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로열 아카데미 (3)
92%·
살면서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이 정도면 신의 선택이 아니라 신계의 존재가 직접 인간의 몸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감히 자부하건데 속성 검사가 시작된 이후 이렇게 높은 수치를 가진 인간은 이 학생이 처음일 것이다·
“이 마법진 고장 난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조금 전까지 잘 작동됐는데····”
두 교관은 양피지에 쓰인 글씨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였다·
그만큼 천 번 만 번을 확인해도 못 믿을 일이었다·
“끝났죠?”
시안은 덤덤하게 마법진에서 내려와 자신의 양피지를 확인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무신경한 눈빛·
그는 92%라는 수치에 아무런 반응 없이 그대로 방을 나갔다·
남겨진 두 교관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속성 수치 92%에 신체 등급 S라니····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마법 등급은 1성이네요·”
허나 별로 의미는 없어 보였다·
어차피 마법 등급은 해가 지날수록 단계적으로 상승하는 대기만성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분명 전례가 없을 정도의 역대급 수치이긴 하지만····”
로딘 교관은 다소 아쉬워하고 있었다·
“왜 하필 어둠 속성인지··· 반대로 보면 참 안타깝네요·”
어둠 속성·
속성자체로 봤을 땐 희귀 속성이긴 하나 이 땅에서 그다지 환영받는 속성은 아니었다·
보유자 자체가 별로 없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시프 제국은 빛을 숭배하는 국가였다·
빛을 선호하는 나라에서 빛과 반대되는 성질인 어둠을 달갑게 볼 리는 없을 터·
이는 인접해 있는 국가들을 비롯해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며 이로 인해 어둠 속성을 기반으로 한 마법 연구는 대륙에서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
실속이 전혀 없는 허울뿐인 속성에 불과했다·
“그러게요· 최대수치 92%라면 그걸 제외한 나머지 수치가 8%라는 건데 아무래도 마법으로 크게 성장하진 못할 것 같네요·”
“혹시 모르죠· 저 정도 적합성에 천재성만 가미된다면 새로운 마법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요·”
“어둠 속성 대마법이라··· 전 솔직히 감이 안 잡혀요· 끽해야 은신이나 환영 정도의 마법이 고작일 텐데···· 저런 냉대받는 속성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시리카는 말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면 로딘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로딘 님은 뭔가 떠오르시는 게 있나 봐요?”
“아뇨· 별 건 아니고 왠지 저 시안이라는 학생을 환영할 만한 조직이 한 군데 있을 것 같아서요·”
“어딘데요?”
잠시 우물쭈물하던 로딘은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스트요····”
“····”
“아니 은신이나 환영 정도의 마법이라 하시길래··· 그런 계열을 즐겨 쓰는 암살자들에겐 좋지 않을까 해서····”
그녀는 진심으로 경멸감을 느낀 듯한 얼굴로 로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92%라·
원래 전생에선 80%대였던 것 같은데 그새 수치가 늘었나 보군·
하긴 그동안 마수들 사냥한다고 써댄 마나들이 얼만데 안 올라간 게 이상하지·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금 확인된 속성 수치들이 평생 변함없이 지속되는 건 아니다·
본래 힘이란 것도 쓰면 늘고 안 쓰면 무뎌지는 것처럼
속성 역시 마나를 어떻게 쓰고 활용했냐에 따라 늘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10% 안쪽의 변화율을 보인다고 한다·
물론 그 이상의 사례도 존재한다·
뭐 전생에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수치 때문에 꽤 주목은 받았었지·
가문의 무능아라 그런지 속성도 무능력한 거냐는 조롱이 대부분이었지만····
아 이거 또 옛날 생각 하려니 기분 잡치려 하네?
