그 개명을 원했던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겠죠·”
그 새로운 흐름이 절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을 것임을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윽
문득 자신들이 오기 전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앞 테이블 일행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빠른 계산과 함께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금 공문에 시선을 돌린 순간
“···!”
루나브의 시선이 다시금 그들이 나간 문 쪽으로 향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여인과 건장한 체격의 갈색 머리 남성·
여인이야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곤 하나 같이 있던 남성은 무척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7년 전 황성 고급 식당에서 처음 얼굴을 보았고
아카데미 재학 당시 로열관에서 생활했던 어느 귀족 자제의 수호 기사·
루나브의 빠른 추측은 머지않아 확신이 되었다·
“슈르츠 씨·”
“예?”
“방금 나갔던 사람들· 얼굴 기억해요?”
“예· 뭐 기억은 합니다만····”
“당장 잡아야 해요·”
그녀의 입에서 잡아야 한다는 말이 튀어나온 지 정확히 1초 후·
슈르츠는 주인의 명령을 받은 소환수처럼 바로 식당을 뛰쳐나갔다·
불과 몇 초 내지는 몇십 초 사이·
허나 부리나케 밖으로 나온 슈르츠의 시야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슈르츠는 포기하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시간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그야말로 거리가 가장 붐빌 시간·
그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거리 속에서
“···!”
저 멀리 골목으로 들어가는 낯익은 모습들이 보였다·
“저쪽입니다· 루나브님!”
뒤이어 나온 루나브는 아무 망설임 없이 바로 슈르츠가 가리킨 곳으로 달렸다·
그들 역시 추적이 있음을 의식하고선 벗어나기 위해 더욱더 속도를 높였다·
혹여 꼬리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따라갔지만
루나브와 슈르츠는 결국 인적이 드문 숲속 한가운데에서 둘을 놓치고 말았다·
아직 멀리는 못 갔을 거란 생각에 바로 기척 감지 마법을 시전 하려는 순간
-부스슥
왼쪽 수풀에서 소리가 들리면서 후드를 뒤집어썼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나브님?’
둘에게 있어 매우 익숙한 얼굴·
하스티아였다·
루나브는 미간을 좁힌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이 일족원들과 함께 프루이나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우리가 알려준 루트는 이쪽이 아니었을 텐데요?”
‘네 그랬죠! 한데 저희 쪽에서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서 본의 아니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어요·’
“식당에 우리가 왔다는 건 알고 있었나요?”
‘네· 하지만 괜히 인사드렸다간 오해를 살 수 있겠다 싶어서· 그냥 조용히 나와버렸어요· 근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인사를 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루나브는 생각했다·
지금 하스티아가 전하는 감응엔 온전한 진실이 담기지 않았다고·
분명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거짓이 덮여 있었다·
“당신과 함께 있던 남자는 어딨나요?”
‘아 브라이언님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전한 하스티아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브라이언?”
허나 그 이름은 이미 루나브의 머릿속으로 전해지고 말았다·
급히 기억 어딘가에 있는 그 이름을 돌이켜보려는 순간
-타앗
곁에 있던 슈르츠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황급히 검을 뽑고선 우거진 수풀 속으로 대차게 검을 휘둘렀다·
-챙!
곧 청량한 파찰음이 울리며 그들의 고막을 자극했다·
수풀 속 슈르츠의 장검과 날을 맞대고 있는 단검·
짧은 힘겨루기 끝에 슈르츠가 거리를 벌리니 단검의 주인 또한 수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물러선 슈르츠는 이내 이끌리듯 자신의 손목을 스윽하고 매만졌다·
사람 몸은 간신히 찌를 것 같은 저 단검에서 무슨 망치가 휘두른 듯한 괴력을 느껴버린 것이다·
분명 예사롭지 않은 힘이었다·
“언제부터 인간 남성의 보호를 받게 된 거죠 하스티아?”
‘설명··· 해야 하나요?’
“제가 직접 추궁하는 꼴을 보기 싫다면 말이죠·”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금 고민하던 하스티아는 급기야 얼굴을 굳히며 당당히 말했다·
‘이건 개인적인 일이에요· 제가 분명 루나브님께도 큰 은혜를 입은 건 맞지만 이것까지 루나브님께 말씀드릴 순 없어요·’
“누가 비밀을 지키는 일족 아니랄까 봐· 개인적인 비밀도 참 많네요·”
루나브는 그런 하스티아를 비꼬듯이 말했다·
“좋아요· 당신들 개인적인 일이야 제가 상관할 바도 아니니 더 신경은 안 쓰겠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루나브의 시선이 곧 검은 가면의 남성에게 향했다·
“저 남자 얼굴은 좀 봐야겠네요·”
‘구 굳이 저분을 확인하시려는 이유가 뭔가요?’
