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귀환 (4)
문이 열리고 정확히 10초의 시간이 흐르기까지·
나는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허공에서 방황하는 오른 손과 초조하게 떨고 있는 시선만이 지금 불안정한 나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하긴 그럴 수 있지· 나 또한 널 마지막으로 본 것이 아카데미 입학 전이었으니····”
추악하기 그지없는 상판대기가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끓어오르고 혈관이 터질 듯한 기분이다·
침착하자·
지금 흥분해봐야 이득 보는 건 아무것도 없어·
언젠간 도래할 상황이었잖아?
직접 내 손으로 멱을 따고 어금니 하나까지 잘근잘근 씹어 먹어 존재자체를 없애겠다고 다짐한 놈이다·
벌써부터 이리 조절을 못해서야 결국 얼마 못 가 일만 그르칠 뿐·
그래 지금은 모든 걸 내려놓고서 의심할 수 없는 정상적인 상황을 이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
할 것 같냐?
사지를 찢어서 갈기갈기 조각 낸 다음 뼈를 갈아서 화산 구덩이에 흩뿌려도 시원찮을 놈이다!
그런 놈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는데 안 죽이고 뭐하는 거지?
그의 미래를 철저히 부숴주기 위해서?
굳이 귀찮게 미래까지 볼 필요가 있어?
아니지! 그냥 여기서 죽이면 돼!
질질 끌 필요도 없이 그냥 전생의 악연을 여기서 끊어버리면 되는 거라고!
내 의지에 반응한 듯 방황하던 오른손이 품속으로 향했다·
이윽고 품에서 잡혀진 케이람의 검 자루·
검 자루를 잡은 순간 머릿속에 있던 모든 잡생각들은 지워지고 살의라고 하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턱·
“···?!”
다짜고짜 나타난 의문의 손이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대갈통 깨지기 싫으면 정신 차려·]
조곤조곤하면서도 냉정한 마검의 속삭임·
그와 동시에 몸을 잠식하고 있던 살의의 감정이 빠르게 완화되어 갔다·
“베르트 가의 막내 시안 큰형님을 뵙습니다····”
품속에 넣은 손을 자연스럽게 꺼낸 뒤 바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내가 해야 하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나를 기억 하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동생으로서 형님의 얼굴을 못 알아볼 순 없지 않습니까?”
“기쁘구나· 솔직히 네가 못 알아보면 어쩌나 싶었는데 첫눈에 기억해주어서 다행이야·”
에쉘은 대견하다는 듯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시금 살의가 차오르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구나· 허락도 없이 네 방에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하다· 너도 네 공간에 낯선 이가 찾아와서 불편했겠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주인 없는 빈방이었을 뿐입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시안 넌 아마 모를 거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순전히 너를 만나러오기 위함이었으니·”
나를 만나러 와? 네놈이?
전생의 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무려 아카데미 졸업 이후였다·
필요성 없는 존재한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네놈이 지금 나를 만나러 왔다고?
시커먼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다· 그에게서 어떠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신기하게도 들끓었던 감정이 차분해지고 사고 또한 이성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나는 모든 속내를 감춘 채 나직하게 말했다·
“저 역시 형님을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 * *
“진짜 짐도 별로 없으면서 자기가 들고 가면 덧나나? 암튼 우리 도련님은 도무지 여자를 위할 줄 모른다니까?”
들어있는 거라곤 옷가지 밖에 없는 자루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에밀리·
시중들과 함께 짐정리를 끝낸 그녀는 마지막 남은 시안의 짐을 갖고서 그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근데 어째서인지 같이 짐을 정리해주던 시중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자기들만 알고 있는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는 느낌?
그 중 친하게 지냈던 동료 시녀 한 명은 어서 시안의 방으로 가보라며 등까지 떠밀기도 하였다·
자신을 위한 깜짝 선물이라도 준비 했나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을 터·
이윽고 시안의 방 앞에 도달한 에밀리는 별 생각 없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
돌아온 것은 무심한 침묵뿐·
고개를 갸웃한 에밀리는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똑똑
“도련님 에밀리예요! 짐 가지고 올라왔어요!”
잠시 후 문 너머로부터 시안의 무거운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들어와·”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잠시 당황했지만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짐이라곤 코딱지만 하면서 그냥 들고 올라가시지 제가 꼭 이렇게··· 응?!”
평소마냥 투덜대며 들어오는 것도 잠시 에밀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정확히 두 명의 남성이 담겨져 있었다·
“아 저 여인이로구나? 너와 함께 전선에서 지냈다는 시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낯선 남성·
에밀리는 그 남성을 모르지 않았다·
마치 신계에 사는 존재가 인간계로 하행했다고 느껴질 만큼 매우 매력적인 인상·
이 공작가에서 그런 용모를 가진 사람은 단연 한 사람뿐이었다·
“처 첫째 도련님···?”
가문의 장남 에쉘 베르트·
어떤 연유인진 몰라도 그는 지금 시안의 방에서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급기야 입을 틀어막은 에밀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첫째 도련님께서 계신 줄 미처 모르고 무례하게···!”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이 기분·
시중들 사이에서도 가장 모시고 싶은 1순위 자제로 여겨지는 그에게 너무나도 가벼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하하 보아하니 서로 허울 없는 좋은 관계인가 보구나· 하기야 시안 네가 전선에까지 데려갔을 정도면 많이 아끼던 시녀였겠지·”
“····”
시안은 침묵으로 답했다·
이미 그녀가 오기 전 어느 정도 대화가 오고간 듯 에쉘은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막 돌아와서 피곤할 터인데 구태여 시간을 잡아서 미안하구나·”
“당치 않습니다· 큰형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무척 영광이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쉘은 따라 일어난 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시안은 그저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럼 난 이만 어머님께 가보겠다· 아카데미에서 어려운 일이 있거든 언제든 연락 주거라·”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대화를 끝낸 에쉘은 부드러운 눈웃음과 함께 방에서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넘어가 사라진 순간 에밀리는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푸아! 진짜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네! 그 웬수들! 첫째 도련님이 왔다면 왔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
에밀리의 푸념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첫째 도련님이랑은 무슨 얘기 나누셨어요? 아무 이유 없이 집에 오실 분이 아니잖아요! 설마 도련님 보기 위해서 찾아오신 거예요? 그런 거라면 정말 도련님을···!”
