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변화의 바람 (3)
때는 전생의 어느 날·
우시프 제국이 가람 왕국과의 전면전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평소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검을 닦고 있던 시안에게 보리스가 찾아왔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시안 공·”
“무슨 일입니까 보리스?”
다소 뜬금없는 방문이었다·
우시프 제국 마법학회장 보리스 르헬름·
시안은 전쟁 준비를 위해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그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닙니다· 단지 큰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시안 공과 담소를 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는 악의 한 점 없는 순박한 미소와 함께 시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시안의 시선은 덤덤했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시안은 이 남자가 에쉘의 측근이란 점만 사라진다면 언제든 암살할 생각을 하고 있던 만큼 그와 정답게 대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딱딱한 언행에도 불구하고 보리스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시안 공의 마나 구체를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마법 구체 말입니까?”
그나마 낮게 깔려있던 의심이 조금 더 얹어진 순간이었다·
“오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시안 공의 마법 등급이 6성 정도 되시지요? 꽤 오랫동안 등급 상승이 없던 거로 압니다만 혹여 마나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닌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이에 시안이 기분이 굉장히 묘해졌다·
불과 삼십 대 나이에 9성급 경지에 오른 희대의 천재 마법사란 자가 다짜고짜 자신의 마나를 봐주겠다니·
순수한 마음의 선행인지 같잖은 오지랖인진 모르겠으나 시안으로선 딱히 보여주고 싶단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기이잉
허나 마음과 달리 시안은 자신의 마나 구체를 생성해 보리스에게 건네주었다·
물론 온전한 마력의 구체는 아니었다·
구체를 건네받은 보리스는 대단히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실로 경이로운 속성수치가 아닐 수 없군요· 역시 듣던 대로 대단하십니다!”
“···겨우 마나 구체만으로도 그런 게 보이시는 겁니까?”
“구체로부터 뿜어지는 마력을 제 나름대로 분석할 뿐입니다· 보잘 것 없는 재주일 뿐이지요·”
학회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시안의 마법 등급은 6성·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한낱 기록에 불과했다·
시안은 실제로 7 8등급을 넘어 어둠 속성에 관련해선 마법의 최고 등급이라 할 수 있는 9성 등급 마법까지 이미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뭐랄까요? 비록 마력은 적지만 그 안에 담긴 잠재능력이 엄청납니다· 실로 무한한 가능성이 보이는군요!”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천재 신입생들이나 들을 법한 말이었다·
칭찬보다는 조롱으로 들렸는지 시안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국 제일의 기사님께 무한한 가능성이라니 제 언행이 언짢았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더 발전할 기미가 있다는 말이겠죠· 그럼 에쉘 형님께 더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좋지 않겠습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보리스·”
시안의 입에서 뜻하지 않게 에쉘이 언급된 순간 보리스 입술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전 시안 공을 볼 때마다 참 흥미롭단 생각이 듭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저도 에쉘님의 은총을 받아 그분께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지만 솔직히 그 충의만큼은 시안 공을 못 이길 것 같거든요· 에쉘님에 대한 시안 공의 마음은 단순히 우애와 충의를 넘어 그 이상의 경지이지 않습니까?
시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거 없습니다· 그저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 생각해 마땅히 있을 뿐· 그건 보리스 당신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저나 당신이나 형님 곁에 있을 때 비로소 그 존재가치가 또렷이 빛날 테니 말입니다·”
“지극히 옳으신 말입니다· 허나 시안 공께선 빛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고 봐야겠군요····”
순간 시안의 눈초리가 짜릿하게 세워졌다·
심적으로 매우 불쾌했으나 딱히 표출은 하지 않았다·
언제가 될 진 몰라도 그는 결국 자신의 손에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다만 그 순간이 좀 더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
당시엔 그렇게 지나갔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시안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마나 구체를 넘겨주었던 순간 아니 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 * *
냄새가 났다·
물론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마치 나중에 처리하려고 잠시 놔두었던 쓰레기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느낌·
그래서 나와 봤다·
그리고 마주쳤다·
당장에라도 사지를 찢어 짐승의 먹이로 던져줘도 시원찮을 그 면상을·
보리스 르헬름·
우시프 제국의 마법학회장이자 황제의 오른 팔·
악마의 손을 잡고 내 뒤통수를 쳤던 바로 그놈이다·
그래도 에쉘을 마주했을 때만큼은 아니었기에 순간적으로 치솟은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허나 그 억누름도 오래가진 않았다·
놈의 앞에 있는 어느 미련한 황녀가 뭣도 모르고 자신의 마나를 넘기려는 모습을 본 순간
억눌렀던 분노가 이제는 살기까지 동반한 채 분출되고 말았다·
-꽈악
황녀의 팔을 잡은 오른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황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 것
만약 여기가 아카데미가 아닌 황성이었다면 난 중죄인으로 몰려 끌려갔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 중 일부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검 자루에 손을 대고 있었다·
알 바 아니다·
설사 진짜로 뽑아 내 목에 칼을 들이댄다 해도 상관없다·
내 목을 겨눌 수십 수백 개의 날붙이들보다 내 눈앞에 자리한 이 한 명의 인간이 내게는 더 위협적일테니·
“시 시안! 아파! 놔줘!”
그녀가 고통을 호소한 순간 손목의 힘이 자연스레 풀려났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니 그녀의 가녀리고 하얀 피부에 붉은 손자국이 올라온 것이 보였다·
“괘 괜찮으세요 황녀님?!”
