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램버스타 케이지 (5)
새빨간 홍등이 골목을 점거하고 있는 밤거리·
여인들의 넉살스런 웃음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술 냄새가 퍼져나갔다·
홍등이 걸려있는 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두 명의 남성·
그들은 조금 전 램버스타 케이지에서 벌어졌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진짜 처음 본 것 같아· 델키아님의 그런 환희에 찬 미소 말이야· 보는 내가 다 살이 떨렸다니까?”
“누가 아니래? 분명 갈 때까지만 해도 남자구실 못하게 만들겠다며 완전 대노 하셨잖아? 근데 아까는 진짜 딴 사람 같았어!”
사람이 평소와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오늘 그들이 보았던 델키아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듣기론 지금 델키아님의 방에서 웃음소리랑 비명소리가 번갈아서 들린다던데? 나올 기미는 전혀 없으시고·”
“흐 그 꼬맹이한테 제대로 꽂히셨나 보네· 조만간 델키아님의 방에 액자 하나가 더 늘겠어·”
안 좋은 무언가를 예상이라도 한 듯 두 남성은 한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근데 괜찮을까? 듣자 하니 그 시온이란 소년 아까 케이지에서 첫 상대였던 젤버드를 한 번에 보내버렸다던데? 아까 눈빛도 그렇고 마냥 어린 꼬맹이는 아닌 것 같아·”
“너 델키아님이 한 번 눈독 들이면 앞뒤 안 가리시는 거 알잖아?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려 하실걸?”
“하긴 우리만 굉장히 피곤해지겠네····”
두 남성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근데 너 그 소년 얼굴 기억은 나?”
“응? 분명 검은 머리에 눈이 매우 날카로웠던··· 얼레? 기억이 안 나네?”
케이지에 갔다 온 것이 불과 2시간 전·
생생하게 기억을 해도 모자랄 판에 두 남성의 머릿속에선 시온이란 이름을 가진 그 소년의 얼굴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온의 얼굴을 가장 눈여겨봤었던 델키아도 마찬가지였다·
“떠오르질 않아! 떠오르질 않는다고!”
수십 장의 꾸겨진 종이들이 방안에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다·
전부 엉망진창으로 표현된 사람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분명 내가 봤던 아이 중에 최고였는데!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그런 남자였는데! 왜 떠오르질 않는 거지?”
머리를 쥐어뜯고 흔들어 봐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시온의 얼굴·
오히려 떠올리려 할수록 점점 더 잊혀져가는 기분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와야 해! 그 앳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나이를 먹고 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명 같은 굉음이 퍼지면서 방안의 액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툭
일부는 힘없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델키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시온! 시온! 시온!”
그저 광기에 찬 눈빛으로 소년의 이름을 반복해서 외칠 뿐이었다·
* * *
“그래 델키아 그년이 케이지에 와서 난동을 부렸다고?”
빛의 반대편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둠의 공간·
중성적인 목소리의 여인이 보고를 듣고선 히죽 웃었다·
“그 시온이란 소년은?”
“잠시 바람을 쐬겠다며 나갔습니다· 델키아의 성적 취향에 대해선 미리 얘기 해놨으니 아마 찾아갈 일은 없을 거예요· 그도 꺼려하는 눈치였고요·”
“호? 리사 네가 직접 조언까지 해줬다고? 의외로구나·”
이에 리사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 그저 VIP 손님을 관리했을 뿐이에요· 사적인 마음은 절대 없었고요· 어쨌든 그 소년은 간만에 들어온 중요한····”
-뻥
대화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 뒤쪽에 있던 대문이 대차게 열렸다·
문을 걷어찬 당사자는 실실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군터?!”
서쪽 폐기물 장의 주인 군터 릭투스였다·
“이야 이 낡은 방을 아직도 쓰고 있네? 좀 옮길 때도 되지 않았어?”
“군터! 너 여기가 어디라고!”
깜짝 놀란 리사가 급히 제지하려 하니 그림자 속의 여인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이내 턱을 괴고선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많이 컸네! 군터? 케이지에서 쓰레기나 치우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하기야 그 쓰레기 맛을 잊지 못했으니 아직도 그런 곳에 남아있는 거겠지만····”
“거 입 좀 함부로 놀리지 맙시다· 그러다 진짜 찢기는 수가 있어· 내가 요즘 감정 조절이 잘 안 돼서 말이야·”
살기 어린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됐고 용건만 말합니다· 나 그쪽 투기장에 선수로 등록해주쇼·”
리사가 발끈하며 나섰다·
“너 제정신이니? 오래전에 제명된 놈이 이제 와서 뭐라는 거야? 갑자기 웬 투기장에····”
“그 시온이란 놈이랑 붙으려고!”