“에밀리····”
시안의 호명에 그녀의 입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당황한 에밀리는 조심스레 시안의 눈을 쳐다보았다·
“미안한데 좀 나가 있어 줘····”
나지막이 읊조린 목소리에서 땅을 가라앉힐 만큼의 중후함이 느껴졌다·
“도 도련님 갑자기 왜 그러···?”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시안의 낯빛을 본 에밀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크란츠와의 검술 대련 이후 항상 여유 만만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처음으로 어두운 면모를 내보이고 있었다·
만약 그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다면 누구든 상관없이 잔인하게 도륙 낼 것만 같은·
그만큼 시안의 얼굴은 지금 분노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 * *
억눌러왔던 본성을 풀어낸 순간 전신에 흐르는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결국 방안에 있던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웨에엑!”
속에서 게워낸 토사물을 보고 있자니 나의 야비하기 짝이 없는 거짓과 가식들을 보는 것 같았다·
“키킥····”
그러면서도 용케 그 순간을 어떻게 참아냈는지 어이가 없는 마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저놈인 거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리니 팔짱을 끼며 내려 보고 있는 케이람의 얼굴이 보였다·
만약 그녀가 내 손을 막지 않았다면 난 필시 그놈을 자리에서 찢어 발겼을 것이다·
미친놈마냥 웃다가도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왜 막았어?”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니니?]
“너한테도 찬스였잖아?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그놈을 죽였다면 넌 날 흡수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맞이했을 텐데?”
본성을 잃은 영혼만큼 먹어치우기 쉬운 것도 없다·
광기와 살의에 잠식된 인간이야말로 마검이 원하는 최상의 먹잇감· 만약 케이람이 정말로 원했다면 마검의 본성을 발휘해 주인인 나를 먹어치우고 숙주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뜬 채 그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착각하지 마· 넌 아직 숙성 안 된 날고기일 뿐이야· 날 것에 그을음 좀 났다 해서 먹어치우면 입만 버릴 뿐이지· 넌 더 익을 필요가 있어····]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과 도도하게 올라간 입술·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마검의 추악한 미소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신경이 저리고 뼈가 얼어붙을 광경이었겠지만 난 오히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래야 내 애검답지!
[근데 확실히 그놈 면상을 보니까 네가 왜 그리 발작난 개마냥 으르렁댔는지 알 것 같더라· 어땠어? 전생의 원수를 만난 소감은?]
“다행이었지 뭐·”
[다행?]
케이람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도 이 지랄 맞은 인생을 다시 살면서 수없이 생각했거든· 내가 평생을 믿고 따랐던 그놈은 대체 언제부터 날 싫어했던 걸까? 내 능력이 너무 뛰어났던 탓에 조바심이 났고 그 조바심이 결국 시기로 바뀐 건 아니었을까? 그럼 아예 처음부터 내가 그놈 곁에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그런 비참한 죽음은 피할 수 있었을까?”
[안일하기 그지없네· 왜? 막상 형제라고 생각하니 연민이 생기기라도 했어?]
“나를 뭐로 보고? 그놈은 지금 아직 아무런 감투 하나 없는 껍데기일 뿐이야· 그런 같잖은 놈에게 복수한답시고 검을 휘둘러봤자 내 안에 쌓인 분노가 해소되진 않아·”
20년 후라면 모를까 지금의 에쉘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초석에 불과하다·
까놓고 말해 내 심장을 찔렀던 성검의 주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마당에 그런 놈을 죽여 봐야 뭐가 남겠는가?
“근데 그놈과 딱 마주친 순간 바로 알겠더라····”
[뭐를?]
심장이 아려오면서 그 때의 순간이 다시금 떠오른다·
금빛의 성검이 내 심장을 관통했을 때 그는 나와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나를 완전히 신뢰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때 보았던 비열한 눈빛·
녀석은 그때나 지금이나 소름끼칠 만큼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나로 인해 변한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더럽기 짝이 없었다는 걸· 필요할 땐 피 한 방울까지 빨아먹다가 필요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그놈은 애초부터 그런 놈이었던 거야·”
교활한 미소에 가려져있다 한들 난 그 본성을 이미 봤던 놈이다·
결코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내 몸에 새겨진 각인과도 같았으니 첫 눈에 봤을 때 바로 알아본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겠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안겨주고 싶은 에쉘 베르트라는 존재가 내가 원하는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니····”
그렇다 해도 난 아직 그놈을 죽이진 않을 것이다·
케이람의 말마따나 고기는 익었을 때 먹어야 맛있는 법·
그을음 좀 보였다 해서 바로 먹어버리면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없다·
“앞으로 아주 재밌어 질 거야 케이람·”
[재밌어져야지· 그래야 내가 오늘 일을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내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다짐한 삶·
그 삶에 에쉘 베르트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놈 뒤에 신이 있다 해도 상관없다·
난 그놈을 이 세계에서 철저하게 지워버릴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