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이름 없는 유적 (4)
짧은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마을 뒤편에 있는 이름 없는 유적에 이르렀다·
일단 첫인상을 논하자면 굉장히 신기했다·
위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는 사각추(四角錐)형의 돌로 쌓은 건축물인데 여태 봐왔던 유적들과는 조금 색다른 단조로우면서도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허나 외관 자체는 그리 거대하지 않았다·
예감 상 문을 열면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 것만 같았다·
탐사 인원은 나를 비롯해 세트와 루나브 그리고 카론을 주축으로 하는 가람 학회의 마법사 5명까지·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문 앞에 이르니 벽 한복판에 새겨진 글자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
3살짜리 애가 그림을 그려도 이거보단 잘 그리겠네·
글자라기보단 사실상 낙서에 가까웠다·
뭔가 의미가 있나 싶어 학회원들도 글자를 뚫어지게 살펴보았지만 그들 역시 난해함을 느꼈는지 저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할아범이 말한 게 이거였구만?”
그런 와중에 세트가 입을 열었다·
“이 글자 알아보시는 거예요?”
“물론이지· 이건 우리 샤하르칸 일족만 읽을 수 있는 일종의 고대어 같은 거야· 대충 들어가고 싶으면 주문을 외치라는 거지·”
“무슨 주문인데?”
“우리 일족에게만 전해지는 기도문 같은 게 있어· 처음 왔을 땐 별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서 대충 외치고 넘어갔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하겠네· 잠깐 뒤로 물러들 나있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의 지시대로 열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의식을 시작한 듯한 녀석의 주위로 모래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잠시 후 진동음과 함께 유적 주변에 지진이 일었으며 그 진동이 멈춘 순간 세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돌문이 쩍하고 열렸다·
“어이 거기 마법사분들? 내가 들어가기 전에 하나 묻겠는데 이 유적에서 정확히 뭘 하고 싶은 거요?”
출입구를 떡하니 막은 세트가 카론을 보며 물었다·
“저희야 이 유적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일단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여러분들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뭐 상관은 없겠다만 할아범이 말한 그 마수 놈은 건드리지 마쇼! 그놈은 나와 시안이 처음부터 찍어놓은 사냥감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카론은 미소를 지으며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후배님도 포함이야! 혹여 우리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해도 절대로 나서면 안 돼?”
“그렇게 할게요· 세트 선배한테만····”
뭔가 뒷말이 심상치 않았던 것 같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름 없는 유적을 지키는 마수 사냥(?)을 위한 유적 탐방이 시작되었다·
“인도의 빛!”
학회원 한 명이 조명 마법을 시전하면서 어둠에 가려져 있던 유적의 내부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통로가 생각보다 넓네요?”
답답한 지하 미로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사람 다섯이 나란히 일자로 걸어도 넉넉할 만큼의 너비였으며 높이는 세트 녀석 키의 딱 두 배 정도였다·
성검과 마검이 잠들어있던 빛의 신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구조·
오죽하면 약간의 거부감마저 생길 것 같은 공간이었다·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하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서늘함이 느껴지는 것은 덤·
생물체의 기운이나 마력의 기운 하다못해 살기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유적은 무슨 의도로 만들어진 걸까요?”
유적을 둘러보던 루나브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구시대에서 왕의 무덤으로 쓰였다 하더라고 여기 말고도 비슷한 유적들이 스파니아 왕국 곳곳에 있어·”
“거기에도 마수가 있나요?”
