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황제의 순방 (5)
“상황을 보고하도록!”
폭죽소리를 들은 베르트 공작이 막사에서 뛰쳐나왔다·
근방에 있던 수호기사 율켄이 바로 달려와 보고를 시작했다·
“진영 캠프 근처로부터 다수의 마수들이 출몰했다고 합니다! 못해도 1부대급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출현 마수들은?”
“슬라임 늪두꺼비 이끼골렘을 비롯한 중하급 마수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지금 느껴지는 마기로 볼 땐 아마····”
“상급 마수까지 나타난 모양이군·”
공작의 뒤를 이어 디오네 황제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제는 검을 비롯해 이미 모든 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마수 놈들이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모양이야· 진귀한 특식이 나타났다는 것을 감지했나 보군·”
음주의 영향 때문인지 황제의 안면은 다소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리하지 마시옵소서 폐하! 속히 경계문 밖으로 대피를···!”
공작이 급히 만류했지만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을 높게 들어 올리고선 마법을 시전 했다·
“찬란한 인도의 빛이 어둠을 밝히리····”
황제의 손바닥위로 커다란 구체가 생성되었다·
구체는 하늘로 비상했으며 비바람으로 인해 제한되었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덕분에 기사들이 무장을 준비하기가 더욱 수월해졌다·
“난 아직 멀쩡하다네·”
황제의 얼굴엔 이전보다 여유로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쿵! 쿵!
지면 아래에서 정체불명의 진동이 느껴졌다·
이것은 마치 거대 생물의 발소리와도 같은 느낌·
“일단 농담 삼아 얘기하긴 했지만 마수들이 인간의 주둔지까지 오는 경우는 드문 일이지 않은가?”
“드문 일인 게 아니라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마수들의 토벌은 대부분 레메아 골짜기 초입에서부터 그 주변지역 안에서 행해졌다·
설정된 제한선을 넘을시 인간들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해 그 순간부터 토벌작전이 진행된다·
현재 공작과 황제가 위치한 곳은 경계문 근처의 후방 캠프·
마수들이 출몰한 골짜기 근처 진영 캠프와는 다소 떨어진 위치였다·
아직 후방까지는 못 미쳤다곤 하나 인간들의 주둔지로 직접 침투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 해도 무방했다·
“전군은 속히 무장을 완료한 뒤 진영캠프로 향한다· 싸울 수 없는 비전투병력들은 속히 경계문 밖으로 대피하도록!”
공작의 명과 함께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벌써 전투가 벌어졌을지도 모를 진영캠프의 기사들을 지원해주기 위해선 1초도 낭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곳엔 아직 공작의 아들이 남아있었다·
“자네의 아들도 거기 있는 것 아니었나?”
그것을 알고 있던 황제가 넌지시 물어봤지만 공작은 내색하지 않았다·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지금 집중해야할 것은 제 아들이 아닌 마수들입니다· 폐하·”
강직한 모습에 황제는 혀를 내둘렀다·
“참으로 단단한 친구가 아닐 수 없군·”
그러면서도 그 역시 황군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황군은 들어라! 지금부터 전선의 기사들과 합류하여 마수 토벌작전을 진행하겠다! 단 한 마리의 마수도 살려 보내지 마라!”
황제 또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마수들을 토벌할 준비를 완료하였다·
“참 그러고 보니 황녀는 어서 대피를····”
“황제 폐하!”
캠프 저편에서 황군 소속의 기사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아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녀님께서 지금 진영 캠프에 있다고 하십니다!”
황제와 공작의 얼굴이 급 돌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황녀가 왜 그곳에 있어?”
후방캠프에 있어야 할 황녀가 난데없이 전방에 있다하니 황제로선 얼 척이 없었다·
“개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30분전에 수호기사들을 대동한 상태로 향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황제 폐하께서 대화를 나누고 계실 때 가신 것 같습니다만····”
황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니 대체 이 험지에서 누굴 만나러···?”
“쿠에에엑!”
