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2)
성녀의 죽음과 빛의 기사단 해체 선언 이후 이루어진 첫 기사단 소집·
빛이라고 하는 신념을 잃어버린 기사들의 눈엔 저마다 불안과 불신 그리고 의혹들이 서려 있었다·
중앙 강당에 모여든 수백의 기사들·
처음 소식이 전해졌을 땐 충격을 받은 일부 기사들이 공식 해체를 앞두고 먼저 탈단을 감행하긴 했으나 아직 그 원형을 잃을 만큼 빠져나가진 않았다·
허나 이대로 아무런 조치나 계획 없이 쭉 흘러간다면 앞으로 더 많은 기사들이 탈단 하는 것은 예정된 일일 터·
누군가는 나서서 그 조율을 해주어야만 했다·
그런 혼란스러운 기사들 앞에 우뚝 솟은 단상 위로 한 노인이 올라왔다·
“···!”
노인의 얼굴을 아는 일부 기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 빛의 기사단의 단장이자 기사들의 실질적인 지도자 제레온 알킨·
그가 몇십 년 만에 기사단 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단상에 올라선 그가 기사들에게 전한 말은 매우 간단했다·
빛의 기사단은 해체가 아닌 개편·
기존의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겠으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기사단이 수행해야 할 역할도 바뀔 것이라 했다·
그 바뀌는 역할에 맞춰 빛의 기사단이란 이름은 더 이상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뿐·
새로운 질서를 따르는 새로운 조직의 이름으로 변화할 것이라 했다·
그 이름하여 리딤(Redeem)· 즉 구원의 기사단·
절망에 울부짖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을 구원의 이름으로 구제해 주는 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며 제레온은 당당히 말했다·
그렇게 빛의 기사단은
구원의 기사단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니
훗날 사람들은 이날을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 날이라 불렀다·
“정말 멋진 연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여운이 가시질 않는군요·”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는 제레온의 앞으로 에쉘이 다가왔다·
“기사들 또한 제레온님의 연설에 깊은 감흥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잠식했던 불안도 이제는 많이 덜어졌겠지요·”
“내 착각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말해주는데 난 그대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했지 함께 한다고 하진 않았소·”
제레온은 바로 선을 그으며 부정했다·
“압니다· 그저 저희가 어떤 질서를 세우려는지 궁금하다 하셨지요·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제레온님께서도 머지않아 저희를 따르시게 될 겁니다· 빛이 아닌 새로운 질서를요····”
새로운 질서란 말에 제레온은 묘한 눈빛을 띄웠다·
“그대들이 말하는 새로운 질서란 게 결국 이전에 빛을 부정하는 존재들까지 모두 아우른다는 것 아니겠소?”
“물론입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타도나 심판이 아닌 구원의 방식으로 이끌 것입니다·”
“내 그대의 아비와는 어느 정도 연이 있는 만큼 하나만 조언해주겠소·”
에쉘은 환영한다는 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웃었다·
“질서를 바꾼다는 게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오· 기존 질서를 따르던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 기존 질서마저 따르지 않던 사람들의 반발심은 더할 테니 말이오· 그 마음 까지 모두 바꾸기 위해선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거요·”
“걱정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들을 물리칠 수 없지요· 단장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안개의 존재들이 가진 위험성을····”
제레온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합니다· 하다못해 이 세상 이외의 것을 추구하더라도 말이죠·”
에쉘은 허리춤에 찬 순백의 장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 * *
<빛의 기사단은 해체가 아닌 개편·>
<새로운 질서를 위한 구원의 기사단· 리딤·>
아침부터 각 도시 및 영지에 퍼진 공문으로 인해 주변이 참 시끌벅적했다·
이게 뭔 같잖은 말장난인가 싶으면서도 여간 거슬리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새로운 질서·
구원의 기사단·
이 땅에 오랜 시간 지속해온 기존의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관념을 재정립한다·
아직 이 일에 황실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구린 줄들이 엮여있는진 모르겠으나
그들이 끼어 있을 거란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이 수년간 머리를 싸매고 짜낸 본 목적을 드러내겠지·
그 목적은 당연히 나와 미스트를 향해 있을 것이다·
그놈이라면 더 큰 것을 바라보고 있다 해도 무방하겠지·
상대의 계획을 무너트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아는가?
