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변화의 바람 (1)
시안이 아카데미를 떠난 지 벌써 보름·
늘 그렇듯 한낮의 꿈나라 여행을 마친 나나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웅~ 잘 잤다!”
급성장으로 인해 몸이 부쩍 자라긴 했어도 잠이 많은 건 여전했다·
기분 좋은 탄음을 내며 방 밖으로 나오니 창가 쪽에서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에밀리가 보였다·
벌벌 떠는 몸과 불안에 가득 찬 눈동자·
무슨 일인진 몰라도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에밀리 언니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어디 아픈 거예요?”
악의 한 점 없는 물음에도 불구하고 에밀리는 정색하며 말했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고? 그럼 좋을 수가 있겠니?”
나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련님이 자리를 비우신 지 벌써 2주가 지났어! 그것도 혼자가 아닌 케이람이라고 하는 어느 얼굴도 모를 여자랑! 지금껏 편지는커녕 아무런 기별도 없는 마당에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니?”
시안이 절벽 밑으로 떨어졌을 때도 일말의 걱정조차 안 한 에밀리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동안 시안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스스로 자부해 왔던 그녀다·
막상 자기도 모르는 여자랑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휴양(?)을 떠났다 하니 이게 웬 뚱딴지같은 일일까 싶은 노릇·
사실 걱정이라기보단 울화에 가까웠다·
“에이! 파파가 그랬는데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바로 자기 걱정이래요! 걱정할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잠이나 더 자라 한 걸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올 거예요!”
분노에 절어있던 이들도 절로 웃게 만드는 순수한 미소가 아닐 수 없었다·
허나 그 미소를 본 에밀리의 얼굴은 오히려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하 대체 도련님은 어쩌다 저런 모자란 꼬맹이를····”
정작 시안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는 에밀리였다·
-끼익
그 순간 문소리가 들리며 현관문을 통해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시간에 출입할 사람이라곤 브라이언밖에 없었기에 당연히 브라이언일 거라 생각한 에밀리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진짜 여자 잘못 만나면 인생 큰일 나는 법인데 대체 어떤 여자랑 어디서 뭘····”
“뭐하면 인생이 어떻다고?”
“꺄아악!”
고음의 괴성이 방안을 들썩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에밀리는 눈을 의심하였다·
“도 도련님!?”
보름 동안 사라졌던 시안이 그녀 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파파!”
놀란 에밀리와 다르게 나나는 반가운 함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품에 안긴 나나를 시안은 덤덤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 언제 오신 거예요?”
“당연히 방금 왔지· 문 열리는 소리 안 들렸냐?”
“드 들리긴 했는데 전 브라이언님인 줄 알고····”
그 순간 또 한 번 문소리가 들리며 브라이언이 뒤따라 들어왔다·
상황을 보니 둘이 같이 온 걸로 보였다·
“잘 다녀 오셨···· 아 그게 아니지 도련님· 케이람이 누구예요?!”
당황을 넘어 기겁을 하고 있던 것도 잠시 에밀리는 곧 쌍심지를 바짝 세우며 시안에게 따지듯 물었다·
“음? 아 넌 모르고 있었나?”
시안의 반응은 늘 그렇듯 한결같이 덤덤했다·
“애초에 말씀 하신 적도 없잖아요! 대체 누구길래 여태 도련님이랑 같이····”
[날 찾고 있었니?]
“꺄아악!”
등 뒤에서 들려온 스산한 목소리에 에밀리는 또다시 괴성을 질렀다·
밤하늘의 별빛을 머금은 것 같은 고운 흑발과 매혹적인 눈동자·
늘 상 봐왔던 귀족 여성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귀함을 가진 기이한 여성이 그녀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지? 만나서 반가워~!]
에밀리로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누 누구세요?”
[섭섭하네? 이래 뵈도 네 주인이랑 같이 전선에서 1년을 함께한 사이인데?]
“그 그게 무슨····”
일단 초면인 걸 떠나 사람의 감각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굉장히 묘한 기분의 여인이었다·
“예 예쁘시네요····”
[음?]
“저 정말 예쁘세요! 여태 제가 봤던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우세요!”
에밀리는 당황한 나머지 마음의 소리가 그대로 나와 버렸다·
이에 케이람의 얼굴이 보기 드물 만큼 환하게 밝아졌다·
[어머머! 네 주인이랑 다르게 보는 눈이 있구나?]
“····”
어이가 없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시안이었다·
“파파! 내 선물 사 왔어?”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
시안은 품에서 자그마한 정육면체 상자를 꺼냈다·
슬쩍하고 손가락을 튕기니 작은 차원의 문이 열렸고 곧 그 안에서 커다란 바구니가 나타났다·
바구니 안에는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간식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한 번에 다 먹으면 안 돼· 적당히 두고 먹어야 한다?”
“응! 고마워 파파!”
바구니를 끌어안은 그녀가 행복의 함박웃음을 짓자 곧 시안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을 본 브라이언은 다소 묘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냐?”
“그 그게 평소와 다르게 눈빛이 달라지신 것 같아서····”
이에 시안이 피식하고 웃었다·
“너도 당주님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예?”
