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황성으로 (1)
총장과의 면담이 끝난 뒤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당연하겠지만 현재 로열관 기숙사를 온전히 쓰고 있는 자는 나밖에 없다·
굳이 방학에도 아카데미에 머무를 만큼 한가한 왕족은 없기 때문이지·
적막한 공기를 뚫고 내 방으로 들어서니 대기하고 있던 브라이언이 맞이해 주었다·
“도련님 이거····”
그는 편지로 추정되는 두 개의 봉투를 내게 건넸다·
“어디서 받았어?”
나는 편지의 발신자부터 물었다·
“하나는 아카데미 공식 수신처에서 받은 거고 다른 하나는 로열관 청소부로부터 받았습니다· 둘 다 도련님께 직접 전해달라고 했었습니다·”
나는 두 개의 봉투를 각기 다른 손에 들며 서로를 비교해 보았다·
한쪽은 재질부터가 반질반질한 금색의 봉투로 중간에는 우시프 제국 황실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굳이 내용을 안 봐도 공식 수신처로부터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한쪽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흰색의 봉투였다·
봉투 아래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은색의 X 표시가 되어있었다·
아마도 이게 청소부로부터 받은 것일 테지·
아직 내용을 확인해보진 않았어도 둘 중 뭐가 더 중요한 편지인지를 묻는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이 청소부로부터 받은 편지다·
일단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금색의 봉투부터 뜯어보았다·
내용을 본 순간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무 무슨 내용입니까 도련님?”
“궁금하면 읽어봐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종이를 건넸다·
“초 초대장?!”
내용을 읽어본 브라이언의 눈이 크게 번뜩였다·
“도 도련님! 이건 제국에서 보낸 연회 초대장이지 않습니까?”
“연회는 무슨 같잖은 미소 가면이나 쓰면서 하하 호호 웃다가 시답잖게 술이나 마시는 곳이지·”
나로선 오라 사정해도 가기 싫을 만큼 지루한 곳이었다·
“하 하지만 보낸 곳이 황실이지 않습니까? 이건 제국에서 직접 도련님을 초대한 게 아닌지····”
-쑤욱
대뜸 그의 손에 들려있던 초대장이 쑥하고 빠져나갔다·
화들짝 놀란 브라이언이 주위를 둘러보던 것도 잠시
어느샌가 나타난 케이람이 소파에 앉아 초대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황실의 초대장이라··· 호 우리 주인 출세했는데?]
글쎄 내 기준에서 과연 출세라고 해야 할지 판별은 안 된다만·
일단 당연하겠지만 황실의 연회는 아무나 초대받는 것이 아니다·
제국의 귀빈들 즉 황실이 국가의 주요 인사로 생각하는 이들만이 이 초대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제국에서 직접 날 초대한 게 아니냐는 브라이언의 말도 무리는 아니지·
솔직히 우리 가문이야 단골손님으로 불릴 만큼 매번 초대장이 날아오긴 하지만 이렇게 내 이름이 직접 쓰여 있긴 처음이거든?
보통은 아버지인 베르트 공작의 이름으로 왔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아버지께선 참여가 불가하시니 누나나 크란츠 혹은 그 자식이 가던 게 관례였는데····
[시안 베르트··· 네 이름이 그대로 쓰여 있다는 건 이놈들이 널 원하고 있다는 뜻이지?]
바로 보았다·
가문이 아닌 특정 인물을 지목했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황실에선 지금 베르트 가문의 일원이 아닌 오로지 나 시안 베르트라는 한 사람을 원해서 이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
솔직히 말이 안 된다·
황실이 나를 뭣 하러?
내가 황제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는 건 알지만 2년 동안 딱히 눈에 띌만한 짓은 안 했다·
이제 와서 내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낸 이유가 뭐지?
잠시 턱을 괴며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옆에선 케이람이 초대장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이상 귀빈을 저희 황실 여름 연회에 초대하고자 합니다· 발신인: 아린 세벨러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나는 황급히 초대장을 뺏어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발신인: 아린 세벨러스>
초대장 맨 밑에 쓰인 반갑지 않은 이름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하아 그럼 그렇지····”
다른 데도 아닌 황실에서 내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낼 리가 없지·
연회 초대장의 발신인은 보통 주최자의 이름이 쓰여 있기 마련이다·
즉 황실의 초대장인 만큼 황제인 디오네 세벨러스 혹은 황후인 카산드라 네펠리스가 쓰여 있어야 정상일 터·
근데 지금 내 초대장에 쓰여 있는 발신인은 다름 아닌 5황녀였다·
이게 뭘 뜻하는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푸하하하!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만 그 꼬마 황녀님이 아주 깜찍한 걸 보내셨네?]
상황을 눈치챈 듯 케이람이 배를 부여잡으며 웃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케이람님?”
[이거 그 꼬마 황녀가 애한테 단독으로 보낸 초대장이야· 뭘 뜻하겠냐? 즉 이날 자기가 예쁘게 꾸미고 있을 테니까 자길 보러 와달라는 일종의 러브레터인 거지! 우리 주인 좋겠어 아주? 무려 이 나라 황녀한테 개인 초대장도 다 받고 말이야!]
“그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이것들이 아주 쌍으로 주인 물 먹이려고 작정했나?
케이람의 설명대로 이건 황실이 아닌 황녀가 내게 보낸 개인 초대장이다·
이제 보니 자기 손글씨로 아주 정성스럽게 쓰셨네·
이 여자 대체 뭔 생각이지?
