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검은 피의 일족 (1)
찬란한 오색의 빛을 뿜고 있는 마법석·
허나 이를 지켜보는 가람 학회의 수장 리겐스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석상과도 같은 시선·
그나마 움직이는 건 고뇌의 흔적이 엿보이는 손가락뿐이었다·
그러던 중 학회원 한 명이 그를 찾아와 보고를 올렸다·
“리겐스님! 지시하신 대로 명단에 있던 학회의 내통자들을 전부 잡아들였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말인가?”
“혹여 연결되어있는 추가 관계자를 조사하고 있긴 하나 적어도 명단에 있던 이들은 아우람 학회 소속의 내통자들이 맞았습니다· 이렇게 전부 맞아떨어진 것이 신기할 정도로····”
리겐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학회원은 차마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집 안에 숨어든 쥐새끼 한 마리가 기둥을 갉아 먹을 수도 있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
어리석은 존재들이라며 신경조차 안 쓰고 있던 쥐들이 어느샌가 몸집을 불려 집안 곳곳을 장악하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리겐스로선 기쁨보단 허탈함이 앞섰다·
“루나브를 노리고 있었다고?”
“예· 조금 말씀드리기 껄끄럽긴 하나 색출 당한 아우람 학회원 한 명이 어차피 저희는 그녀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온전히 다 펼쳐내지 못할 거라며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치욕을 느낄법한 언행에도 불구하고 리겐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부정은 못 하겠군·”
그는 지금의 사태가 자신의 무지함과 무관심에서 비롯되었음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면 계속 모르고 있었을 터·
이미 그 아이는 꽤 오래전부터 좁은 방 안에서 학회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동안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건 둘째치더라도 이제 와서 또 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 그 재능을 학회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도록 거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이행했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7성에 이르는 카론의 마력을 끝까지 버틴 것도 모자라 그 일어설 힘도 없는 상태에 대공간전이까지 써서 유적을 탈출했다?
신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그런 기적은 있을 수 없었다·
설사 신은 아니더라도 곁에 어떤 조력자가 있지 않고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분명 있었을 것이다·
루나브는 아카데미의 선배이자 스파니아의 왕자인 세트 샤하르칸의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지만 리겐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어떤 중요한 비밀을 숨기고 있을 터·
이 비밀을 풀었을 때 비로소 지금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리겐스는 생각했다·
“학회원들을 불러라·”
곧 부름을 받고 달려온 세 명의 학회원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미 복귀하자마자 루나브가 준 명단을 전달함과 더불어 노델리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보고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재 가장 마주하기 싫을 학회장 앞에서 다시 한 번 사건에 대한 보고를 올려야만 했다·
“내가 너희를 왜 불렀는지는 굳이 설명 안 해도 알거라 믿는다·”
“예· 학회장님····”
“너희가 그곳에 본 모든 것을 내게 거짓 없이 낱낱이 고해라·”
학회원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노델리에서 있었던 일을 리겐스에게 전부 보고했다·
다만 셋 모두 유적 탐방에 참여한 인원이 아니었다 보니 루나브가 이야기한 것과 크게 다른 내용은 없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리겐스는 담대한 눈빛으로 물었다·
“루나브와 세트··· 너희가 본 아카데미의 일원들은 그들이 끝이었나?”
“예· 그렇습니다·”
“학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겠느냐?
“저 저희의 보고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라도 있으신지?”
세 학회원들은 어느 누구 하나 그러겠다고 답하지 못했다·
“무엇이 학회를 위한 일인지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리겐스는 대답 대신 경고를 내뱉으며 마치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듯한 분위기를 보였다·
“····”
서로 눈치를 보며 어찌할 줄 모르던 것도 잠시 마른 입술을 깨물던 한 학회원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 사실은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한 명이 더 있었다?”
리겐스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되물었다·
“예! 그동안 저희가 주시해왔었던 그 시···!”
-파지직
갑자기 학회원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고꾸라졌다·
“···!”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주위에 있던 모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학회원은 입에 거품을 문 채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일···?”
