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루나브 레인리버 (1)
“···!”
누가 보면 저 이불이 최상급 마법 로브라도 되는 줄 알겠네·
꼴에 방어수단이라고 전신을 감싸며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참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보다 못한 내가 물었다·
“도 도련님이야말로 대체 뭘 들여오신 거예요? 어떻게 저런 얘를 방에서 떡하니 키울 생각을····”
“이젠 마수가 눈앞에 있어도 안 무서울 거라며?”
“그 그거랑 얘기가 다르잖아요! 게다가 쟨 마수도 아닌 그 드····”
한껏 겁에 질린 그녀의 눈이 식사 중이던 나나의 눈과 마주쳐버렸다·
“히 히이익!”
그대로 정지되는가 싶더니 괴상망측한 신음을 내며 방으로 도망가는 에밀리였다·
나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파파· 에밀리 언니 왜 저래?”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알아서 적응할 거야·”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나나는 만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에밀리는 결국 아카데미로 데려왔다·
절차로 따지면 그녀는 다시 벨리아스의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허나 귀족에게 있어 개인 시종은 사유 재산과도 같기에 주인이 원한다면 언제든 행선지가 바뀔 수 있다·
즉 아직은 내 개인 시녀로 분류되어 있는 만큼 그녀의 거취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지·
이건 가문의 주인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다·
에밀리는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다·
본인이 나를 죽이기 위한 버림패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비록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여러모로 여지가 남을 그녀를 살려둘 이유는 없을 터·
결국 벨리아스로 돌아가 봐야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며 난 그걸 곧이곧대로 방관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내 시녀를 내가 다시 데려간다는 것에 의문을 표할 사람은 없기에 그들도 함부로 접근하진 못하겠지·
그래 뭐 에밀리는 그렇다 치는데····
내 시선은 다시금 식사를 재개한 나나에게 향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크는 자식과 그걸 지켜보는 부모의 근심이 이런 것일까?
지난 2년 동안 잘 숨겨오긴 했어도 완벽하진 못했다·
식대 뿐만아니라 다른 쪽에서도 의심이 붙고 있는 만큼 이런 게 계속해서 쌓이면 결국 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인간화를 자유자재로 하는 덕에 신기가 새어나가는 것을 억제하고 있긴 하다만····
이 생활을 앞으로도 지속하긴 무리겠지·
여차하면 에밀리 같은 위장 취업이 아닌 위장 입학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녀왔습니다· 도련님·”
때마침 개인 수련을 마치고 브라이언이 복귀했다·
그는 오자마자 낯선 두 장의 편지를 내게 건넸다·
“둘 다 아카데미 공식 수신처에서 받아온 겁니다·”
어째 요즘 따라 편지 받는 일이 잦은 것 같네·
혹여 또 이상한 초대장 같은 것은 아닐지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잘 지내니· 시안?>
우선 하나는 엘리스 누나가 보낸 편지였다·
편지엔 짧은 안부 인사와 더불어 드디어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결국 하려는 것이다·
가문의 유지를 잇기 위한 빛의 기사단 입단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입이 닳도록 들어왔고 스스로도 이미 수십 번을 다짐했을 만큼 누나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상 그녀가 갈 수 있는 최선의 방향을 선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장 적재적소 하게 쓸 수 있는 곳은 빛의 기사단이란 걸 나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입단 신청을 하면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검토와 수습 기간을 가지지만 누나는 아마 그 기간들이 대폭 단축될 것이다·
특별 채용이라도 되는 거냐고 묻는다면 맞다·
제국의 모든 백성이 다 알 정도로 명망 있는 인재를 굳이 시간 낭비하며 지체시킬 필요는 없지·
못해도 3개월 빠르면 한 달 안에 누나는 빛의 기사 칭호를 달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지·
한 번의 해프닝이 있긴 했어도 누나의 삶은 전생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말은 즉 그 삶의 끝도 전생과 동일해진다는 말이겠지·
얼마 남지 않았다·
조만간 또 한 번 아카데미를 벗어나는 날이 올 것이다·
다 읽은 누나의 편지는 정성스럽게 봉해 따로 챙겨두었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두 번째 편지를 살펴보았다·
“뭐야 이거?”
분명 수신인은 나로 적혀있지만 편지를 보낸 발신인에 대해선 어디를 살펴봐도 안 보였다·
이에 편지를 뜯어 바로 확인해 보았다·
<잘 지내세요· 시안 선배?>
내 이름 뒤에 붙은 저 어색한 호칭을 본 순간 발신인이 누군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루나브였다·
<선배랑 헤어진 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네요·>
누가 보면 애틋하기 그지없는 선후배 사이인 줄 알겠네·
어째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내 미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건 기분 탓일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이건 좀 과한데?
이건 거의 한쪽에서 인연을 억지로 밀어붙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 꼬맹이는 나한테 무슨 목적이 있어서 자꾸만 접근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면 ‘딱 봐도 이 소녀가 지금 너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냐?’라며 나를 욕할 수 있겠지만 나란 놈은 원래부터 사고방식 자체가 부정적이어서 이런 걸 봐도 아무런 감흥이 안 든다·
오히려 애먼 경계심만 자극할 뿐이지·
그러던 와중 맨 마지막 문장을 읽고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만간 찾아뵐게요· 그때까지 건강히 잘 있어요· 선배·>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어이없어서 웃은 것이다·
조만간 찾아뵌다고? 개학 전에 나를 보러 온다는 소리인가?
