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징조 (1)
화합의 도시 루웬에 위치한 아에르의 아공간·
광장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리카에게 대원 한 명이 다가왔다·
“에쉘 베르트는 아직 벨리아스에 있다 합니다·”
“특별한 건?”
“아직은 없습니다· 황실 일가가 이미 황성으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돌아갈 기미는 안 보인다고 합니다·”
“황성 쪽은?”
“수도 곳곳에 배치된 대원들이 밤낮으로 주시하고 있긴 하나 아직 보리스에 대한 단서는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좀 더 철저하게 감시해· 미세한 마력이라도 감지된 게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예 당주님!”
대원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지시를 받아들였다·
“시안은?”
“조금 전 브레누에 있던 일행들을 데리고 아카데미에 복귀했다고 합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보고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시리카가 처음으로 입술을 움찔했다·
마치 미소를 지으려다가 만 것처럼·
“저 당주님· 저희도 이제 슬슬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대비?”
“저희가 아무리 경계를 하고 있다 해도 결국 타깃을 놓친 상황에 언제 어디서 당주님의 대한 것이 퍼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대원들과 함께 아카데미를 벗어날 준비를 하심이····”
“어차피 놈한테 얼굴 깐 건 나 혼자잖아?”
질문보다 빠른 답변에 대원은 말문이 막혔다·
“그 그렇긴 하지만····”
“그럼 상관없지 않겠어? 어차피 일이 생겨도 나 혼자 수습하면 되는 건데? 괜스레 너희까지 대비할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 하지만!”
뭔가 더 할 말을 이어나가려는 것도 잠시 대원은 머지않아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당주님·”
보고를 마친 대원은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 홀로 남은 시리카는 아무런 말이나 행동 없이 공간 한쪽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지금이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이란 걸 그녀 스스로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조직 계승자 그리고 자신들이 모시는 검은 안개의 신까지·
자칫 그동안 유지됐던 미스트의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시리카의 얼굴엔 작은 근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뭔가 굳건하게 믿는 무언가가 있다는 듯이·
“회귀자라····”
그녀의 직선을 유지하던 입술이 회귀자라는 말과 함께 반원으로 그어지고 있었다·
* * *
제국의 수도 세벨리너스로부터 마차로 하루 정도 떨어진 퀴젤 가의 영지·
이른 아침부터 영지민들의 입이 꽤 분주하게 움직였다·
퀴젤 가의 전 영주이자 현 로열 아카데미의 총장 쿤델 퀴젤이 복귀했다는 사실이 퍼졌기 때문이다·
공작 직에서 물러난 이후 약 10년 만의 복귀·
평범한 영지민들을 비롯해 영지의 주요 관리자들까지 모두의 관심이 쿤델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퀴젤 가의 저택 안 집무실·
본래는 가주이자 영주인 ‘피를로 퀴젤’ 공작이 집무를 보는 장소였지만 오늘만큼은 수행원처럼 손을 곱게 모으며 책상 앞에 반듯이 서 있었다·
얼굴에선 식은땀마저 흐르고 있는 상황·
그의 앞엔 아버지이자 아직까지 가문에서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쿤델 퀴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공작 직을 내려놓은 지 어언 10년이다· 분명 그사이에 우리 가문은 더욱 부흥했다고 들었건만 어째 세금은 늘고 영지 운영비는 줄어들었구나·”
쿤델은 설명해보라는 식으로 자신의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 그게 근 몇 년 사이 황실 쪽으로 돈이 좀 들어간 터라····”
“뭐 때문에?”
“여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품위 유지비라던지····”
“황실 일가를 위한 품위 유지비라···· 그깟 품위 유지비가 1년 영지 운영비에 반을 지불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나?”
변명거리를 찾기 위한 머리 굴리는 소리가 밖까지 다 들릴 지경·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한 피를로 퀴젤은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알 만큼 아시는 분께서 왜 이러십니까?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매년 네펠리스 후작 가에선 저희의 1·5배나 달하는 금액을 황후 가에 지원하고 있습니다! 네펠리스 후작은 진심이에요! 그자는 정말로 자신의 핏줄을 황제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쿤델은 말이 없었다·
“아버님도 루이넬 황자가 황제가 되시는 걸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번 전선 순방에선 비올렛 황녀가 실종되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네펠리스 가에서 손을 쓴 걸 수도 있어요! 그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도 비올렛 황녀에게 수호 기사를 증원하라 명하신 것 아닙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쿤델은 이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내가 니들을 나무랄 처지는 아니겠지·”
“예?”
“하나 묻겠다· 피를로· 넌 루이넬이 황제가 될 수만 있다면 황실가의 모든 일원이 죽어도 상관없느냐?”
“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피를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퀴젤 가에서 황제만 나올 수 있다면 사실 아무 상관 없지 않겠습니까? 권력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고 어차피 지금 같은 상황에선 평화적인 황위 계승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그 생각은 너를 비롯한 루이넬도 마찬가지겠지?”
“그 그렇지 않겠습니까?”