“아냐 됐어· 해 아직 안 졌으니까 운동이나 하러 가자· 나 없는 동안 수련 안 빼먹었지?”
“무 물론입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브라이언이 기다렸다는 듯 준비를 시작하니 그 모습을 시안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 없을 땐 너라도 얘들을 지켜야 하니까·”
준비에 열중하던 브라이언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 * *
개강을 일주일 앞둔 로열 아카데미·
방학 동안 영지로 귀환했던 학생들이 속속 돌아와야 할 시기지만 평소와 다르게 아카데미는 매우 조용했다·
학생들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일부 학생들은 상황을 좀 더 지켜본 뒤 돌아오겠다며 아예 등교 자체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이는 아카데미 개교 이래 실로 유례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총 재학생 중 1/10 정도가 복학을 미루겠다는 의사를 보냈습니다· 학생들뿐만이 아닌 교관 중 일부도 휴직을 고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이번 학기 운영의 큰 차질이 생길 듯합니다만····”
시리카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쿤델 총장은 덤덤한 낯빛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총장의 얼굴엔 보이지 않는 근심이 가득 서려 있다는 것을·
“니그리티 가도 지금 썩 괜찮은 상황은 아니지 않나? 눈치 볼 것 없네· 자네도 휴직을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당치 않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시리카의 대답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에 쿤델이 피식하고 웃었다·
“아무리 정략혼이라지만 약혼자가 죽었는데 자네도 참 덤덤하군· 뭐 자네의 성정을 미루어봤을 때 딱히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녀는 조심스레 눈을 돌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우시프 제국 황성에서 일명 피의 연회 사건이 벌어진 지 한 달·
사건 자체는 일단락되었지만 제국을 비롯한 대륙 전체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던 만큼 여파는 무시 못 할 정도로 컸다·
학생들 사이에서 한창 진행되었어야 할 사교 파티도 일제히 취소되었으며 대부분의 귀족들은 영지나 저택 밖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허나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아카데미에서 또 다른 일이 터지고 말았다·
루나브 레인리버의 납치·
신원을 위장한 외부인들이 아카데미 내부로 잠입해 카페테리아에 홀로 있던 여학생을 납치했던 불과 보름 전에 발생한 일이었다·
사건 자체는 가람 학회 측에서 막았기에 크게 공론화되진 않았다·
다만 귀족의 자제가 벌건 대낮에 납치를 당했던 만큼 아카데미 경비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꽤나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상 앞선 연회 사건 보다 이 납치 사건으로 인해 학생들 대부분이 복학을 미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카데미의 경비를 더 보강하는 것밖엔 없네· 남아있는 교관들에겐 신경 쓰지 말고 수업 준비에 전념하라고 전해주게나·”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시리카는 총장의 책상 위에 놓인 다량의 서신들을 보게 되었다·
전부 퀴젤 가의 인장이 찍혀있는 거로 보아 가문에서 보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황성의 일이 신경 쓰이시는 겁니까?”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겠지·”
쿤델의 말투엔 다소 씁쓸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 역시 제국의 사람이지 않은가? 한때는 황제의 장인이기도 했고· 뭐 지금이야 황실보단 아카데미가 더 우선이긴 하나 적어도 황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겠지·”
시리카는 무심코 서신 한쪽에 쓰인 루이넬이란 이름을 보게 되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내 쿤델은 서신들을 모은 뒤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그건 그렇고 이번 학기에 새로운 교관을 들이기로 했다네·”
“새로운 교관 말인가요?”
“납치사건 이후 행방불명된 넬라 교관의 빈자리를 채우긴 해야 되니 말이야· 공교롭게도 우리 가문 측에서 직접 대체자를 보냈더군·”
“퀴젤 가문의 사람인 건가요?”
“그건 아니라네· 나로선 들어본 적도 없는 성을 가졌더군· 혹 르헬름이라고 들어봤는가?”
“아니요· 처음 들어봅니다만····”
그녀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는 성이었다·
“근본 없는 평민은 아닌 것 같은데 꽤 범상치 않은 친구인 것 같아· 겨우 20대임에도 불구하고 마법 등급이 무려 8성이라더군·”
“파 팔성 말입니까?”
그녀의 공식적인 등급인 7성 보다 높고 대현자에 준하는 총장의 9성 보다 바로 아래 등급인 8성·
대부분의 인간이 평생을 연마해도 이룰 수 있는 마력이 8성급 후반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단순 교관으로 멈출 게 아닌 마법 학회의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을 만큼 매우 높은 등급이었다·
-똑똑
“왔나 보군·”
“···!”
단순히 문을 두드림이었지만 시리카는 속으로 굉장히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런 기척도 안 느꼈는데?’
암살자의 기척은 100보 밖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감지할 만큼 매우 예민하다·
비록 당주가 아닌 교관으로 있을 때만큼은 그 감각을 자중시키고 있긴 하나 방금 전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그녀는 인기척은커녕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실체 없는 영혼이 문 앞에 이르러서야 실체화를 한 것 같은 기분·
시리카는 왠지 모를 위화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끼익
이윽고 문이 열리며 왜소한 체격을 가진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소·”
총장이 환대와 함께 인사를 건네니 남성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보리스 르헬름이라고 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