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안개의 본질 (3)
구원자·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고난과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 사람이다·
언뜻 이 세상에 없어선 안 될 필연적인 존재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것은 상황에 따라서 여러 의미로 변질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 진 몰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절망을 선사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구원자이니·
제레온은 비올렛의 돌발행동에도 불구하고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이 주름진 늙은 손으로 누구를 구원하란 말입니까?”
“일단은 질서를 잃고 방황하는 빛의 기사들부터 구원해주셔야겠지요· 기사단을 이끈 건 성녀지만 그 안에서 실질적으로 기사들을 이끌어주신 분이 바로 제레온 단장님이지 않습니까? 혼란에 겨운 그들에게 큰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겁니다·”
퇴역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빛의 기사단 출신의 많은 수하들이 따를 정도로 존경을 받는 그이기에
잘 꾸며진 교설로 기사들을 교화시켜 달라는 의미였다·
그래 거기까진 예상한 범주인 만큼 크게 놀랍진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
자신까지 팔아 얻은 그 기사단의 힘을 대체 어디에 쓰려는 건지 제레온은 그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프로디테 성녀는··· 정말로 자결을 한 것입니까?”
“전 그리 보고받았습니다· 설마하니 제 동생이 제게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지요·”
허나 얇게 찢어진 비올렛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의외로군요· 제레온 단장님께선 성녀님과 그리 정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름 함께 했던 시간이 30년입니다· 그리 잘 맞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들 그 긴 세월 동안 알건 알고 모를건 모른 채로 지내왔지요· 허나 제가 아는 네프로디테 성녀는····”
제레온은 황녀의 손을 슬그머니 내려놓는가 싶더니 이내 감은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절대 자결 같은 걸 할 분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아니어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분도 그런 경우였겠지요·”
그 말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네프로디테 성녀는 인간이 아닌 화이프 엘프였다·
“단장님께선 그녀가 왜 가람 왕국에 갔는지 아십니까?”
“화이트 엘프와 관련된 모종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갔다고만 들었을 뿐 자세한 건 모릅니다·”
“그럼 짧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목적은 구시대의 기록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안개의 존재와 맞서기 위해서 말이죠·”
제레온의 낯빛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길지 않은 하나의 문장 속 그의 뇌리를 강하게 자극한 두 말이 있으니 하나는 구시대의 기록과
“안개의 존재 말입니까?”
듣는 순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안개의 존재였다·
“예· 단장님께서도 7년 전 브레누에서 있었던 안개가 빛을 걷어낸 날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절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그 최악의 날 이후 저희는 깨달았습니다· 지금의 저희론 예고도 없이 커져 버린 안개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고····”
‘저희’라고 하는 복수의 지칭이 꽤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혼자가 아닌 다수·
지금의 제레온으로선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안개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모습이라 했습니다· 지금 대륙을 비추는 빛은 그 안개를 걷어낼 수 없지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저희는 어찌해야 할 것 같습니까? 단장님?”
여러 의미가 담긴 황녀의 물음에 제레온은 답이 아닌 의문이 떠올랐다·
그것이 절망적인 상황이라 누가 정의할 수 있겠는가?
아직 우리에게 있어 안개는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이거늘·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나요? 단장님의 참신한 답을 기대했는데 아쉽군요·”
비올렛은 사뭇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저희는 답을 내었습니다· 안개를 걷을 수 없는 빛은 더 이상의 우리의 질서로 작용할 수 없기에 빛이 아닌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요·”
“새로운 질서 말입니까?”
“예· 하지만 네프로디테 성녀는 이를 반대했습니다· 그녀는 오직 빛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선 자결을 택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터벅터벅
황녀의 이야기를 듣던 제레온의 눈동자가 급 문 쪽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두 명의 발소리·
범인의 기운이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발걸음이었다·
“즉 정리하자면 황녀님과 황녀님의 사람들이 새로이 창조하고자 하는 질서에 제가 함께하기를 원하신다는 거군요·”
“바로 맞추셨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바로 답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망인 같은 존재입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를 늙은이를 어디에 쓰실 생각이신지요?”
“아군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비올렛의 답은 두루뭉술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단장님을 원한 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니까요·”
“···?”
“그리고 제 사람들이 아니에요· 제가 그분의 사람인 거죠·”
의외의 사실을 들은 제레온은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고귀한 황실의 일원이 남의 사람임을 자청한다고?
그 어느 때보다 당황한 제레온과 다르게 황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똑똑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를 깨우는 문 두드림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함께 돌아갔다·
“온 모양이네요· 직접 이야기해 보시죠· 우리가 나아갈 새로운 질서를 이끌 구원자를····”
이윽고 문이 열리며 은은한 미소를 품고 있는 남성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존경하는 전 빛의 기사단장 제레온 알킨님께 인사드립니다·”
반짝이는 금발을 휘날리는 미형의 남성이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제레온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어도 연분이 있는 누군가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대륙의 수호자라 불리는 어느 공작가의 주인과 말이다·
“에쉘 베르트입니다·”
그의 허리춤엔 찬란한 빛의 기운을 뿜고 있는 금빛 장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 * *
“분노에 잠식된 스스로를 뛰어넘어야지 암살자의 검을 잡을 수 있다라· 뭐 확실히 함부로 이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네요·”
루나브는 눈을 살짝 치켜올리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손엔 현재 제국의 각 수도원에서 떠돌고 있는 안개의 교서가 들려 있었다·
“이 세상에 책이란 책은 다 읽었다고 자부한 저도 이런 책은 또 처음 보네요· 여유만 있다면 며칠 동안 붙잡고 분석하고 싶을 정도예요·”
그런 그녀의 앞엔 책을 전달해준 슈르츠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현재 기분을 표현하자면 용병 생황 당시 의뢰를 실패하고 돌아오던 것보다 훨씬 더 처량한 상태였다·
“왜 그런 오줌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계신가요?”