수업마다 강제로 끌고 가던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들 연회에도 날 끌어들이려 해?
어떤 기대를 하고 있을진 몰라도 그녀가 보냈다는 걸 안 이상 내 결정은 확고해졌다·
“안 가·”
초대장을 탁상에 툭 하고 던져버렸다·
가봐야 귀찮은 일만 벌어질 텐데 굳이 갈 이유가 없지·
케이람의 잔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진짜 중요한 두 번째 봉투를 열어 보았다·
검은색의 바탕에 알 수 없는 암어로 쓰인 편지·
발신인은··· 시리카 당주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암어를 해독하며 편지를 읽어 보았다·
<새로운··· 타깃>
일단 당주는 지금 아카데미에 없다·
개인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 현재 다른 곳에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지금 미스트의 새로운 타깃을 보냈다·
<네펠리스>
네펠리스 우시프 제국의 현 황후인 카산드라가 있는 제국의 유력가·
즉 타깃은 그 가문의 일원임을 뜻했다·
아직 이름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네펠리스 가문을 썼다는 것 자체가 기존과는 다른 거물급 인사임을 노리겠다는 건데····
전생의 사례를 떠올려보면 그 대상이 누구인지 이미 알 것 같았다·
<자세한 것은··· 직접 와서 들을 것>
일단 서면으론 여기까지만 하겠다는 건가?
어쨌건 당분간은 이곳을 떠나있어야 한단 소리군·
누나도 만났겠다 더 이상 아카데미에 죽치고 앉아 있을 이유도 없지·
이왕이면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음?”
불현듯 전생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황후 네펠리스 후작가 암살·
방금 언급한 단어들과 연관된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보는 동시에 해당 장소의 위치와 날짜가 쓰인 서신의 맨 아래를 확인해 보았다·
<7월 14일··· 제국의 수도 황성 연회>
이게 또 이렇게 이어지는군·
아직 당주로부터 듣진 않았지만 목표는 확실해졌다·
황제의 처남이자 카산드라 황후의 동생 드레니안 네펠리스의 암살·
전생에서 제국을 비롯해 대륙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다·
당시 말단에 불과했던 나로선 그저 기숙사에 짱 박혀 목검이나 휘두르고 있었기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전생에서도 꽤 파급력이 컸던 임무에 이번엔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니
감회가 새롭다 못해 놀랄 지경이었다·
-화르륵
손에서 작은 불꽃을 피워내 서신을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대신 성의 없이 던진 황녀의 초대장을 집어 다시금 고이 봉해두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현재의 내 신분으로 황성에 갈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어 줄 터·
굳이 안 쓸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시선이 자연스레 브라이언과 케이람에게 향했다·
더불어 저 방안에서 단잠을 취하고 계신 우리 꼬맹이까지·
얘들을 어찌해야 하지?
케이람이야 품속에 넣고 브라이언이야 수호 기사로 데려가면 된다지만 나나가 문제다·
혼자 놔뒀다가 일이라도 터지면 수습조차 안 되겠지·
어디 동굴에다 가둬놓고 2주 동안 잠만 자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일단 수도까진 데려갔다가 미스트의 다른 대원들한테 맡겨야 하나?
정작 임무는 둘째 치고 나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 고개를 저을 만한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얘 꽤 오래 자지 않았나?
“나나 깨어날 시간 지나지 않았어? 얘 언제부터 잔 거야?”
“평소랑 같은 시간에 잤습니다만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는 것 같네요·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항상 점심을 먹고 나면 5시간 정도 낮잠을 자는 것이 나나의 일상·
허나 지금은 이미 해가 떨어지고 6시가 훌쩍 넘은 상황이었다·
평소라면 밥도 차리기 전에 ‘파파 나 배고파!’ 하면서 징징댔었는데 오늘은 뭐 디저트 세상에 빠진 꿈이라도 꿨나보군·
-덜컥
“파파 나 배고파!”
용인도 제 말하면 일어난다고(?) 생각과 동시에 나나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래 밥 차려놨으니까 얼른 손 씻고 식탁에····”
···?
나 브라이언 케이람·
나나를 제외한 방 안에 있는 여섯 개의 눈동자가 격하게 요동치고 있다·
장담하건대 이 눈들은 지금 자기가 뭔가를 잘 못 보고 있는 거라며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저 저기 도련님? 지금 나나의 모습은 대체···?”
난들 알겠냐? 내가 뭐 용인을 키워봤어야 알지·
실오라기 하나 없는 벌거숭이 상태·
옷을 안 입은 게 아니다·
아마 입었던 옷이 작아져서 벗겨진 거 같다·
“왜 그래 파파?”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 좋은 거라고 빤히 쳐다보고 있어! 눈깔 안 치워?!]
급기야 케이람이 나와 브라이언의 머리를 잡고선 고개를 주저앉혔다·
[야 꼬맹이! 너 왜 발가벗은 채로 나왔어?]
“응? 나도 몰라· 눈 떠보니 맞는 옷이 없던데?”
나나는 이전보다 두 배는 길어진 듯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성장이 빠른 종족인 건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예고 없이 커도 되는 건가?
오해할까 봐 말해주는데 나나는 지난 2년 동안 더할 나위 없는 성장속도를 보여주었다·
대충 인간으로 따지면 6살 정도?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다가 근래 잠잠해져서 아 이제 좀 주춤하나 싶더니만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내 키의 반도 안 됐던 꼬맹이가 하루 사이에 내 가슴팍까지 자라났다고?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신입 여학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나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