온몸을 경직시킬 듯한 괴성이 귓가를 강타했다·
마치 쓸데없는 논설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듯한 마수들의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지금은 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황제는 곧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황제로서 명하겠다· 황군의 전 병력을 동원해서 지금 즉시 진영캠프로 향하도록! 마주치는 마수들을 모두 토벌하되 황녀의 안위를 반드시 확보하라!”
“황제 폐하의 명을 받습니다!”
황명을 받은 기사는 급히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황제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검을 빼들었다·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할 것 같군 윌리어스·”
황제의 검에서 오색의 빛이 일어났다·
그의 검 끝은 황녀가 향한 진영 캠프를 가리키고 있었다·
* * *
진영 캠프로부터 조금 떨어진 숲속 어딘가·
우회된 길이긴 하지만 출몰한 마수들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목표는 산 아래 위치한 후방캠프까지·
황녀의 안위를 최우선적으로 두고 수호기사들과 함께 도주를 진행 중이었다·
[이렇게 도망쳐도 되는 거야?]
공중에서 떠있는 케이람이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
“어차피 대놓고 싸울 수도 없는데 있어봤자 방해만 될 뿐이지·”
[저 멀대들끼리 처리할 순 있는 거고?]
“설사 상급 마수라 해도 전선의 기사들을 당해낼 순 없어· 후방캠프에서 지원군까지 오면 손쉽게 토벌할 수 있을 거야·”
“자꾸 혼자 뭐라고 중얼 대세요 도련님?”
앞서 가던 에밀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달리라며 앞으로 손짓 했다·
1부대급 병력의 마수들이 닥쳐온 이상 막사 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자칫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 되면 주변 자체가 괴멸될 수도 있는 만큼 쓸데없는 비전투인력들은 가급적 사라져 주는 것이 이치였다·
“캠프의 기사들은 괜찮은 걸까?”
“걱정하지 마세요 황녀님! 그 못생긴 마수들이야 수호기사님들께서 단번에 처리해주실 거라고요!”
저 눈치 없는 시녀가 이럴 때 만큼은 참 도움 된단 말이지·
다급하고 급박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개선해 주고 있었다·
“아바마마 걱정 많이 하시겠지? 그냥 후방에 있었더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요 황녀님! 그 그러니까 뭐랄까? 때 아니게 밤 운동도 하고 좋은 거죠· 뭐! 여기 계신 기사님들도 그러지 않겠어요?”
에밀리의 말과는 달리 수호기사들의 표정은 근심 그 자체였다·
까딱 황녀가 잘못되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판인데 고작 밤운동 따위로 치부할 수 있을까?
때로는 눈치가 너무 없어서 문제였다·
-쿵!
거구의 발소리가 으슥한 저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전원이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쿵! 쿵!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기사들은 검을 뽑았다·
“마 마수···?”
경직되어버린 황녀를 뒤로 물리고 나 또한 앞으로 나섰다·
에밀리는 일찌감치 뒤로 숨어버린 상태였다·
“괘 괜찮아요! 부 분명 보잘 것 없는 하급 마수들일 거라고요···!”
하급 마수?
이런 거구의 발자국 소리가 고작 중하급 마수의 것 일리 없지 않은가?
이 정도 굉음이면 못해도 상급 마수의 것이다·
“크으으····”
우거진 나무들을 거치고 그 속에서 마수의 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대략 3미터 이상 몸집은 웬만한 성인 남성의 두 배·
온몸을 물들인 녹빛의 피부와 그 위에서 흐르는 진득한 수액·
축축한 습지에 서식하는 거대 상급 마수 ‘트롤’이었다·
“사 상급 마수?”
아린 황녀와 에밀리는 물론 황군 소속의 기사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끽해야 오거 같은 수준이라 생각했건만 난데없이 상급 마수가 출몰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전선이 아닌 황군 소속의 수호기사이었다·
그 말은 즉 마수들과의 전투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는 의미였다·
눈동자 없는 그을린 시선으로 우리를 마주하고 있는 트롤·
그 중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나를 뚫어져라 보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했더니만 역시나인가?