군터는 보란 듯이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야? 한 번 생각해봐! 딴 놈도 아닌 내가 투기장에 다시 와주겠다는데? 나랑 그 꼬마 놈이 싸운다고 하면 사람들 거하게 몰려들지 않겠어? 그럼 이득 보는 건 누구야? 바로 니들이라고!”
말문이 막힌 리사와 달리 여인은 기분 좋게 실소하였다·
“하하· 실로 너답구나 군터· 그렇게도 우리 VIP 손님이랑 싸우고 싶은 거니?”
“잔말 말고 답이나 해주시지? 해줄 거요? 말 거요?”
무대포 같은 질문에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그 시온이란 자와 경기를 주선해 줄게· 대신 바로는 못 잡아줘· 이제 겨우 데뷔전을 치렀잖아? 좀 더 열을 올릴 필요가 있지·”
데뷔전이 화려했다곤 하나 거기서 바로 큰 경기를 잡아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차츰 승리를 쌓아 위치를 높인 후 관중들의 더 많은 돈을 유도하는 것이 이곳의 법칙이었다·
“역시 돈 버는 것만큼은 화끈하다니까?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쇼! 나 참을성 없는 놈인 거 알잖아?”
용건이 끝난 군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저 정말로 괜찮을까요 린제님? 그 시온이란 자는 저희가 고용한 입장이 아닌 만큼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경기가 성립은 불가능합니다·”
시온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손님이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경기를 원치 않고 떠나다하면 케이지로선 사실상 잡을 명목이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 소년도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 이곳에 발을 들인 거겠지· 일단 리사 네가 그의 의중을 한 번 파악해 보렴· 만약 조건이 있다면 네 선에서 판단해 성립시켜도 괜찮아·”
“제 제가 말인 가요?”
“못하겠니?”
“아 아닙니다! 그 소년과 군터의 경기를 꼭 주선시켜 보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리사는 바로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여인은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잠시 후 모습을 감춰버렸다·
* * *
내가 케이지에 선수로 참가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이 시설의 주인이자 암살 대상인 린제 니할로프를 찾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일은 간단하지·
그냥 케이지의 모든 선수를 제패하는 것·
투기장의 특성상 한 명의 선수가 압도적인 연승을 이어나가면 관중들의 배팅이 자연스레 몰릴 수밖에 없다·
그럼 자연스레 나를 찾을 수밖에 없겠지·
그 기간이 오래 걸리게 할 생각은 없다·
내 입장에서 이 도시는 영 맞지 않는 것 같으니·
-휘이잉
늘 그렇듯 밤의 거리는 항상 한적하기 마련이다·
일단 혹시나 해서 유흥 골목이 있다는 서쪽은 아예 등을 돌렸다·
그 델키아란 여자
정상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입에도 담기 힘든 그쪽 취향일 줄은 몰랐다·
혹여 타깃이 그쪽에 있는 게 아닌 이상 아마 갈 일은 없을 듯싶다·
-툭
모퉁이에서 나온 뭔가가 내 몸이랑 부딪혔다·
“죄 죄송합니다!”
낮과는 달리 이번엔 바로 사과가 돌아왔다·
근데 사과를 받기엔 내가 좀 미안하지 않을까 싶다·
넘어진 그에게 손을 내주며 물었다·
“다친 덴 없니?”
여덟 살은 됐을까 싶은 어린 남자아이였다·
“네 가 감사합니다·”
손에는 자기 몸집만한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나를 보며 우물쭈물 하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호 혹시 필요하시다면 이거 안 사시겠어요?”
바구니의 천을 걷으니 안에 있던 내용물이 드러났다·
담배였다·
한두 개가 아닌 바구니를 전부 채울 정도로 가득 들어있었다·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미안 난 비흡연자라서·”
애초에 전생에도 안 폈지만·
“아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아이는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자리를 황급히 떠나려 했다·
“너 그 담배 어디서 난 거야?”
“회 회색 상인회에서 받아왔어요!”
“회색 상인회?”
나로서 처음 듣는 집단이었다·
일단 자세한 건 둘째 치고 어린 꼬맹이한테 담배 팔이를 시키는 곳이라 이건가?
하긴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를 돌이켜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거 다 팔아야 돌아갈 수 있는 거니?”
“네!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진 전부 팔아야 해요· 안 그러면····”
아이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바구니를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대충 예상은 갔다·
“팔 곳은 있어? 그 많은 걸 어디 가서 팔려고?”