“며 면목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루나브님께서 믿고 맡겨주신 의뢰를 이런 식으로 밖에 못해서····”
슈르츠의 자책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기준이 이상하시네요? 전 지금 슈르츠씨가 해주신 일이 매우 흡족하다 못해 놀랄 지경인데?”
“저 정말이십니까?”
“전 빈말 같은 거 할 줄 몰라요·”
세상 무덤덤한 대답임에도 슈르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슈르츠씨께선 정말 미스트에 들어갈 생각이셨나요?”
“예?”
“자신을 뛰어넘는 시련에 응했다는 것 자체가 거기에 어느 정도 들어갈 마음이 있는 것 아니었나 싶어서요·”
“사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습니다· 다만 저를 넘고 싶다는 마음에 응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슈르츠는 대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이에 루나브는 더 묻지 않았다·
“암튼 고생하셨어요· 제가 7년 동안 싸돌아다니면서 얻은 것보다 훨씬 더 값진 정보를 구해주셨네요·”
“근데 혼자 오신 겁니까?”
“네·”
루나브는 뭐 잘못된 거 있냐는 듯 다시 슈르츠를 쳐다보았다·
“다른 학회원분들이나 수호 기사는···?”
“없어요· 몰래 나왔거든요·”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슈르츠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학회가 발칵 뒤집어졌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또 대노하셨을테고요· 그럼 뭐하나요? 전 이미 제국에 있는데·”
이전에도 몇 번 있었던 일이었는지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이제부터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제가 가울에서 여기 브레누로 오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재밌는 소식이 들려오더라고요·”
협상을 타결하고 송환한 네프로디테 성녀의 자결과 그 뒤로 이어진 빛의 기사단의 해체·
넋 놓고 무시할 일은 아닐뿐더러 이는 절대 제국의 일로 국한될 것이 아니었다·
“슈르츠씨는 정말 성녀가 자결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슈르츠는 차마 함부로 답을 낼 수 없었다·
“저희로선 확신할 수 없어요·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추측 정도는 할 수 있겠죠· 그 추측을 확신으로 바꾼다는 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이미 슈르츠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네프로디테 성녀가 자결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그 눈을 보고도 어찌 추측을 안 할 수가 있을까요?”
루나브는 이 전날 협상 자리에서 마주했던 아린 황녀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실로 많은 것을 담고 있던 우수에 찬 눈·
공교롭게도 그리 좋은 것들을 담고 있진 않아 보였다·
이에 루나브는 작은 미소와 함께 슈르츠를 보며 물었다·
“같이 갈래요 슈르츠씨? 황성으로····”
* * *
“매번 미안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구나· 아린·”
“자꾸 그러시면 저도 그런 말씀 말아 달라는 말밖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아바마마·”
인간에게 있어 병(病)은 당사자만이 아닌 보는 이에게도 매우 가혹한 요소다·
그 굳건하고 단단했던 제국의 황제는 이미 없었다·
고통에 젖어 비루하고 쇠약해진 어느 인간만이 남아있을 뿐·
아린은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미소로 애써 감춰냈다·
“미안하면서도 참 자랑스럽구나· 내 빈자리를 너희가 너무나도 잘 채워주고 있어·”
“아직 한참 부족해요· 얼른 쾌차하셔서 저희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주시고 고쳐주세요· 아바마마·”
“그래· 내 너희를 위해서 꼭 그리하겠다·”
디오네 황제는 미소 짓는 아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린·”
“예· 아바마마·”
“너의 근심을 애써 감출 필요는 없다·”
당황한 아린은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너 역시 사람이기에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번민이 있을 거란 걸 안다· 이 아비에게 풀라는 말은 안 하겠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꼭 풀었으면 좋겠구나· 황실을 위해서가 아닌 너를 위해서라도····”
황제가 아닌 아비로서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다·
이에 그동안 쌓아두었던 울분이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아린이었지만
“새겨듣겠습니다· 아바마마·”
당장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황제와 문안을 마친 아린은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휴식 시간도 없이 바로 집무를 재개하려는 그녀에게 레시무스가 다가왔다·
“전 빛의 기사단장 제레온 알킨이 황성에 찾아왔습니다· 지금 비올렛 황녀님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린은 딱히 반문하지 않았다·
“가보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굳이 간다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뭐· 언니가 알아서 잘 이야기하시겠지·”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든 듯 아린은 덤덤하게 집무를 재개했다·
이에 레시무스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아린의 귀에 입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화이트 엘프들의 위치가 파악되었습니다·”
아린은 눈을 크게 번뜩이며 반응했다·
“어딘데?”
“이제 막 가람 왕국의 국경을 넘어 제국 쪽으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스파니아 왕국으로 돌아가진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빠른 복귀를 위해 제국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동안 레시무스는 황급히 제국의 지도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보였다·
“프루이나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루트는 황성 쪽을 가로질러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또한 인간과 되도록 접촉하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이기에 이곳만큼은 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그들로선····”
레시무스의 손가락은 곧 황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곳을 거쳐 갈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황제의 전 부인 디아나 퀴젤의 일가인 퀴젤 공작가의 영지·
아퀴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