단순하다·
바로 상대의 계획을 사전에 모두 알아버리는 거다·
내게 있어 두 번째 인생이란 어쩌면 이 세상을 상대로 가지게 된 최고의 무기라 할 수 있다·
허나 나는 그 무기를 지금껏 너무 과신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뭘 하든 난 전부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
하지만 나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정보를 그들이 취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미지의 정보에 관한 열쇠는
지금 내 눈앞에서 딱딱한 빵조각을 열심히 씹고 계신
이 말 못 하는 엘프에게 있겠지·
‘빵이 정말 부드러워요! 프루이나에선 이렇게 부드러운 빵을 먹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빈말인지 아님 진심으로 하는 말인진 모르겠으나 저건 한입 물면 그대로 이빨이 빠질 것 같은 굉장히 딱딱한 빵이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자 그나마 식당 구실은 할 정도의 아무 곳이나 찾아오긴 했는데 정말 아무 곳에 와버렸다·
설마하니 빵조차 제대로 못 내오는 곳에 와버렸을 줄이야·
그걸 또 맛있다고 먹는 이 엘프가 더 웃길 뿐이다·
구시대의 기록·
이 땅을 살아가는 어느 인간도 알지 못하는 그야말로 미지의 정보다·
네프로디테 성녀는 하스티아로부터 그것을 취하려 했고 성녀가 취하려 했다는 건 그녀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도 원했던 정보라는 뜻이 된다·
하다못해 그 미련한 황녀까지 고작 기사 한 명 데리고 접근했을 정도면 말 다했지·
‘시안님?’
그러고 보면 아린 황녀는 왜 홀로 아퀴젤에 왔던 거지?
설마 몰래 구시대의 기록을 몰래 취할 생각이었나?
‘시안님?’
생각해보니 물어야 했을 말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참 나도 그때는 정말 제정신이····
‘시안님!’
“···!”
뭔가 서운함이 가득 담긴 듯한 푸른 눈동자가 나를 또렷하게 보고 있었다·
정신 감응에 반응했다기보단 아예 자기를 봐달라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었으니 차마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불러도 반응을 못 하세요?’
“뭐 할 말 있어?”
‘그냥· 이 수프 맛있다고요····’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내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아무 건더기도 없는 그냥 동물 뼈를 우려내서 만든 수프다·
이런 걸 맛있다고 말할 정도면 그 척박한 프루이나에선 대체 뭘 먹고 사는 건지 새삼 연민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인연 어쩌고 하며 쿨하게 보내줄 땐 언제고 이제 와 그녀를 다시 내 옆에 둔 이유는 간단하다·
내 옆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기록을 탐할 생각이냐고?
적어도 내 옆에 두면 다른 이들이 탐하려는 걸 방지할 순 있겠지·
신의 보호라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걸 믿고 싶진 않다·
뭐 바꿔 말하면 그 지고해 마지않는 신들이 보호까지 걸 만큼 감추고 싶은 게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소위 말하는 약점이라는 것 말이다·
그 정신 나간 내 물주의 바람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안 볼 수가 없겠지·
‘근데 마검님께서 안 보이시네요?’
“····”
‘주무시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고 생각해·”
깊게 생각해봐야 좋을 게 없는 만큼 그냥 어물쩍 넘겨버렸다·
하스티아는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다가도 다시금 식사를 재개하려는 순간
‘누군가 오고 있어요!’
어떤 기척을 감지했는지 후드 속에 감춘 귀를 바짝 세우며 말했다·
이제야 온 건가?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잘 찾아온 것 같다·
“여 여기 계셨군요· 도련님!”
“좀 늦었다?”
“우 운이 없었나 봅니다· 이 일대를 전부 뒤져보다 마지막에 찾아온 곳이 이곳인지라····”
“오느라 고생했다 앉아·”
“예 도련····”
자리에 앉으려는 그는 문득 바로 앞에 앉은 하스티아를 발견하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련님· 이분은?”
