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엘리스 베르트 (3)
세상 살다 보면 이런 말을 듣는다·
아는 게 힘이다·
혹은 모르는 게 약이다·
양쪽 다 틀린 말은 아니라지만 뭐가 더 옳은 말이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판단하진 못할 것이다·
그럼 이 둘을 보기 좋게 절충해본다면 어떨까?
난 이렇게 정의해보고자 한다·
모르면 바보가 되지만 알면 대처라도 할 수 있다·
크란츠의 폭행을 누나가 목격함에 따라 집안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물론 오래가진 않았지·
그녀는 머지않아 아카데미로 되돌아가야 했고 유일한 수호자가 없어진다면 난 또다시 외톨이가 되어야만 했다·
이후 크란츠는 더 집요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나를 괴롭혔으며 주변인들은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나를 방관했다·
누나는 떠나기 전에 말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하지만 난 무엇 하나 말하지 않았다·
누나가 화내고 슬퍼하는 모습을 다시 보긴 싫었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 치마폭에 숨어 현실을 피하는 것 따윈 하고 싶지 않았기에·
허나 앞서 말했듯 모르면 바보가 되고 앞으로 닥쳐올 일에 어떤 것도 대처하지 못한다·
나는 누나가 알았으면 했다·
누나가 지키고자 하는 이 가문의 유지라는 게 얼마나 추잡하고 비참한 것인지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지킬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이다·
“···!”
누나의 오른손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벨리아스로 달려갈 기세·
일단은 먼저 입을 열기까지 잠자코 기다려 보았다·
“지금 한 말 다 사실이니?”
“농담으로라도 이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서 여기까지 온 거야?”
때마침 한 남성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누 누구시죠?”
나이는 스무 살 남짓 정돈된 갈색 머리의 순박한 눈을 가진 청년 브라이언이었다·
“신 벨리아스의 정식기사 브라이언 켄드릭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시안 도련님을 지키는 수호 기사로서 도련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수호 기사라고요?”
브라이언은 흔들림 하나 없는 정확한 발음으로 지난 3년의 경위를 설명했다·
공작부인으로부터 사주를 받았지만 스스로 부당하다고 판단해 그녀를 배신했고 곧바로 나의 수호 기사가 되어 안전하게 아카데미로 호위한 것까지·
사실상 내가 했던 일들을 모두 브라이언이 한 것으로 넘긴 채 이야기했다·
물론 그렇게 말하라고 내가 시킨 것이다·
“이 이해할 수가 없어! 대체 왜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은 거야?”
“알릴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선 항상 전선의 일 때문에 바쁘시지 않습니까?”
“그럼 하다못해 나에게라도 알렸어야지!”
이거 솔직히 처음인 것 같다·
누나가 나에게 진심으로 화를 낸 것이·
근데 그거 아는가?
난 내 인생에서 이렇게 날 위해 화를 내주는 사람조차 없었다는 것을·
보통 꾸중을 들으면 기분이 우울해지고 나빠지기 마련이라는데
난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나올라 한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변태 같군·
나는 속의 감정을 꾹 눌러앉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누님이 누님의 인생을 위해 3년간 대륙을 탐방하셨듯 저 또한 제 인생을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입니다· 공작부인도 일을 그르쳤다는 걸 안 이상 추가로 움직이진 않았습니다· 크란츠 역시 자기 잘못을 아는지 조용히 있었고요· 지금 이렇게 누님께 말씀드린다는 것 자체가 잘 끝났기 때문에 말씀드린 겁니다·”
“그게 어떻게 잘 끝난 거니!”
누나는 급기야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호통을 내질렀다·
어느새 눈물까진 고인 그녀의 눈을 나는 내색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미안해 시안· 정작 너희를 위해 살기로 다짐해놓곤 정작 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네·”
계속 말하지만 우리 누나는 똑똑하고 강하다·
내가 이 말을 전함으로서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빠르게 캐치할 줄 아는 여자다·
“너랑 천천히 이야기 나누면서 네 기숙사도 구경해보고 싶었는데 힘들 것 같다· 급히 가야 할 곳이 생겼어·”
딴 데는 몰라도 거긴 곤란하지·
우리 귀여운 꼬맹이의 낮잠이 깨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나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다시 와주실 겁니까?”
“물론이지·”
또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주나 싶더니 이번엔 내 몸을 살포시 안아주었다·
“혼자 다 짊어질 필요 없어 시안·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돼·”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이 내 귓가에 맞닿은 순간
세상에 다시없을 평온함이 느껴졌다·
포근하네·
그러면서도 굉장히 따뜻하고·
이런 기분 다시는 못 느낄 거라 생각했는데·
새삼 회귀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이 온기를 지키는 일만 남았겠지·
누나의 이 따뜻한 손길이 차갑게 굳어지는 날은 내가 온전히 살아있는 한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의지를 담은 내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있었다·
* * *
“괘 괜찮으신 겁니까 도련님?”
누나가 떠난 뒤 곁에 있던 브라이언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왜?”
“주 주제넘은 생각일 수 있지만 엘리스 님께 괜한 걱정을 끼쳐드린 게 아닌지· 사실 전 도련님이 그 얘기를 하신 것 또한 굉장히 의외인지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변하기 쉬운 갈대 같으면서도 또 어쩔 땐 굳은 바위처럼 잘 변하지 않아·”
누나 같은 사람이 특히 그렇지·
“그러니 경각심을 줘야 해· 여태껏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는 걸 조금씩 깨달아줘야 한다고· 아니면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가다가 결국은 파멸할 테니까·”
경험담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답하고 싶진 않다·
난 그저 내 조언을 가장한 경고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잘 대처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니·
그녀라면 필시 잘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어쨌든 누나의 일은 이쯤이면 된 것 같고····
내 시선은 곁에 있던 브라이언에게 향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그래도 꽤 연기 잘했다? 한 마디도 못하고 떨 줄 알았더니?”