레시무스가 황급히 다가갔다·
“응 난 괜찮아····”
크게 상해를 입은 건 아니지만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레시무스의 시선은 바로 나에게 향했다·
“이게 무슨 짓이세요 시안님? 감히 황녀님 몸에 손을 대시다니요···!”
열세 살 소녀답지 않은 굳은 기사의 눈빛이 나를 잔뜩 쏘아 붙였다·
“아니야! 괜찮아 레시무스!”
이를 황녀가 재빨리 만류했다·
“시안이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봐! 내가 낯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서 그랬던 거지? 이분은 아카데미에 새로 부임하신 보리스 교관님이야!”
“교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이런 아무래도 제 잘못인 것 같습니다! 전 그저 아린 황녀 아니 아린 학생의 마력을 확인해보고 싶어 부탁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시안 학생에게 오해를 드린 것 같습니다!”
웃기고 있네·
속에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교관이 학생의 마력을 뭐 하러 확인하죠?”
“예?”
“어차피 학사기록에 전부 남아있을 텐데 굳이 사적으로 찾아와서 확인할 필요가 뭐 있냔 말입니다?”
“그 그것이····”
어색이 지은 미소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저런 어리바리 하고 모자란 모습이 철저하게 연기된 모습이라는 것을·
“그만해 시안! 학생의 마력 정도야 선생님께서 확인해볼 수도 있는 거잖아? 이렇게 흥분할 필요 없어!”
황녀가 이제는 내 손을 잡으며 만류했다·
흥분할 필요 없다고?
지금 본인이 어떤 꼴을 당할진 알고 저런 말을 지껄이는 건가?
어이가 없어 대꾸할 말조차 안 나왔다·
“시안 학생이라 하셨죠?”
그가 나를 불렀다·
“시안 학생과는 한 번 자리를 만들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시안 학생의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 제가 정식으로 찾아봬도 괜찮을까요?”
여기서 크게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다·
보리스 르헬름·
훗날 제국의 마법학회장이자 에쉘의 오른팔로 군림하게 될 남자다·
허나 그는 내가 아카데미의 학생으로 재학하는 동안 교관으로 부임한 적이 없었다·
새로운 교관?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교관들의 변화야 매 학기 마다 늘 상 있는 일이었다·
수차례 거쳐 갔던 그들의 얼굴 따위 내 딴엔 기억도 안 나고 애초에 알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르다·
결코 우연 따위에 휘둘려 이곳에 왔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보리스가 이곳에 온 연유는 필시 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이상 나 역시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시죠·”
보리스는 그렇게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난 좀처럼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흥분이 어느 정도 사그라지고 나니 그제야 남은 주변인들에게 시선이 갔다·
“····”
왜 다들 아직 안가고 있는 거지?
“역시 알고는 있었지만 선배 대단히 과격한 남자셨네요?”
한동안은 학회에 갇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루나브가 묘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
뭐 여전하다 못해 더 날카로워진걸 보니 하트 커브를 뗀 것에 대한 부작용은 없어 보였다·
“···오 오랜만이네 시안?”
그런 와중에 옆에 있던 아린 황녀가 멋쩍게 인사하였다·
나는 화답대신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방금 전 무례는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상황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황녀는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아니야! 괜찮아! 오해가 풀렸으면 됐지 뭐! 그 그러니까··· 날 걱정하는 마음에 그랬던 거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딱히 그런 생각으로 막은 건 아니었다만····
아니 맞다고 해야 하나?
만약 황녀가 아닌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이 보리스에게 마나 구체를 넘겨주려 하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과연 방금처럼 나서서 제지할 수 있었을까?
일단 정황상 그렇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 보였다·
“조 조금 의외였달까? 시안이 그렇게 흥분한 모습은 또 오랜만에 본 것 같아·”
글쎄 딱히 이 여자 앞에서 흥분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난다만 자칫 곤란할 수도 있을 상황을 그녀가 무리 없이 넘겨준 건 맞다·
하지만·
“다음부턴 하지 마십시오·”
“응?”
“황녀님의 마나 구체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거나 넘겨주는 일 말입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따 딱히 잘못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다른 것도 아니고 그냥 내 마나 구체를 보여준 것뿐이잖아· 그게 무슨 문제라고····”
“마나 구체가 문제인 게 아니라 황녀님께서 무언가를 그리 쉽게 주려 했다는 게 문제인 겁니다· 제국의 황녀라는 분이 자신의 소유물을 아무에게 막 내보여서야 되겠습니까? 뭐든 사소한 거라도 대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황녀는 어이없다 못해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억울하겠지·
나도 안다· 억지라는 거·
그래도 이거 하나 만은 전하고 싶었다·
인생 꼬이기 싫으면 그 녀석이랑 가까이 붙지 말라고·
뭐 그렇다고 온전히 받아들일 거란 생각도 안 들지만·
아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펄쩍 뛸 것이····
“그래 알겠어····”
체념한 듯 힘 빠진 목소리에 눈이 저절로 번뜩였다·
“학생이기 전에 황녀인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가 또 미련했던 모양이네····”
뭐야?
이렇게 쉽게 인정한다고?
아니 한 번 정도는 부정 해야지 그래야 나도····
“···!”
뭔가 머리의 사고가 촛불 끄듯 꺼져버린 느낌이다·
뭐지 저 얼굴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있긴 하나 내 눈엔 버젓이 보였다·
장담하건대 내가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던진다면
그녀는 분명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