-파악!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리겐스가 기절한 학회원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속에 담아둔 무언가를 내뱉으려는 순간 내면에 응집되어있던 마나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이것은 필시 본인의 마나가 아닌 타인에 의해 주입된 마나에 의해 발생한 상황·
확신에 찬 리겐스의 두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언약의 주술!”
상대의 몸속에 소량의 마나 구체를 주입하여 지정한 금기어를 내뱉을 시 내면에서 폭발하게 만드는 마법·
“이 이게 언제?”
당황을 금치 못한 나머지 학회원들의 얼굴은 시퍼렇게 굳어있었다·
표정만 봐도 본인들 몸에 이런 마법이 걸려 있었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
리겐스는 분노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차분한 눈빛으로 쓰러진 학회원을 응시하였다·
대체 무엇을 감추기 위해 이런 답지 않은 짓을 한단 말인가?
아니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다운 것이 있기는 했었는지는 이제는 의문마저 들 지경·
더불어 이 이상 어중간한 의심과 추측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임을 리겐스는 깨닫게 되었다·
-우우웅
학회의 수장이자 9성급 대현자의 마력이 치솟으며 주변에 거센 소용돌이 바람이 일었다·
이와 함께 공간 중앙에 자리한 오색 빛의 마법석에서 공명이 일어났고 곧 바닥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 * *
대륙 제일의 암살 집단인 미스트가 작업 대상을 놓친 경우는 당연하겠지만 흔한 일이 아니다·
설사 놓쳤다 해서 암살을 단념할 조직도 아닌 만큼 그동안 사라진 보리스의 흔적을 쫓기 위해 미스트는 하루도 빠짐없이 추적 작업을 진행했다·
황성을 포함한 제국의 주요 도시 각국의 마법학회 전선 지역인 벨리아스까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접촉할지 한 치도 예상할 수 없었던 만큼 몇 날 며칠을 집중 감시하며 흔적을 찾고자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난 와중
꽤 의외의 장소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슬럼가?”
“예· 우시프 제국 북쪽 도시 액실리움 끝자락에 있는 슬럼가 쪽에서 보리스로 추정되는 자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당주의 미간이 가파른 골짜기처럼 찌푸려졌다·
“액실리움이면 그놈의 연고지였던 곳이지?”
“예· 소재가 의심되는 곳 중 하나였던 만큼 저희 쪽에서도 굉장히 주시했던 곳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언을 보낸 대원들은 그가 맞다는 걸 대체로 확신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토록 고대했던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주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쥐구멍을 바라보는 고양이가 됐군····”
슬럼가라면 보통 낡고 노후 된 빈민촌에 흉악한 범죄가 남발하는 곳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는 좀 다르다·
디오네 황제 즉위 이후 제국에서 거의 없어졌다시피 한 슬럼가 중 유일하게 남은 빈민촌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곳의 주민들은 노예보다도 못한 그러니까 사람 취급 자체를 못 받는다·
왜 사람 취급을 못 받냐고?
이유야 간단하지·
이 땅에 널리고 널린 인간에겐 없는 무언가를 그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검은 피의 일족·
액실리움 슬럼가에 사는 주민들의 몸속엔 새빨간 붉은 피가 아닌 미지의 검은 피가 흐른다·
눈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무지의 검은 피 말이다·
그 외엔?
딱히 없다·
몸에 검은 피가 흐른다고 해서 특별한 힘이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며 나머진 우리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다·
허나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빛의 신 루멘델의 숭배하며 기본적으로 어둠이란 것 자체를 배척하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검은 피라는 것 자체를 좋게 보겠는가?