브라이언은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문지르며 말했다·
“하하! 어 어제 잠도 못 자고 계속 연습했었습니다! 사실 엘리스 님께서 잘 받아들이셨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2년 전 어리바리하던 모습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로군·
나름 진지할 땐 진지해질 수 있는 놈이란 건가?
“괜히 우리 누나가 신의 아이 소리 들으면서 살았겠냐? 문장의 절반을 더듬거려도 철석같이 이해하는 게 우리 누나야·”
“그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네요·”
멋쩍게 웃는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너 얼굴 왜 빨개졌냐?”
“예!?”
첫사랑에 빠진 소녀도 이 정도는 아니겠네·
“아 그 그게 저도 엘리스 님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지라! 소문대로 정말 미인이기도 하셔서! 오 오해하지 마십쇼 도련님! 이상한 마음 같은 거 절대 안 품었습니다!”
이상한 마음이라·
그래 뭐 너도 남자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는 해·
나도 우리 누나를 뛰어넘는 미인은 아직 못 봤다고 생각하니까·
왜 이렇게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기분이 강하게 드는 걸까?
나도 모르게 움켜쥔 주먹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이걸 저놈의 머리통 위로 쥐어박을지 말지 심히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 * *
누나를 떠내 보낸 나는 다시 한번 총장실로 향했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어젖히니 집무를 보고 있던 총장이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 그윽한 시선을 보냈다·
“벌써 확인하신 모양이네요·”
총장은 내가 조금 전에 건넸던 하얀 종이 문서를 읽고 있었다·
“늘 그렇듯 이 정보를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겠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신 다른 걸 묻지· 넌 정말 이걸 나한테 믿으라고 준 것이냐?”
쏘아붙이는 눈초리가 여간 따가운 게 아니었다·
“네가 준 문서를 크게 정리해 보자면 이렇겠지· 빛의 기사단 소속의 상급 기사들 중 일부가 황실 일가와 연결되어 있다· 유력한 쪽은 1황자 루이넬 세벨러스· 이들은 조만간 모의를 진행해 전선 지역의 마수들을 도발해 큰 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시점은 다름 아닌 황실 일가의 전선 순방과 연결되어 있다··· 소설을 써도 이리 허무맹랑하진 않겠군·”
이렇게 흥미진진한 소설이 머릿속에서 툭하고 튀어나온다면 문학 수업을 뭐 하러 듣겠는가?
허나 애석하게도 지금 총장이 얘기한 저 말들은 허구가 아닌 엄연한 사실이다·
총장의 눈빛을 보니 아직은 반신반의 하는 듯 보였다·
“내가 가문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그렇다고 귀를 닫고 산 건 아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문과 루이넬이 이런 짓을 꾸미고 있었다고? 솔직히 이 문서를 준 게 네가 아니었다면 난 이걸 진즉에 찢어버렸을 거다·”
어째 가문의 영예 따위 신경 안 쓴다는 분치곤 앞뒤가 좀 안 맞는 것 같지만 가볍게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여부는 어차피 제가 확인시켜드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맞다· 속는 셈 치고 보낸 내 정보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뒷목 잡을 만한 소식을 가져다주겠지·”
경험담이라 그런지 말씀하시는 게 참 거침없으시다·
“이거 네 누나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냐?”
“무엇 때문에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연륜이란 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던 네놈의 그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엘리스를 마주한 순간 파르르 떨리더구나·”
애써 부정할 필욘 없어 보였다·
“솔직히 좀 의외였다· 가족은커녕 네놈 하나밖에 모를 것 같다고 생각한 놈이 그래도 피가 진한 줄은 알았다고 하니· 하긴 생각해 보면 그 아이를 미워할 이유도 없겠구나· 아카데미를 거쳐 간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도 내가 유일하게 딸로 삼고 싶었던 아이였으니·”
“큰일 날 소리 하시는군요·”
진심이었다·
순간 저 영감님께서 노망이라도 나셨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선을 넘으셨습니다· 총장님·
총장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게 이 소설 같은 정보를 주고선 넌 내게 무엇을 요구할 생각이냐?”
나는 대가 없는 선행을 베풀 만큼 미련한 인간이 아니다·
그걸 총장도 알기에 이럴 때마다 계속 요구하는 게 뭐냐고 묻지만 난 이미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을 쭉 받아오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해주시고 있지 않습니까?”
“하 네놈의 이 날라리 같은 학교생활 말이냐?”
날라리라····
나름 별 문제없이 조용히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또 묘해지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편의를 봐주시는 것에 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겠지· 뭐 네놈의 뜻은 알겠다· 나중에 딴 소리나 하지 말거라·”
뇌물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참 네놈은 속에 뭔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놈이구나·”
저 말을 들으니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팍 떠올랐다·
한 번 물어볼까?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다·”
“무엇이냐?”
“조금 전 저희 누나랑 대화하실 때 총장님의 손을 거쳐 갔던 학생들 중에 속을 파악하지 못한 학생이 한 명 있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엿들었다기보단 그냥 들린 이야기였다·
“그래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기준이지·”
총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혹시 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왜 물어보냐고?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다·
저 영감님의 눈썰미가 어느 정도인지 새삼 궁금해졌거든·
총장은 피식하고 웃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묻는 건 또 무슨 경우냐? 굳이 물을 거 없다· 네 머릿속에 있는 그놈일 테니·”
역시 우리 총장님·
남을 보는 눈만큼은 정말 확실하신 분이다·
정작 자기 앞날을 못 보셔서 그렇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