전생에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지만 이번에 못 그럴 듯싶다·
아마 본보기로 한 명 잡아다가 어둠의 구렁텅이로 빠트려서 절망과 고통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랬다간 조용하고 평화로운 내 아카데미 생활은 끝이겠지·
나는 기숙사에서 가져온 근력 촉진 포션을 마시며 찝찝한 마음을 정리하고자 했다·
흠 이거 생각보다 꽤 먹을 만한데?
달콤 쌉싸름한 것이 꼭 트롤의 피를 연상케 하는 맛이다·
뭐 효능은 비할 가치가 없겠지만 나름 옛 맛을 상기하는 정도로는····
“···!”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시 시····”
급성 학질이라도 걸린 것 마냥 벌벌 떠는 눈과 입·
마치 있어선 안 될 죽은 자라도 본 것 같은 반응·
크란츠였다·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아는 애야 크란츠?”
옆에는 살이 찌다 못해 목은 없고 머리가 가슴 위에 바로 얹힌 것 같은 금발의 꼬맹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 너도 기억나네·
가람 왕국 페네론 후작가의 아들 포퍼 페네론·
크란츠와 더불어 나의 초창기 아카데미 생활을 아주 더럽게 만든 놈들 중 하나였지·
“어 그 그러니까 그게····”
돼지 놈의 물음에도 크란츠는 등신마냥 계속해서 어버버 거렸다· 얼씨구 왜 말을 못 하실까?
그새 친애해 마지않는 동생의 이름도 까먹으신 건가?
그럴 리야 없겠지·
얼굴도 보기 싫어서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엄마한테 꼰지르신 우리 크란츠 형님이 이 동생을 잊을 리야 없지!
“내 내 동생이야! 시안 베르트라고 올해에 나랑 같이 아카데미로 왔어! 무 무사히 도착했구나 시안?!”
이 뻔뻔한 자식 봐라?
그래도 꼴에 친구 있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시네?
일단 어디까지 버틸지 궁금해 잠자코 있어 보기로 했다·
“아 네가 저택에 사는 동안 노예처럼 부려먹었다던 그 동생이구나?”
“···!”
그나마 정신을 되찾았던 크란츠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려버렸다·
차마 내 얼굴을 볼 수 없었는지 놈의 눈동자가 심히 방황하고 있었다·
아 그래 뭐 사실이지·
검술 대련 전까지만 해도 이놈이 날 노예처럼 부렸던 건 사실이니까·
난 자비로운 사람이기에 그 정도 혀 놀림은 너그럽게 이해해줄 수 있다·
“게다가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라 했었지? 이야! 네 말대로 되게 근본 없게 생겼다!”
-쿵
무언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컨대 아마도 크란츠의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일 것이다·
“아 아니 저 그러니까 내 말은···!”
-턱
변명을 들을 것도 없이 바로 녀석의 뒤통수를 잡아 움켜쥐었다·
땀을 얼마나 흘려댄 건지 잡은 머리카락이 매우 흥건했지만 그렇다고 놔줄 내가 아니다·
역시 짐승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고 아무래도 녀석에게 다시금 교육의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이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크란츠?”
* * *
“속성수치 92%?”
보고서를 읽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속성 자체가 어둠이다 보니····”
“실속은 없을 거란 얘기군·”
노인은 정제된 시선으로 계속해서 시안 베르트의 보고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역대급 수치라는 건 사실이군· 그 신의 아이라 불렸던 엘리스 베르트도 81%인가 그랬지 아마?”
“네· 졸업할 당시엔 물 속성 88%까지 상승해 있었습니다·”
“재미있군· 그 역대급 재능이라 칭송했던 아이도 이뤄내지 못했던 수치가 신입생에게 나타났을 줄이야·”
총장의 얼굴엔 좀처럼 보기 드문 은은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걸 본 시리카는 지금 상황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가 있는 곳은 아카데미 본관 최상층에 자리한 총장실·
금일 진행한 속성검사의 보고를 위해 이곳에 온 만큼 그 보고서를 읽고 있는 노인은 당연히 이 방의 주인일 수밖에 없었다·
로열 아카데미의 총장 ‘쿤델 퀴젤’·
우시프 제국의 유력가문인 퀴젤가의 가주이며 황제의 첫 번째 황후였던 디아나 퀴젤의 아버지 즉 황제의 전 장인·
더불어 현재 아카데미의 구성원 중 유일하게 9성급 경지에 도달한 위인이기도 했다·
“자네 이 시안이라는 아이가 로열관을 배정받았다는 거 알고 있나?”
