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힘의 조건 (3)
“대단하군요· 델키아! 설마 제가 도착하기도 전에 일을 끝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모리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소년과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델키아·
게다가 소년의 몸은 이미 옷이 아닌 하얀 실크 천으로 곱게 감싸져 있었다·
“모리스 당신이 말한 물건은 이미 빼놨어· 저기 올려놨으니 한 번 확인해봐·”
그녀가 가리킨 방향엔 은색의 함이 놓여있었다·
모리스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달려가 바로 함을 열어보았다·
“오오···!”
품 안에 곱게 놓여있는 자줏빛 마검의 자태·
모리스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의미 불명한 신음을 내뱉었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어· 물건이 뭐든 나야 상관은 없다지만 상인인 당신이 물건을 사는 게 아닌 훔치려 했으니 말이야·”
이에 모리스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자고로 진정한 거상은 살면서 두 번 다시 못 볼 물건이 눈앞에 나타나면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꼭 구매하는 법입니다· 사는 게 불가능하다면 훔쳐서라도 쟁취해야 하죠· 이 검은 제게 있어서 그런 물건입니다·”
손끝으로 검을 쓰다듬는 모습에서 그의 강렬한 집착이 느껴졌다·
그건 델키아도 마찬가지·
원했던 목표를 손에 넣은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온전한 둘만의 시간이었다·
“서로 원하는 것도 얻었으니 이제 당신과의 계약은 끝이겠지? 온 김에 좀 즐기고 가도 상관은 없겠다만 당분간은 날 찾지 마·”
“걱정하지 마시죠 델키아·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니·”
델키아는 잠든 소년의 몸을 손수 안은 뒤 밖으로 들고 나갔다·
이제 방에 남겨진 인간은 오로지 모리스 한 명뿐이었다·
“드디어 저희 둘만 남게 됐군요· 존귀하신 마검이시여!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의식이라도 치르려는 듯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애끓는 혼잣말과 함께 참배를 전개하였다·
그 마음에 감복이라도 한 것인지 잠자코 있던 마검에서 곧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스스스
방안을 가득 채운 안개 속에선 뭔가가 나오려는 듯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고 모리스는 그 모습을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안개는 그토록 재회를 고대하던 누군가의 형상으로 변해나갔다·
이에 기쁨에 겨운 모리스가 절정의 환호를 지른 순간····
-팟
형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
당황을 금치 못한 모리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 마검이시여? 이게 무슨···?”
방안에 자욱했던 안개마저 어느새 모두 사라져버렸다·
대신 등 뒤에서 이전엔 없던 낯선 기운이 번져오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검 끝이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는 듯한 기분·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하자면 악기를 동반한 사신의 낫이 목 전체를 감싸 안은 듯한 기분이었다·
모리스는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정확힌 돌아가지 않았다·
뼈에 못이라도 박혀 고정된 것 마냥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에 모리스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뒤엔
언제 자신의 목을 딸지 고심하고 있는 지옥의 악마가 자리하고 있다고·
“실망했나 보네?”
그리고 그 악마의 목소리는
“기대하던 마검이 아니라서····”
어째서인지 익숙한 소년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 * *
소년을 잠재웠던 방으로부터 정확히 한층 아래·
이 유흥 골목의 직원 중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용된 지하 공간·
잠든 소년을 침대 위에 눕힌 델키아는 급히 불부터 밝혔다
촛불이 하나하나 켜짐에 따라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공간의 모습이 드러났지만 델키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드디어! 드디어! 너와 난 둘이 이곳에 오게 되었구나 시온! 그 누구도 올 수 없고 어떤 방해조차 받을 수 없는 곳에 너와 함께 있게 되었어!”
델키아는 소년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넌 모를 거야! 내가 널 얼마나 갈망했는지! 네 얼굴은 정말 이 세상에 다시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이 얼굴이 자라 없어진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승천한 광대는 내려올 기미가 안보였으며 기괴한 웃음소리가 지하실에 가득 울려 퍼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시온! 내가 그러지 않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넌 영원히 닳지 않는 보석처럼 지금의 미모를 평생 간직하게 될 거라고! 내 공간 안에서!”
최고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델키아는 입고 있던 옷을 서서히 풀어 헤쳤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이 공간 안으로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허용되는 건 오직 소년과 자신 둘뿐·
그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으며 지금 황홀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하지만 그녀는 곧 눈을 의심해야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를 맞이해 준 것은 다름 아닌 흰색의 실크뿐·
방금 전까지 곱게 누워있던 소년이 온데 간데 사라져버린 것이다·
“뭐 뭐야!?”
급히 침대를 뒤져봤지만 그렇다고 없어진 소년이 나타날 린 없었다·
다만 소년의 몸을 감쌌던 실크 사이로 낯선 무언가가 잡혔다·
“···?”
검이었다·
자줏빛 도신에 검자루엔 검은 보석이 박혀 있는 단검·
기억이 맞다면 이건 분명 소년의 품에서 꺼내 모리스에게 건네주었던 그 검이 분명했다·
“이 이게 대체 왜···?”
[실망했나 봐?]