“저 남자가 당신들 일족도 아닌 마당에 당신이 절 막을 권리는 없어요· 하스티아·”
하스티아는 차마 더 감응을 전하지 못했다·
입이 다물어진 하스티아를 뒤로한 채 루나브는 남성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제가 벗길까요? 아님 당신이 벗을래요?”
“····”
“말을 안 하시네요? 당신도 저 여자처럼 정신 감응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요?”
남성의 입에선 침묵만 이어졌다·
“제 말을 이해 못 한 것 같은데 제가 벗긴다는 말은 그냥 두 손으로 친절히 벗겨주겠다는 게 아니에요·”
기분이 다소 언짢아진 루나브의 손으로 마나가 발현되었다·
“여차하면 당신 얼굴 아래를 전부 날려버릴 수도 있단 뜻이죠· 그러길 원하시나요?”
남성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허나 가려진 가면 속에서 고된 고민의 흔적이 엿보이고 있었으며 곧 검을 잡지 않은 남성의 왼손이 가면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남성이 가면을 벗어던지니
일이 꼬였다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브라이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를 확인한 루나브의 동공이 순간 미세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빠르게 마음을 다잡고선 경직된 눈으로 물었다·
“우리 초면 아니죠?”
“전 초면인 것 같습니다만····”
“당신은 그리 생각할지 몰라도 전 아니에요· 우린 분명 황성 식당에서 처음 얼굴을 봤고 이후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봤어요· 로열 아카데미에서 말이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절대 아니에요·”
-우우웅
곧 그녀의 손에서 발현된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니 숲속 주변에 투명한 제한 결계가 생성되었다·
“브라이언 켄드릭·”
“···!”
“로열 아카데미에서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 시안 베르트의 호위를 담당했던 유일한 수호 기사·”
브라이언은 차마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우리가 마주쳤다고 해서 딱히 얼굴 붉힐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왜 저를 보자마자 피하신 거죠?”
“가급적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조금 서운하네요? 난 7년 전 브레누에서 탈출하는 당신을 이 한 몸 던져서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순간 그날의 기억이 상기된 듯 루나브는 진심 어린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려 했다는 건 당신의 생각일까요? 아님 당신 주인의 생각일까요?”
“그걸 말씀드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할 필요 없어요· 딱히 당신의 입으로 듣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파지직
앞서 제한 결계가 생성된 것에 이어 돌연 그 주변으로 스파크가 일면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머지않아 당신의 주인이 오겠죠·”
그녀의 눈엔 시안이 올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또렷하게 서려 있었다·
* * *
흔적을 지우려고 급히 나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늦은 것 같다·
정확히 내 앞에서 스무 걸음·
수없이 오가는 인파 속에서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다섯 남자가 보였다·
전부 미스트의 대원들이다·
그것도 당주와 직접 작업을 함께하는 간부급 대원들·
아 한 명은 아니네·
내게 백지의 지령서를 전달해주었던 그 대원까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와 달리 나머지 네 명은 전부 나를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의미 없는 눈싸움을 지속하던 것도 잠시
나는 곧 몸을 돌려 거리가 아닌 골목 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바로 내 뒤를 따라왔다·
빛이 들지 않는 으슥한 골목 한가운데·
발길을 멈춘 나는 이내 몸을 돌려 따라오는 그들과 다시금 눈을 마주쳤다·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무미건조한 내 질문을 그들 역시 질문으로 화답했다·
“임무에 배정받지 못한 대원의 안위까지 신경 쓸 만큼 한가한가 보죠?”
“황성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으라 했던 당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신 겁니까?”
대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얼굴로 거듭 질문을 던졌다·
“듣긴 했죠· 하지만 그러겠다고 승낙한 적은 없습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했다·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장 로랑드를 떠나 황성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십시오· 그렇게만 하시면 저희를 비롯한 당주님께서도 시안님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 그들의 펄럭이는 망토 속에 가려진 오른손이 미세하게 움직인 것이 보였다·
여차하면 검을 뽑겠다는 일종의 준비 동작이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경계 태세·
허나 저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본인들이 전력을 다해 덤벼봤자
날 굴복시키기는 어려울 것임을·
그러면서도 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저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 웃긴다·
나나 저들이나 결국은 미스트와 그 머저리 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인데·
공통의 목적을 앞에 두고서 우리는 왜 검을 맞대야만 하는가?
“당신들도 이번 아린 황녀를 암살하는 임무에 포함된 거로 아는데”
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런 당신들에게 지장이 생긴다면 임무에도 지장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죠?”
그렇게 움직인 오른손으로 품속에 잠든 케이람의 검 자루를 잡은 순간
-쐐액!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