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마계의 최강자 (2)
벨리아스에 위치한 황실의 저택·
지원군과의 합류에 성공한 아린 황녀는 황군 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경계문을 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그야말로 하루를 꼴딱 새어버린 긴 하루였다·
몸도 마음도 굉장히 지쳐버린 상황·
허나 피로에 찌든 눈동자는 좀처럼 감기지 못했다·
-똑똑·
“들어와····”
조금은 힘없는 목소리로 답하자 잔뜩 긴장한 얼굴의 한 여인이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 실례 하겠습니다· 황녀님!”
시안의 시녀 에밀리였다·
“어서 와· 쉬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다 당치 않아요 황녀님!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에요···!”
바짝 돋아난 어깨와 움츠린 목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을 끌어안고 부리나케 달렸을 때와는 상응이 안 될 정도로 어색한 느낌·
아린 황녀는 덩달아 자신이 당황하게 되었다·
“가 감사할게 뭐 있어? 내가 뭐라고····”
“에이! 무려 황녀님과의 만남인데 영광스러운 게 당연하죠! 아마 저 오늘일 평생 못 잊을 거예요!”
“그 그러니?”
참 생긴 것과 다르게 단순해 보이는 시녀였다·
일단 대책 없이 부르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지만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죄 없는 입술만 깨물뿐이었다·
“이 일단 미안하단 말부터 할게· 미련한 나 때문에 엄한 일 당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차마 눈을 볼 순 없어 고개를 돌리며 간신히 입만 열었다·
잔뜩 심란한 그녀와 달리 에밀리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미 미안하시다뇨? 당치도 않아요 황녀님! 정작 사과해야 할 건 못된 마수들이죠! 왜 꼭 황녀님 오신 날에 그렇게 떼거지로 나타나서는···!”
“그 그게 아니라!”
황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를 질러버렸다·
에밀리는 그 와중에도 자기가 뭘 잘못했나 싶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 나 때문에 네 주인이 잘 못 돼서···· 내가 주제도 모르고 괜히 너희 쪽으로 가는 바람에···· 아무 쓸모없는 날 지키겠답시고 네 주인이····”
짧은 시간이지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 시간 그 장소에 자신이 가지만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무능한 황녀의 객기로 인해 누군가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주인이 불상사를 겪고 말았다·
차마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들 수 없을 것만 같은 무력감·
감정이 복받친 황녀는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허나 이 사차원의 시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저··· 저희 도련님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직 죽진 않으신 걸로 아는데?”
아직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나 헤쳐 나올 힘조차 없는 그 어린 몸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까놓고 말해 누가 봐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너 설마 네 주인이 아직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죠? 저희 도련님 아직 안 돌아가셨어요!”
아린 황녀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사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 비록 물에 빠졌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높이였어! 비로 인해 물살도 매우 급해졌을 텐데 오히려 살아 있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에이 저희 도련님이 얼마나 독종이신데요? 그 정도로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에요! 아마 헤엄을 치든 나뭇가지를 붙잡든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실 걸요?”
아린 황녀는 생각했다·
일단 다 떠나서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판별할 수 있을 거라고·
이 시녀 지금 가식 하나 없이 순수하게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그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실 여기 오면서도 이미 질리게 듣고 왔어요· 다들 도련님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을 거라며 안타까워했지만 이상하게도 전 그런 생각이 하나도 안 들었어요! 분명 근시일내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멀쩡히 돌아오실 것만 같았거든요!”
묘하게 설득되는 이 기분·
분명 자신보단 오랜 시간을 지내왔을 테지만 이렇게 까진 생각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허나 반대로 말하자면 이 시녀가 자신의 주인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믿고 있는 거구나· 네 주인을····”
황녀의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했다·
그나마 한 명이라도 살아있을 거라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보았다·
“네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어?”
대화는 자연스레 시안에 관한 것으로 이어져갔다·
잠시 생각하던 에밀리는 뭐라 표현하기 모호했는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음··· 원래는 정말 가문에서 아무것도 못할 정도의 구제불능이셨어요· 거의 저택에 있는 시종들이 도련님이 있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존재감도 없었고요·”
그녀를 포함해 시종들에게조차 무시 받던 자제·
내로라하는 자식들 사이에서 아무런 주목도 못 받는 존재·
그것이 시안 베르트의 원래 이미지였다·
“근데 두 달 전이었나? 넷째 도련님과의 검술대련이 있었던 날부터 묘하게 달라졌었어요· 마치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능력을 그 순간부터 펼치기 시작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숨겨왔던 능력?”
“네! 암튼 그때부터 진짜 딴 사람이 되셨어요! 갑자기 전선으로 가고 싶다고 선언하더니만 공작님으로부터 당당하게 인정까지 받으셨죠· 전 정말 얼떨결에 따라갔지만····”
언뜻 가벼운 것처럼 보여도 저 해맑은 미소는 결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 무심한 남자가 이 시녀를 왜 데리고 다녔는지 알 것만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황녀님! 머지않아 저희 도련님의 무뚝뚝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실 테니까요!”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
허나 현실은 바람과 달리 매우 매정한 것이기에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순 없었다·
부디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아린 황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할 뿐이었다·
* * *
“푸확!”
살아 요동치는 공기의 단맛을 느낀 순간 쥐어짜냈던 모든 힘들이 싹 빠져나갔다·
“퉤퉤!”