-쾅!
참지 못한 쿤델이 마침내 책상을 내려치며 억눌렀던 분노를 표출했다·
“피로 더럽혀진 황좌는 악마가 만든 보석과도 같은 것이거늘!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간단한 이치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이냐!”
쿤델의 눈엔 살의에 가까운 거센 분노가 서려 있었다·
“다른 말 하지 않겠다· 오늘부로 황실 일가 아니 루이넬에게 가는 모든 지원금을 끊어라!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더 확인할 가치도 못 느낀 것일까?
감정에 격분한 쿤델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황성으로 갈 것이다!”
방을 나가는 그의 발걸음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 * *
제국 서부경계 벨리아스 내 베르트 가의 저택·
-똑똑
조금은 다급한 노크와 함께 한 남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에쉘의 종자 켈린이었다·
“에쉘님· 루이넬 황자님으로부터 또 전언이 왔습니다· 대체 언제쯤 황성으로 복귀할 것이냐는 내용입니다만····”
다소 심각한 켈리과 다르게 에쉘의 표정은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고상한 손짓으로 차를 음미하는 모습에선 어떠한 불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방을 마친 황실 일가가 황성으로 돌아간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었다·
본래라면 수행원으로서 2황녀와의 동반복귀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에쉘은 여전히 벨리아스에 남았다·
표면상으론 기사 세실리아의 죽음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체 발견 직후 알아서 처리하라는 지시만 내렸을 뿐 정작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창가에 앉아 은은한 미소를 띠며 상념에 잠기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이 이제 그만 황성으로 복귀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켈린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에쉘은 말없이 창밖을 보며 미소만 짓고 있었다·
“바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아카데미의 쿤델 총장이 조금 전 영지에서 황성으로 출발을····”
“제가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잠자코 있던 에쉘이 마침내 입을 여니 켈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뭔가 이상했죠· 언제부턴가 세웠던 계획이 자꾸만 틀어지고 망가져만 갔으니까요· 항상 완벽을 자부했던 제가 이렇게 꼬인 적도 없었을 만큼····”
켈린의 등에서 한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생각해봤습니· 나의 계획을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아는 것은 아닐까? 혹은 내게 들어올 정보를 누군가가 차단하는 것은 아닐까?”
에쉘의 말엔 웃음이 가득했지만 켈린은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들은 이상 깨닫지 못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가 지금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보리스에겐 아직 연락이 없었습니까?”
“예····”
“2년 전 저를 위해 아카데미행을 자처했던 당신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죠·”
창문 너머를 향해있던 에쉘의 시선이 마침내 켈린에게 향했다·
“어떤 정체불명의 세력이 막내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보리스가 당하기라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감감무소식일 리도 없을 텐데 말이죠·”
켈린으로선 딱히 반문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번엔 갔다 와 보겠단 말도 안 하시는군요?”
“···!”
“예로부터 의심의 근원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켈린 당신은 저와 오랜 시간을 보낸 제 종자입니다· 저를 위해 많은 일을 해주었죠· 그래서 제 나름대로 당신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해왔습니다·”
켈린은 시선을 회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근 2년간 봐왔던 당신의 모습은 제가 알던 켈린과는 묘하게 달랐습니다· 전체적으론 동일해보였지만 세부적인 모습에선 좀 달랐다고 할까요? 마치 거짓된 인격이 본래의 인격을 연기하는 것처럼····”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눈을 똑바로 보세요· 켈린·”
울며 겨자 먹기의 심정으로 다시 에쉘의 눈을 쳐다본 순간
“···!”
에쉘의 눈으로부터 선홍빛의 광채가 번뜩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켈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커헉!”
그러자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이 그의 목을 옥죄였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2년 전 그날 만약 누군가가 마법으로 당신의 인격을 바꿨다면 어떨까? 나를 위한 인격이 아닌 정체불명의 누군가를 위한 당신으로 말이죠·”
자리에서 일어난 에쉘은 고통스러워하는 켈린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켈린· 당신은 정말 제가 알던 저를 위해 사셨던 켈린이 맞습니까?”
숨구멍을 짓누르는 고통을 견디며 켈린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에 에쉘님! 저 저의 충정을 의심치 마시옵소서···!”
허나 간절한 외침에 돌아오는 것은 허망한 웃음뿐이었다·
“그건 지금부터 확인해봐야 알겠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충정이 과연 저를 위한 것인지 낱낱이 확인을····”
‘들리십니까 에쉘님?’
켈린의 턱을 쥐며 조소를 짓고 있던 것도 잠시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퍼졌다·
“보리스?”
환청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입이 아닌 생각으로 의사소통을 전달하는 정신계 마법의 일환·
다소 불안정한 울림이 있긴 하나 이것은 보리스가 자신에게 보낸 분명한 ‘정신감응(Telepathy)’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전하겠습니다·’
보리스는 전후사정을 모두 자른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뒤틀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부정의 검은 안개가 빛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성검을 찾으십시오·’
“···!”
에쉘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