“아니· 대부분 시체는커녕 벌레 한 마리도 찾을 수 없는 빈집이야· 그래서 이 유적이 더 특별하다고 볼 수 있지· 다른 곳들과 다르게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으니까·”
뭐 이론상 생명체라기보단 마법으로 소환된 가디언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다만 어떤 연유로 무엇을 지키기 위해 소환 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지겠지·
그게 하찮은 보석 나부랭이라면 이를 지키는 가디언 역시 별 볼 일 없기 마련
허나 세상에 둘도 없는 진귀한 유물이라도 묻혀있다면 당연히 그 수준에 걸맞은 존재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
“혹시 마수의 이름이 왜 레미하람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자코 뒤따르던 카론이 세트를 보며 물었다·
이를 의식한 루나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음?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몰라· 그냥 마을 대대로 그렇게 불러왔나 보더라고· 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글쎄 아마 너를 제외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지 않을까 싶다·
그 정체 모를 마수의 이름에 엄청나게 큰 의미가 담겨있을지도 모른다고·
큰 무리 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것도 잠시
눈앞에 좌우 정면으로 나누어진 갈림길이 나타났다·
“어랍쇼? 전에 왔을 땐 이런 거 없었는데?”
앞장서던 세트가 당황한 나머지 머리를 긁적였다·
유적에 들어온 이후 줄곧 외길로 걸어온 만큼 잘못된 길로 새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모를 땐 역시 직진이지! 일단 앞으로 가보자!”
혹시 몰라 분필로 간단히 표시한 후 그가 가리킨 정면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쿵!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정면에서 생명체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쿵! 쿵! 쿵!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반면 우리의 발은 석화라도 걸린 듯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다·
벽과 바닥이 울릴 정도의 묵직한 중량감·
평범한 사람이 낼 수 있는 발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잠시 후 세트를 제외한 모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이계의 생물체를 마주함으로써 절로 느껴지는 낯섦과 거부감·
허나 내 기분은 조금 달랐다·
저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시뻘건 불길을 머금은 듯한 붉은 피부 머리 양쪽에 돋아난 두 개의 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퇴화한 것 같긴 해도 분명하게 형태를 갖추고 있는 등 뒤의 날개까지·
그동안 내가 봐왔던 마수 중 저 생명체와 비슷하게 생긴 마수가 딱 하나 존재했다·
그 이름도 악명 높은 발록(Barlog)·
마계 초입 레메아 골짜기가 아닌 훨씬 더 깊은 지역에 사는 마수로 순수하게 힘만 따졌을 땐 드래곤에 필적한다고 전해지는 거물급 마수였다·
물론 내가 봤었던 진짜 발록들보단 크기도 작고 맥아리도 상당히 없어 보인다만 일단 외형으로 봤을 땐 영락없는 발록의 모습이었다·
설마하니 진짜 마수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진짜 이 유적에 뭔가 있기는 있다는 건가?
“드디어 나타나셨구만! 내가 다시 와주길 너도 기다렸지?”
반면 세트 녀석은 환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다소 도전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발록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적당한 거리에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 마수 지금 거리 두기를 하고 있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나브는 못내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꼴을 보아하니 먼저 공격할 움직임은 없어 보였다·
아까 촌장의 말마따나 선을 넘지 않으면 딱히 제지할 의사조차 없는 것 같긴 한데····
결국 이 유적에 다른 생명체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저 마수의 이름이 레미하람이라는 거잖아?
소환한 사람이 심심풀이로 짓진 않았을 테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결국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저 마수를 제치고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을 듯 보였다·
“자 그럼! 이 몸이 먼저 납신다!”
준비를 마친 세트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마나가 전승된 그의 주먹에 금빛 오라가 발산되었으며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에 맞받아치려는 발록 역시 주먹을 내질렀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변에 거센 파동이 일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마수에게 검이나 마법이 아닌 주먹을 내지른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보다 훨씬 무모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안 할 행위라지만 그래서인지 저 바보 왕자에겐 또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잠깐의 힘겨루기 끝에 물러난 그가 주먹을 털며 말했다·
“호! 그새 더 단단해진 느낌이네? 너도 수련 좀 했나 보다?”
농담을 던졌다 해서 답을 해줄 존재는 아니었다·
대신 발록의 한 손으로부터 익숙한 붉은 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마 마나?”
어지간한 마법사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움직임·
그것은 하급 불 속성 마법을 시전 하기 위한 마나의 발현이었다·
-휘이익!