입에 담긴 불순물들을 모두 뱉어내고 간신히 뭍으로 기어 올라갔다·
딱딱하다 못해 울퉁불퉁한 지면이지만 지금의 내겐 세상 그 무엇보다 편한 침대가 아닐 수 없었다·
“아··· 더럽게 힘드네·”
블러드 리버로 호기롭게 빠진 것 까진 좋았으나 그 뒤가 생각보다 매우 고단했다·
숨을 참았음에도 불구하고 코 깊숙이 찔러오는 누린내와 닿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역겹게 하는 사체들의 진득함·
그 사체들을 먹고사는 괴상망측한 수중 마수들의 공격이 더해져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가 이어졌었다·
그 망할 용가리 놈 처음부터 얌전히 잡혔다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언젠가 다시 한 번 마주친다면 날개부터 분질러서 도망가지 못하게 한 다음 머리에 뿔부터 발가락에 발톱까지 하나하나 다 씹어 먹어 줄 테다!
이내 부질없는 생각이란 걸 깨닫자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에효 그냥 첨부터 하던 대로 할걸 괜히 객기부리다 몸만 만신창이 된 기분이네·
가령 만신창이가 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쭉 뻗은 오른 손 끝엔 조금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 케이람이 쥐어져 있었다·
창백했던 자줏빛의 칼날은 어디 가고 검붉은 액체들이 덕지덕지 붙은 차마 마검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상태·
“혹시 죽었어 케이람?”
분명 깨어있을 것임에도 아무런 말이 없자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말 시키지 마·]
무겁게 내뱉은 한 마디에 풀어졌던 근육이 다시 움츠러들었다·
세상에 모든 짜증을 다 담아낸 듯한 목소리·
여기서 더 자극했다간 두 말 없이 내 목을 찔러 버릴 것이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손으로 주먹만한 크기의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슥슥
불순물 하나 없는 순한 물은 케이람에 붙은 이물질들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어느 정도 세정이 완료되니 잠시 후 안개와 함께 케이람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흐 이 찐득찐득한 기분 너무 싫어!]
“돌아가면 제대로 씻겨줄 테니까 지금은 참아줘·”
케이람의 굳은 시선에선 아직 풀리지 않은 짜증이 잔뜩 엿보이고 있었다·
[하? 그래도 돌아갈 생각은 있나보지? 네가 지금 어디에 왔는지 알기나 해?]
“뭐 일단 전선 지역은 아니겠지····”
전선의 하늘 보다 더 진한 붉은빛 하늘·
열기를 머금은 것 같은 불편한 공기와 살결을 자극시키는 싸늘한 한기·
그냥 딱 봐도 인간이 살기엔 한없이 불편할 것 같은 어색한 공간이었다·
이름 하여 마계·
결국은 돌고 돌아 이 께름칙한 땅으로 넘어오고 말았다·
와 여긴 또 진짜 얼마 만에 오는 거야?
감회가 새롭다 못해 아주 미치고 팔짝 뛸 심정이다·
[지금 팔자 좋게 상념에나 잠길 때야? 정신 안 차려!]
성질머리 하고는····
상념에나 잠길 때가 아니란 건 나도 알고 있다·
마계에 왔다 해서 이곳에 죽치고 살 건 아니기에 결국은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지금 쯤 나를 찾기 위해 기사들이 협곡 방방곡곡을 수색하고 다닐 터·
한 시라도 빨리 돌아가 기절한 상태로 발견되던가 해야지 안 그럼 돌아올 시기를 영영 놓칠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려 블러드 리버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고요하게 출렁이는 물결이 좀 전에 비해 확연히 좋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강줄기를 쭉 거슬러 올라간다면 별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긴 하겠다만····
내가 확실히 멀리오긴 했나보군·
레메아 협곡까지의 거리가 꽤나 까마득해 보인다·
적당한 시간에 맞춰 발견되려면 부지런히 가야 할 것이다·
“크르르····”
난데없이 들려오는 개의 울음소리·
돌아선 방향으로 한 무리의 헬하운드들이 나타나 있었다·
마침 원기도 회복해야 했던 참인데 잘 됐다고 해야 하나?
블러드 리버에서 대환장파티를 하고 왔던 터라 배도 많이 고파진 상태였다·
“컹!”
입을 한껏 벌린 헬하운드들이 패기롭게 달려들었지만 슥 하고 휘둘러진 검기에 목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늘 그랬듯 적당한 크기의 머리를 골라 입으로 들이 부었다·
[야····]
이제는 물만큼이나 익숙해진 느낌·
처음 먹었을 때 느꼈던 그 비릿한 냄새도 이제는 향기롭게 느껴질 정도다·
[야 주인아····]
이러다 나중엔 물보다 피 먼저 찾게 되는 거 아니야?
혹여 중독이라도 되면 곤란할····
[뒤를 좀 봐 이 멍청아!!!]
귀청 떨어질 법한 고함에 그만 들고 있던 머리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 케이람을 쳐다보니 그녀는 꽤나 심각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먹는데 왜 갑자기 소리를···?” “이거 봐! 내가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니까~?”
“···!”
사람은 본디 기억력에 한계가 있어 지나온 모든 것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절대적인 기억들이 존재하곤 한다·
비록 두 번 사는 삶에서도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그 기억 그 존재 그 목소리!
아직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이 능글맞은 목소리의 주인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서서히 고개를 틀어 케이람이 바라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게 깎아져 내린 절벽 위에서 쭈그려 앉아 나를 내려 보고 있는 한 남성·
그 얼굴을 본 순간 99%의 추측은 100%의 확신이 되고 말았다·
“너 인간 맞지?”
남성은 싱글벙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마계에 왔다지만 처음으로 만나는 마족이 이 놈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왜 이 남자가 아니 이 마족이 여기 있는 거지?
마왕 벨카리온·
전생의 나와 최악의 혈전을 벌였던 마계의 최강자가 지금 내 눈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