간담이 서늘해짐과 동시에 온몸의 감각이 차갑게 굳어버렸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여인의 목소리·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델키아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소아성애자라고 했던가? 샛노란 병아리들에게 성욕을 느낀다지? 참 재밌는 취향이야·]
힘겹게 눈동자를 올린 델키아는 곧 자신의 앞에 의문의 존재가 있음을 인지했다·
물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볼 수 있던 건 그저 무릎까지 내려온 흑색의 머리카락뿐이었다·
[흠 인정할게! 넌 내가 봤던 무수한 미친놈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
목소리의 주인은 주변 광경이 못내 흥미로운 듯 지하실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델키아는 그 모습마저 지켜볼 수 없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눈앞에 잡힌 검뿐이었다·
[어린 남자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도 모자라 그 모습 그대로 박제를 했다라···· 뭐 마음 자체는 이해해!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란 건 살아있는 모두가 추구하는 불변의 이상향이니까·]
차가운 손길이 뺨을 쓸어내리며 점차 밑으로 내려갔다·
이내 턱을 쥐고선 살며시 치켜올리니 벽에 장식된 수많은 작품들이 비로소 눈에 담기게 되었다·
[그래도 재주는 좋네? 정말 나로서도 박수를 쳐주고 싶을 작품이야·]
“···!”
과연 저것을 작품이라 부를 수 있을까?
피를 토하고 얼굴을 감싸 쥘 만큼 혐오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뭘 표현했는지 모를 정도의 기괴한 자세로 벽에 박제되어 있는 시체들·
하나같이 전부 소년들이었다·
일부는 나체로 일부는 속옷 정도만 또 어느 것은 아예 살갗까지 벗겨놔 버린
이것이 과연 사람의 손으로 저지른 것인지 의심이 될 만큼 기이한 것을 넘어 흉악스럽기까지 했다·
허나 델키아는 당황할지언정 놀라진 않았다·
이 공간을 창조한 존재는 어디까지나 그녀이기에·
다만 하염없이 떨리고 있는 그녀의 동공이 현재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 당신 뭐야? 어째서 이곳에····”
델키아는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이에 신경을 베어버릴 것 같은 서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탐이 날수 있어· 네 눈이 좋은 것도 맞고· 조금 깐깐함 건 있지만 누가 봐도 잡아먹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잖아? 하지만 나 땐 그런 말도 있었거든 주인 있는 남자를 잘 못 건드렸다간 그냥 아작이 날 수도 있다····]
“무 무슨 말을?”
[넌 몰랐겠지· 아마 걔도 몰랐을 걸? 며칠 전 케이지에서도 그리고 방금 전도 네가 그 아이를 보며 혀를 적시는 모습에서 내가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흥미를 머금고 있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내 주인에게 그런 가증스런 시선을 보내?]
분노와 원망 같은 단어론 설명할 수 없는 실로 부정적인 기운이 피오름과 동시에 델키아의 얼굴이 심히 흔들렸다·
이것은 그녀 스스로가 겁에 질려 떠는 것이 아닌 턱을 잡고 있는 정체불명의 손이 감정에 동요되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크윽!”
간신힌 감각을 되찾은 델키아가 손을 뿌리쳤다·
-쾅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문으로 달려갔지만 문고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애물이 그녀의 앞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소용없어· 이미 이곳은 내 제한 결계로 막혀있거든?]
-또각또각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발소리·
허나 델키아의 시선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다가오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아무것도 모를
그런 미지의 공포심이 그녀의 몸을 지독하게 옥죄이고 있었다·
[그래도 난 관대한 마검이라서 말이야· 최후의 시간은 줄게· 네 손을 거쳐 간 아이들에게 인사해· 네 눈으로 뭔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 거야····]
하지만 그녀의 주변은 이미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안개로 장악된 상태였다·
-턱
이윽고 안개 속에서 빠져나온 새하얀 손이 델키아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피마저도 얼려 버릴 것 같은 싸늘함·
평범한 인간이 그 감각을 느끼고 제정신을 유지할 이는 없을 것이다·
[아 그럴 필요도 없겠구나? 어차피 지옥에 떨어지면 저 아이들과 다시 만날 테니 말이야· 거기서 재회의 반가움을 나누도록 하렴~]
델키아는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다·
검은 안개 속에 앉아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의 주인을·
결코 인간이라 칭할 수 없는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이차원의 존재를 말이다·
곧 어둠과 적막을 찢어발기는 죽음의 절규가 지하실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 * *
“살면서 다시 못 볼 물건을 마주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쟁취해라· 뭐 틀린 말은 아니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훔쳐서라도 가져야지·”
정당한 쟁취가 아니어서 문제지·
“근데 반대로도 생각해야지 않겠어? 네 모든 걸 바칠 정도로 얻고 싶은 물건이라면 단연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도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지 않을까?”
다시는 접근조차 하지 않게 말이다·
“시 시온 당신이 왜? 분명 델키아가 데려갔을 터인데····”
“아 별거 아니야· 그 미친 소아성애자는 나보다 더 원하는 사람이 있어서····”
굳이 따지자면 사람도 아니지만·
나는 함이 놓인 탁상에 걸 터 앉아 말을 이었다·
“뭐 내가 봐도 매력적이긴 해· 조금 까다로워서 그렇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검이니까····”
예로부터 꽃에는 벌이 꼬이고 보석엔 도적들이 몰린다 했다·
하물며 검이라고 다를까?
내로라하는 검사들이 몰려 그녀의 손맛을 느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다·
그냥 주제도 모르는 쓰레기가 같잖은 욕망을 해소하겠답시고 탐하는 꼴인데
어찌 내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퍽
발목을 차서 주저앉힌 뒤 그대로 뒷목을 잡아 시선을 마주했다·
“결코 네놈 따위는 건들 수도 없는 그런 존재라고····”
공교롭게도 작업 대상이 한 명 아니 두 명은 더 늘어났지만 뭐 어쩌겠는가?
못 할 짓도 아닌데·
나는 굳게 다져진 주먹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사실 주먹 쓰는 걸 별로 선호하진 않는다·
감각도 별로일뿐더러 조절도 쉽지 않기에
허나 이런 놈에게 케이람이 더렵혀질 바에야 차라리 내가 더러워지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러니 최대한 오래 살아주길 바랄 뿐이다·
최상의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