“쿠워어억!”
크게 괴성을 내지른 트롤은 마침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황녀님을 보호해!”
기사들이 재빨리 방어진을 펼쳤지만 그런 일반적인 전술이 상급 마수에게 통할 리 없었다·
-퍽!
가볍게 기사들을 걷어낸 트롤은 나를 향한 진격을 계속했다·
나는 황급히 황녀와 에밀리를 옆쪽으로 밀친 뒤 반대쪽으로 몸을 던졌다·
-쾅!
트롤의 육중한 주먹에 땅이 움푹 파여 버렸다·
보통의 인간이 저 안에 있었다간 온 몸의 뼈가 아작 났을 것이다·
“크르르····”
트롤은 여전히 나에 대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 덩치도 네 냄새를 맡고 온 모양인데?]
놈의 상태를 지켜보던 케이람이 웃으며 말했다·
“향수라도 뿌리고 다녀야하나···?”
지금 출몰한 마수들 중 내 냄새를 맡고 온 마수가 고작 이 놈 하나일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진영캠프에 나타난 마수들 중 일부도 나를 목적에 둔 놈들이겠지·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점점 더 골치 아파 지겠군·
“에밀리! 황녀님 모시고 도망쳐!”
“네?!”
“이 마수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를 노리는 것 같아! 내가 도망치면서 시간을 벌 때니까 그 틈에 빨리 황녀님이랑 후방으로 대피해!”
“아 알겠어요· 도련님!”
일말의 망설임 없는 대답·
역시 우리 시녀 말 잘 들어서 좋긴 한데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몰려온다·
“무슨 소리야? 넌 어쩌려고!”
그래도 이 미련한 황녀님께선 용납하실 수 없는 모양이다·
걱정은 고마울지언정 사실상 쓸데없는 참견일 뿐이다·
“제가 말씀 드렸죠? 도움이 못 되면 방해라도 말아야 한다고 지금 황녀님이 전력을 다해 도망치시는 게 저한텐 가장 큰 도움입니다!”
“그 그래도 이건···!”
망설이는 황녀의 몸을 에밀리가 번쩍 들어올렸다·
“지금은 도망이 먼저에요 황녀님! 저희 도련님은 어떻게든 살아나실 거라고요!”
“그게 말이 돼? 대체 저 마수한테서 어떻게 살아남겠다는 건데?”
“알아서 하시겠죠 뭐! 몸 조심하세요 도련님!”
일단 말은 했으면서도 가다가 넘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몸을 추스른 기사들도 이내 눈치를 보더니 황녀와 함께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몸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도주를 시작했다·
이에 트롤 또한 큰 굉음을 내며 나를 추격하였다·
“시아아안!!”
누군가의 애절한 부름이 들려온 것 같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한 순간 도주를 멈추고 녀석을 마주하였다·
[어때? 이번에도 도와줄까?]
“네 속셈에 두 번은 안속아·”
데스 웜 때야 그냥 저지른다 식으로 했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호흡을 바로잡은 뒤 내면에 잠든 마나를 이끌어 케이람으로 전승시켰다·
-반짝
도신에서 짤막한 검은 빛이 일었다·
트롤의 몸을 찢어발길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상급 마수의 피 맛 한 번 볼까?”
트롤은 가소롭다는 육중한 주먹을 다시 한 번 들어올렸다·
주먹이 공중에서 땅에 박히기 까진 단 1초·
물론 그 1초 뒤에도 주먹이 온전하게 붙어 있진 않을 것이다·
-쐐액
-쿵
호기롭게 든 것과 달리 트롤의 주먹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놈의 음침한 눈빛이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땅에 박힌 주먹과 그 끝에 흐르고 있는 다량의 피·
그 잔인한 광경을 본 순간 트롤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크아아악!”
팔이 잘려나간 고통에 트롤은 크게 몸부림쳤다·
고통엔 고통으로 잊어야 하는 법·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장대비 속에서 마검의 매혹적인 춤사위가 이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