“네· 다른 교관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황가의 일원도 아닌 그가 어떻게 배정받았다고 생각하나?”
때아닌 퀴즈쇼에 시리카의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실 답은 이미 어느 정도 나와 있었다·
황가의 일원도 아닌 일반 귀족이 로열관을 배정받았다?
이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그걸 수용할 사람이 못해도 총장 이상의 권력을 가진 자여야 한다는 것·
이에 해당되는 사람은 단연 쿤델 총장밖에 없었다·
즉 쿤델 총장이 누군가로부터 사주를 받고 이를 수용했기에 시안 베르트가 로열관에 배정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혹 베르트 공작이 사주한 것입니까?”
“허허 그건 아닐세· 베르트 공작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데? 자식의 편의나 봐주자고 그런 걸 부탁할 남자는 아니지·”
“그럼 대체 누가···?”
“황제 폐하일세····”
시리카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디 디오네 황제 폐하 말씀이십니까?”
쿤델은 말없이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대체 황제 폐하는 무엇 때문에 그 아이를?”
“자네 현재 마법 등급이 어떻게 되지?”
쿤델은 난데없이 그녀의 마법 등급을 물었다·
“7성입니다····”
특별할 것 없이 아카데미 소속 교관들의 평균 등급이었다·
“7성이면 살상 마법 한 번으로 웬만한 마을 하나는 거뜬히 날려버릴 수 있는 경지지· 그런 자네 앞에 지금 드래곤이 나타났다면 어찌하겠는가?”
“드 드래곤 말입니까?”
신의 피를 이어받은 계승체가 눈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냐고?
뭐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시리카는 일단 솔직하게 말해보기로 했다·
“전력을 다해 싸워··· 아니 도망쳐 보긴 하겠지만 머지않아 신께 살려달라고 빌 것 같습니다·”
“솔직하구먼· 그래 7성급인 자네도 그런 말을 하는데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아마 대부분은 죽음을 자각하고 삶을 포기할지도 모를 걸세· 한데····”
총장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그 아이는 살아 돌아왔다더군· 무려 드래곤에게서 말이야····”
“···?”
시리카는 귀를 의심하는 걸 넘어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현실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안 믿기지? 놀랍게도 이건 황제 폐하가 나한테 직접 한 말일세· 무려 데빌 드래곤에게 납치되었다가 강에 떨어져서 실종된 뒤 이틀 만에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생명엔 아무런 지장 없이 말이야····”
“저 전선에서 생활했단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쿤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도 황제 폐하께선 그때 당시 순방에 동행했던 아린 황녀를 마수들로부터 무사히 대피시킨 것에 큰 감명을 받으신 모양이야· 거기에 뭐 드래곤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걸 두 눈으로 보셨다 하니 더 이상은 말할 것도 없겠지· 이거 뭐 몇 년 뒤엔 둘의 혼사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겠군·”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긴 했지만 황제가 직접 관여했을 정도면 실제로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모든 경위를 알게 된 시리카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말 그 아이는 신의 선택을 받기라도 한 것일까요?”
쿤델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우리가 할 일은 그냥 지켜보는 것뿐이야· 비록 아무짝이 쓸모없는 속성을 가졌다 해도 모르지 않겠는가? 그 누구도 다다를 수 없는 유일한 경지에 이를지····”
쿤델은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화분을 보는 것 마냥 시안의 보고서를 흡족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