“그냥 일이 좀 있어서 같이 다니고 있는 화이트 엘프·”
“화 화이트 엘프요?!”
뭐 대단한 걸 봤다고 반응 한 번 참 찰지게 한다·
‘시안님 이분은?’
하스티아 또한 초면인 그가 누군지 내게 물었다·
“브라이언이라고 내 종자야·”
“시 시안 도련님을 모시고 있는 브라이언 켄드릭이라고 합니다!”
브라이언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본인을 소개했다·
저 어리버리한 성정은 참 몇 년이 지나도 안 변하는 것 같다·
‘도련님이요?’
“신경 쓰지 마· 그냥 옛날에 쓰던 호칭을 부르는 것뿐이니까·”
하스티아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눈을 멀뚱멀뚱 끔벅였다·
“집 결계는 잘 확인하고 왔어?”
“예! 떠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잘 확인하고 왔습니다· 나나가 멋대로 나가는 게 아니고서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뒷말을 바로 잇지 못하는 건 뭔가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거겠지·
“최근 집 주위로 대원들이 자주 오가는 것 같습니다·”
“대원들이 오간다고?”
“예· 평소보다 더 자주 나타나서 주변을 계속해서 서성였습니다· 크게 의식은 안 하고 있었지만 느낌이 왠지 도련님께서 오셨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아서····”
당주는 내가 정말로 나나의 산책이라도 해주길 바라셨던 건가?
뭐 당주 입장에선 내가 어디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있기를 원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럴 마음이 없다·
아퀴젤에서 있었던 일도 지금쯤이면 귀에 들어갔을 테니 아마 지금쯤이면 날 백방으로 찾아다니고 있겠지
아무래도 내 흔적을 좀 더 지워야 할 것 같다·
“잠깐 나갔다 온다·”
나는 둘을 놔둔 채 그대로 식당을 나갔다·
* * *
어딜 간다는 말도 없이 쌩하고 나가버린 시안·
덩달아 남겨진 하스티아와 브라이언 사이엔 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스윽
하스티아는 먹던 음식을 조심스레 브라이언 쪽으로 내밀었다·
“아 괜찮습니다!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저희 찾느라 주변을 다 둘러보셨다면서요? 배고프지 않으세요?’
“···?”
‘아 설마 정신 감응을 못 하시는?’
공교롭게도 브라이언은 정신 감응이 가능할 만큼 정신계 마법에 능통한 자가 아니었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대체로 정신 감응을 수월하게 해왔던 만큼 하스티아는 역시 자연스레 정신 감응을 한 것이었다·
허나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브라이언은 눈만 멍하게 뜨고 있었다·
“아 혹시 말을 못 하시는 겁니까?”
하스티아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럼 혹시 이런 의사소통은 가능하신지?”
브라이언은 주저할 새 없이 바로 두 손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시각 언어 수어(手語)였다·
‘···!’
브라이언의 수어를 이해한 하스티아는 브라이언과 똑같이 수어로 화답했다·
“아 듣는 건 가능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우연찮게 하나의 접점을 찾게 된 머지않아 그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스티아는 가람 왕국에서 시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브라이언에게 모두 전했다·
“그러셨군요· 저희 도련님께선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정이 무척 많으신 분입니다· 아마 도련님께서도 하스티아님을 지켜달란 의미에서 절 부르신 게 아닌가 싶군요·”
시안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도중
-끼익
식당의 문이 열리며 또 다른 두 남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식당도 많은데 굳이 이런 곳에 오시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고 그냥 이 낡은 식당에 왠지 모를 친숙한 냄새가 나서요·”
하스티아와 브라이언으로부터 바로 뒷자리·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브라이언의 얼굴이 돌연 돌처럼 굳어버렸다·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기억을 빠르게 더듬고 더듬어 본 결과 이는 시안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생활했을 당시 그의 방을 자주 찾아왔던 어느 여인의 목소리와 굉장히 유사했다·
뿐만 아니라 브레누에서 탈출할 당시 가람 학회로부터 자신들을 도와주기도 했던 바로 그····
‘루나브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