“그래서 지금 서쪽 유흥 골목 쪽으로 가려 했어요· 밤새 돌아다니다 보면 운 좋은 날엔 다 팔기도 하거든요· 그럼 돌아갈 수 있어요·”
운 좋으면 돌아갈 수 있다라·
그렇게 해서 돌아갈 곳이 별로 좋은 곳일 거란 생각도 안 드는데?
아마 이렇게 돌아다닐 아이가 얘 한 명만은 아닐 것이다·
더러운 도시 인줄 알고는 있었다만 이 도시··· 생각보다 더 더럽게 고여 있다·
“에휴·”
나는 한숨을 내밀며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받아·
“네?”
어리둥절한 얼굴이 참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 금화라면 제가 거슬러드릴 게 없는데····”
“필요 없어· 이거 받고 그 담배 전부 나한테 줘· 내가 다 사줄 테니까·”
조금 속된말로 어마어마한 호구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나는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금화를 꺼내 이번엔 아이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이건 왜···?”
“갖다 줘봐야 떨어지는 것도 없을 거 아니야· 이건 네가 쓰고 싶은 대로써·”
아이의 얼굴에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분명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텐데 아이는 손을 마주 모으며 문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을 때리지 말라며 비는 것 같았다·
[아직 안 늦었다니까? 그냥 자선사업가로 전향해·]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루나브 때도 그렇고 뭔가 내 자신이 점점 둥글둥글해지는 기분이다·
답지 않은 적선을 해놓고도 썩 유쾌하진 않군·
나는 아이를 보낸 이후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왜 또 석고상이 된 거니?]
“그냥 이대로 가면 뭔가 찝찝할 것 같아서·”
감이긴 한데 뭔가 그렇다·
달리 말하면 여길 벗어나지 않으면 뭔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그런····
“으아아아!”
어린아이의 비명소리가 가녀리게 퍼져 울렸다·
나는 그 순간 예감이 적중했다고 생각했다·
급히 걸음을 돌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야! 너 내가 한 번 더 이 구역에서 담배 팔면 죽여 버린댔지?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냐?”
“그 그게 다 팔고 이제 돌아가려고····”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빈 바구니를 보여주며 말했다·
“어? 뭐야 진짜 다 팔았어? 이 새끼 이거 어디 숨겨놓은 거 아니야?”
성인 남성 셋에 방금 전 봤던 꼬마 한 명·
어떤 상황인지 그냥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 야! 얘 주머니에 금화가 있는데?”
“아 안 돼요! 그건···!”
사수하려는 아이에게 다가오건 무심한 발길질이었다·
“너 이 새끼! 이거 어디서 훔쳤어? 너 같은 꼬맹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이건?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있네·”
급기야 주머니를 뒤져 나머지 금화까지 찾아내었다·
“그 그건 어떤 분이 주신··· 켁·”
배를 걷어차인 나머지 아이는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거짓말 마! 어디서 훔친 거겠지!”
“이야 이거 횡재했는데? 이거면 오늘 유흥 골목에서 아주 제대로 놀 수 있겠어!”
“오늘 완전 운수좋은 날인데! 키하하!”
나는 말없이 그들의 앞으로 다가섰다·
“응? 뭐야 이 꼬맹··· 아아악!”
금화를 집은 손을 잡고선 그대로 한 바퀴 비틀었다·
-꽈드득!
뒤틀리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어우러져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아마 이 친구는 내일부터 반대쪽 손으로 밥을 먹어야 할 것이다·
“뭐 뭐야 이 자식은?”
같지도 않은 주먹이 뒤쪽에서 날아오니 그대로 놈의 손목을 붙잡곤 앞으로 메어쳤다·
조금 전 아이의 발길질을 사정없이 걷어찬 놈이었다·
나는 녀석의 한쪽 발목을 잡은 뒤 주저하지 않고 꺾어버렸다·
“아아아악!”
이 친구는 아마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긴 힘들 것이다·
이런 어린아이가 자신의 돈을 뺏기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구원해줄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떨어진 금화를 주워 다시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어····”
아이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짝짝짝
대뜸 기분을 묘하게 하는 박수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보니 웬 곰을 닮은 낯선 덩치 하나가 나를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우연치곤 너무 재수가 좋은데? 이런 곳에서 다 만나다니 말이야?”
목소리를 듣자하니 나를 아는 듯한 어투였다·
물론 나는 모르는 놈이다·
다만 느껴지는 분위기를 봤을 때 애매한 잡배처럼 보이진 않았다·
“너 맞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시온이란 놈 말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