이윽고 발록의 손에서 떠난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불덩이가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이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론이 앞으로 나섰다·
“아쿠아 배리어!”
주문과 동시에 세트의 눈앞으로 물기둥이 치솟았다·
물기둥과 맞닿은 불덩이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어이! 내가 나서지 말랬잖아!”
세트는 진심으로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걱정되는 마음에!”
“헛짓거리 말고 뒤로 물러나 있어! 그냥 얌전히 유적 구경이나···!”
-쿠구구궁
갑자기 주변에 굉음과 함께 울림이 일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빨리 발록이 있는 곳을 쳐다봤지만 녀석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할 뿐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
하지만 이내 알 수 있었다·
수상한 움직임은 앞이 아닌 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선 재빨리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콰쾅!
대뜸 우리가 서 있는 천장 쪽이 무너지면서 낙석들이 떨어져 내렸다·
“피하십시오· 루나브님!”
루나브의 팔을 붙잡은 카론이 그녀를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꺄악!”
나 또한 낙석을 피하기 위해 일단은 몸을 앞쪽으로 빼내니 무너진 낙석이 통로를 틀어막게 되면서 양쪽이 자연스레 갈라져 버렸다·
“선배!!”
무너진 낙석 너머로 그녀의 다급한 부름이 일었다·
목소리는 멀쩡한 거로 봐서 다치진 않은 듯했지만 마냥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일이 또 더럽게 꼬였네·
“이건 또 뭔 상황이야!”
그나마 내 옆에 남게 된 바보 왕자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허나 절규하는 것도 잠시 녀석은 다시금 눈빛을 또렷이 세우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밖에 없겠구나 시안! 어서 녀석을 해치우고 돌아갈 수단을 찾아야겠다!”
의지를 굳힌 세트는 다시금 주먹을 다잡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맞다·
퇴로는 막혀버렸지만 발록의 눈은 여전히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결국 저놈을 쓰러트린 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준비운동이라도 하고 있어라 시안! 내가 먼저 손 좀 봐주고 있을 테니!”
세트는 또다시 막무가내식으로 발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바보 왕자가 머리는 무식해서 그렇지 능력만큼은 사실 천재 수준에 가깝다·
허나 그렇다 해서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이 비록 5성을 넘어 6성에도 육박할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곤 하나 그 정도론 저 발록의 털끝 하나 뽑을 수 없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 됐지·
보는 눈이 적어졌다는 건 그만큼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음을 의미하니까·
나는 품에서 고이 간직해두었던 케이람을 꺼냈다·
[뭐야? 자고 일어났더니 이건 또 뭔 상황이래?]
“아주 재밌는 상황····”
한 손엔 케이람을 한 손엔 마나를 발현시키며 전방을 향해 달려나갔다·
살기를 내뿜고 있는 발록이 아닌
놈에게 정신 팔려있는 세트를 향해·
-퍽!
“으갹!”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이 푹하고 고꾸라졌다·
쓰러진 몸을 한 손으로 받친 뒤 그대로 벽에 기대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손을 그의 얼굴에 대고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잘 잠들 아니 잘 기절했다·
준비를 마친 나는 다시금 발록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니 저 맥아리 없는 놈은? 설마 저 발록 껍데기 같은 놈의 이름이 레미하람이라는 거야?]
“뭐 일단은 그러지 않을까?”
그 이름에 걸맞은 놈인지 지금부터 확인은 해봐야겠다만 솔직히 기대는 안 된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발록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어중간한 반격의 여지를 주는 건 불필요하다·
지면이 발에서 떨어진 0·5초의 시간·
마나가 전승된 케이람의 도신이 발록의 몸과 맞닿은 순간 청량한 검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두 동강으로 갈라졌다·
더 볼 것도 없다 생각하여 여유롭게 안착한 다음 뒤를 돌아본 순간
“···!”
위협적인 바람 소리와 함께 발록의 묵직한 손톱이 눈앞에서 휘둘러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