그럴 리 없지·
그냥 존재 자체가 기피의 대상들이며 그런 그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슬럼가다·
거기에 지금 보리스가 숨어 있는 것이다·
당주의 말마따나 쥐가 쥐구멍에 제대로 숨었다고 볼 수 있지·
솔직히 이쯤 와선 나도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루웬에서 일이 터진 이후 지금까지 한 달·
꽤 잘 숨었다고 하면 잘 숨은 건 사실이다·
그 뛰어난 미스트의 대원들이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흔적조차 찾지 못한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니까·
의문인 점은 굳이 한 달 동안 숨을 필요가 있었냐는 거다·
1황자가 있는 황성으로 가든 에쉘이 있는 벨리아스로 가든
이 평화롭고 따분하기 그지없는 아카데미에 마검의 계승자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을 텐데 용케 참았단 말이지·
뭐 어디든 나타나기만 하면 내 친히 한걸음에 달려가긴 했겠지만·
대업을 이룬 용사가 속세를 떠나 고향으로 귀환한 것도 아니고 구태여 숨어 있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유야 어찌 됐든 놈의 소재가 파악된 이상 내가 할 일은 하나다·
“제가 가겠습니다·”
“····”
당주는 시선을 주는 것은 물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자퇴서도 낸 마당에 더 이상 눈치 볼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저 혼자 가는 게 맞습니다·”
“전부 나가·”
급기야 주변에 있던 대원들에게 전부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설마하니 그 전부에 내가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던 만큼 나는 지면에서 발조차 떼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대원이 나간 뒤
그녀가 담대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끝을 봤더구나·”
끝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아카데미에 자퇴서를 낸 것과 더불어 아린 황녀와의 파혼을 얘기하시는 거겠지·
나는 늘 그렇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예상 못 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약혼을 깨고 아카데미를 나왔다 해서 너에 대한 시선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졌을 일 조금 앞당겨졌을 뿐입니다·”
“액실리움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나로선 널 더더욱 보낼 수 없다는 것까지 덩달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다른 대원들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램버스타에 단독 작업을 보내셨을 땐 언제고 뭘 그리 불안해하십니까?”
“····”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계승자입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마침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승낙의 의사로 받아들인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제 식솔들은 잘 봐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그 난리를 쳐놓고도 내가 봐줄 거라 생각하는 거니?”
“예·”
일말의 망설임 없는 칼 같은 대답에 당주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래는 안 걸릴 겁니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내 의사를 존중해준 건지 아니면 가지 말라 해도 어차피 멋대로 갈 거라는 걸 알고 포기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당주는 점점 멀어지는 나의 뒷모습을 그저 방관하듯 무심하게 바라만 보았다·
나는 그렇게 아공간을 떠났다·
* * *
“인간은 창조주 신의 외형과 내면을 모방해서 만든 피조물이니· 신의 성정을 인간이 답습하는 것은 당연한 섭리·”
금빛을 발하고 있는 순백의 동상 아래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여인·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경건한 자세로 대륙의 빛을 선사하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비단 인간만이 아닌 신의 섭리를 따르기 위한 피조물들은 이전에도 계속 존재해 왔으나 7개의 주선과 7개의 죄악을 조화롭게 드나들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 했습니다· 찬란한 빛줄기 너머로부터 부족한 저희를 항상 내려다보고 계신 당신들처럼 말이죠····”
그녀가 감은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니 마침내 동상의 절제된 눈과 마주하게 되었다·
“피조물된 도리로서 창조주인 당신들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섭리· 허나 어딜 가든 그런 기본적인 이치에 반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죠· 그럼 어찌 될까요? 무리에서 배척당하며 도태됩니다· 그래야만이 기존의 질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내 몸을 일으킨 여인은 구원의 손길처럼 뻗은 동상의 손을 고상하게 어루만졌다·
“허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습성상 오랜 시간 거쳐 관습화된 질서를 바꾼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걸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게 목소리를 내렸다는 건 그 질서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일련의 두려움을 느끼셨다는 걸까요? 의문보단 흥미로움이 앞서네요·”
여인은 동상의 손을 쓰다듬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허나 일전의 경험을 통해 저희는 배우지 않았습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존재뿐· 힘없는 자의 목소리 따윈 결국 무뎌지고 잊혀질 뿐입니다· 300년 전의 그때처럼····”
순간 동상의 하얀 눈동자에서 금빛의 오라가 반짝였다·
단순한 이상 현상 같은 게 아니었다·
이는 신의 뜻을 전달받은 계승자가 마침내 진리를 찾았다는 일종의 계시였다·
“당신의 계승자가 비로소 진리를 찾은 모양입니다· 허나 어째서인지 그 진리의 빛이 크게 느껴지진 않는군요· 저희가 찾아야 하는 진리가 아직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요?”
창문 너머로 흘러들어온 햇빛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으며 마치 신의 은총이 내려진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여인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초연한 미소로 동상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