뭔가 귀찮은 이벤트가 생길 것 같은 불안감이 강하게 피어올랐다·
하다못해 남은 방학 동안 딴 곳으로 피서라도 갈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려던 그 순간
-똑똑
방을 울리는 낯선 두드림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편지를 읽고 생겨난 불안감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더욱 강하게 번져 올랐다·
나가보려는 브라이언을 제지하며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앞서 말했듯 지금은 방학기간·
즉 현재 로열관에서 살고 있는 학생은 나밖에 없다·
시설 관리인들조차 신경을 전혀 안 쓰고 있는 이곳에 지금 낯선 방문객이 찾아왔다는 건····
아직 확인은 안 했지만 이미 문 너머에 누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녀가 아니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끼익
“····”
문을 열고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온 게 아니라 그냥 예상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기에·
낯선 방문객은 전혀 거리낌 없는 맹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 * *
당연히 방으론 들일 수 없어 그녀의 손을 붙잡곤 밖으로 끌고 나왔다·
루나브는 영혼 없는 인형처럼 힘없이 따라 나왔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와 함께 도착한 곳은 입학 이후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카페테리아였다·
물론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과격한 남자셨네요 선배?”
그녀가 손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날 왜 찾아온 거야?”
“심심해서요·”
한없이 당당하고 올곧은 표정·
거짓이라곤 1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 얼굴을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시네요·”
잘 아네·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조금 실망이네요· 우린 나름대로 한 테이블에서 마주 앉은 사이인데·”
정확힌 밥 먹는 도중에 네가 멋대로 합석한 거겠지·
시답잖은 얘기나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허리를 젖혀 그대로 팔짱을 끼고선 누가 봐도 경계하고 있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봐 후배님· 뭔가 바람직한 선후배 사이를 잘못 이해한 거 같은데 여태껏 너랑 나랑 직접적으로 얼굴 맞댄 시간만 따지면 2시간도 안 돼·”
“생각 보다 별로 안 되네요? 전 한 20시간 정도는 된 줄 알았는데·”
20시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20시간이 아닌 20년을 살아도 신뢰가 안 생기는 게 사람 관계야· 그런 내가 고작 2시간이 봤을법한 널 살갑게 대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
잠시 말문이 막힌 것 같긴 한데 충격을 먹은 듯한 얼굴은 아니었다·
“선배 끽해야 저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무슨 20년 이상은 살아본 사람의 경험담처럼 말하시네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시선을 잠시 회피했다·
눈치 한 번 더럽게 빠르네·
“좋아요· 어쨌든 선배랑 저 사이에 신뢰가 형성돼야 한다는 거죠? 전 이미 선배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까 저에 대한 선배의 신뢰만 만들면 되겠네요·”
말은 똑 부러지게 잘하는군·
잠시 눈을 감은 루나브는 이내 상념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나에 대한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선배가 좋아할 만한 저희 학회의 비밀을 알려드리면 될까요?”
“···?”
“사실 저희 할아버지를 비롯해 학회의 고위층 사람들이 선배를 주시하고 있어요· 제가 이번 황성 연회에 보내졌던 이유 역시 선배에 대한 조사를 목적으로 두었고요·”
순간 잘못 들었다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거지?
“억울하다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희 학회에선 최근 들어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거든요·”
“불미스러운 일?”
“네· 전선 지역에서 마수의 피를 공급해 주던 기사가 어느 날 갑자기 암살당하고 학회에 연구 물품과 인간 실험체들을 제공해 줬던 상인도 뜬금없이 변사체로 발견되었어요· 거기에 저희 마법 학회가 존속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드래곤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누군가에 의해 아카데미 근처에서 갑자기 소멸해버리는 등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치명적인 일들이 저희에게 계속 일어났었어요·”
어이가 없지만 차마 웃을 순 없었다·
지금 그녀가 말한 일련의 사실들이 전부 나와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지금 네가 말한 그 불미스러운 일들의 범인으로 가람 학회는 나를 주시하고 있다· 그 소리니?”
“네·”
루나브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신뢰를 얻겠답시고 거짓을 얘기하면 역효과가 난다는 거 모르니?”
“거짓말 아니에요· 전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씀드렸어요·”
안다·
딴 건 몰라도 그녀가 말한 사건들에 대해선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걸·
문제는 그 일들이 루나브가 속해 있는 가람 학회와 연관이 있었고 그들은 그 일에 대한 범인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로선 일단 허무맹랑한 말이라며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솔직히 말은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만 저희 할아버지가 워낙 의심이 많은 성격인지라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시거든요· 시안 선배의 경우 아카데미 입학 전에 전선에서 살다 오신 적이 있고 흔적을 지우기에도 용이한 어둠 속성 보유자라는 것에 초점을 두신 것 같아요·”
“즉 확실한 추론이 아닌 애매한 추측이다?”
“그런 셈이죠·”
리겐스 학회장·
의심 많은 성격인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내가 죽인 그 드래곤들도 사실 가람 학회와 연관이 있었다니····
이건 전생의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드래곤과 인간의 결탁이라·
이 사실을 타국을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이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 네 말이 사실이라 치면 지금 네 할아버지를 비롯한 학회의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고 넌 지금 그 사실을 나한테 다 불어 버린 건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내 신뢰를 얻으려는 이유가 있을까? 난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건 비밀 정도가 아닌 엄연한 기밀이다·
호의라는 가벼운 수준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그녀는 왜? 대체 뭐 때문에? 계속해서 내게 접근해 신뢰를 얻으려는 것일까?
이걸 말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내 경계 대상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한결같은 무덤덤한 시선이 나에게 계속해서 고정되어 있다·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에선 무언가 심히 고민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내면이 엿보이고 있었다·
루나브는 머지않아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