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황제의 순방 (1)
아침이 밝았다·
여느 때와 같이 붉디붉은 전선의 하늘·
아침이라 하기엔 좀 무안하긴 하나 달리 부를 말도 없지 않은가?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멍한 느낌이다·
마치 전날 과음 후 만취상태로 잠들었다가 다음날 깨어난 기분이랄까?
그래 뭐 확실히 어제 달리긴 달렸지····
베게 밑 속에 넣어두었던 케이람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
아주 잘 자고 있다·
어젯밤 그 난리를 펴놓고 얘나 나나 아주 두 발 쭉 펴고 잘 잔 모양이다·
내가 미쳤지·
고작 마수 하나 잡겠다고 ‘마검 발현’을 쓰다니·
거기에 그치지 않고 무검(霧劍) 비기까지 사용해버렸다·
그나마 마수들의 피를 어느 정도 섭취했으니 망정이지 아마 한 달 전이었으면 몸의 장기랑 혈관이 다 터졌어도 모자랐을 것이다·
변태 마검의 유혹에 아주 제대로 넘어가 버렸다·
-웅성웅성
밖이 소란스럽다·
아마 어제일 때문이겠지·
급하게 벗어난다고 데스 웜의 사체도 아예 던져버리고 왔으니 본의 아니게 짬 때린 꼴이 되고 말았다·
아 생각해보니까 굉장히 아깝네?
나름 귀하다면 귀한 상급 마수를 잡고서도 피 맛 한 번 못 보다니·
이미 지금쯤이면 까무잡잡한 재가 되어 형체조차 안 남았을 것이다·
“어? 일어나셨어요 도련님?”
식재료들을 한 꾸러미 안은 에밀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는 운동을 되게 고되게 하셨나 봐요? 코까지 고실정도로 곤히 주무시던데요?”
“됐고· 밖이 어지간히 시끄럽던데 무슨 일 이야?”
에밀리는 기다렸다는 듯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말도 마세요! 글쎄 어젯밤 레메아 골짜기 초입부근에서 상급 마수의 시체가 발견 됐데요! 주둔지 근처에서 상급 마수가 발견된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 지금 모든 기사들이 경계 시설을 재점검 한다고 바쁘게 움직이나 봐요!”
“다른 건?”
“네?”
“상급 마수 말고 다른 얘기는 없었냐고·”
생각 외로 무덤덤한 내 모습에 에밀리는 말을 더듬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딱히 다른 얘긴 못 들었어요· 그냥 상급 마수의 시체가 발견 됐다는 거 말고는····”
“즉 상급 마수의 시체 얘기 말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지?”
“···네·”
“됐어 그럼·”
기사들 사이에서 퍼진 건 딱 저기까진가 보군·
비록 공작을 비롯한 일부 기사들에게 들키긴 했지만 비기(암무 1식: 위장)를 써서 본모습은 감춰냈으니 일단 나라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문제는 그 비기를 알아봤을 자들이 몇 명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데···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봐야 할 듯싶다·
“시안 도련님 계십니까? 수호기사 율켄입니다·”
막사 밖으로부터 율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인기척으로 보아 그 외에도 다수의 기사들이 동행한 듯 보였다·
정기적인 확인 시간도 아닌데 어쩐 일이지?
“무슨 일이야?”
“공작님으로부터 도련님을 모셔오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바로 동행해주시겠습니까?”
“혹시 무엇 땜에 그러는지 알 수 있을까?”
“오후에 예정된 황실일가의 방문에 관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도련님께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황제의 순방에 관해서인가?
하긴 명색이 공자인데 자식 노릇은 해야 한다는 거군·
“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
베개 속에 잠든 케이람을 몰래 챙긴 뒤 율켄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주둔지의 크기를 측정하자면 대략 마을 하나 정도의 넓이가 나오는데 공작의 거처는 정확히 정중앙에 위치해있다·
신속한 보고체계를 위한 위치 선정이었으며 실제로 아버지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웬만하면 거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철통경계를 유지하고 있는 수호기사들을 지나 아버지가 자리하고 있는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를 보던 아버지가 나를 보고선 앉을 것을 지시했다·
“전선에서의 생활은 어떠하더냐?”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언젠간 저 또한 이곳에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늘 다짐하는 바입니다·”
“그래 나도 생각 외로 네가 오래 버텨주는 것 같아 대견하구나· 혹여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면 언제든지 얘기해도 좋다·”
나는 호의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 정해진 기간보다 먼저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못해도 10개월·
11살이 되어 로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진 전선에서의 생활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이 얘긴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혹 오늘 누가 방문하는지는 알고 있느냐?”
“어렴풋이 듣기론 황제폐하를 비롯해 황실일가의 방문이 예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대 우시프 제국의 군주 ‘디오네 황제’께서 오늘 전선지역에 대한 순방이 예정되어 있으시다· 그래서 오늘은 내게 부탁을 하나 하고 싶구나·”
“어 어떤 부탁 말이옵니까?”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던 아버지가 오늘따라 느긋해 보인다·
뭐 대충 예상은 간다·
자식 된 도리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라는 거겠지·
듣자하니 이미 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나는 꽤 유명인사가 된 모양이다·
베르트가의 다섯째라는 놈이 얼마나 대단 하길래 벌써부터 전선을 갔다는 둥
기사들과 함께 마수들을 토벌하러 다닌다는 둥
별 쓸데없는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서 오르내린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로선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시기와 질투가 판을 치는 귀족 세계에서 난 결국 그들의 좋은 씹을 거리가 되어줄 뿐이다·
어차피 가문은 다른 자식에게 물려줄 거라는 둥 근본도 없는 자식이 잘 보이려고 발악을 한다는 둥····
어휴 생각해봐야 내 기분만 잡치지·
암튼 아버지로선 일단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식이 나뿐이니 오늘 하루만큼은 곁에 두면서 황제의 순방을 보위하라고 할 것이다·
“혹 제국의 5황녀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
음? 웬 뜬금없이 5황녀?
“5황녀··· 말입니까?”
가만있어보자 지금 이 시기 제국의 5황녀라 한다면···그 비운의 황녀를 말하는 건가?
이름이 아마····
“혹 ‘아린 세벨러스’ 황녀를 말씀하시는 지요?”
“그래· 너와는 동년배기 나이이자 황실 일가의 막내다· 오늘 예정된 순방에 그녀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구나·”
흥미롭긴 해도 딱히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황제가 오든 황제의 딸이 오든 내 알바는 아니지만 일단 공작이 아무 관련 없이 그녀를 언급하진 않았을 것이다·뭔가 싸한 기분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네가 그 아린 황녀를 맡아주겠느냐?”
“예?”
뭘 맡으라는 거지? 호위? 시중?
솔직히 둘 다 싫은데?
“놀랄 거 없다· 그냥 서로 곁에 있으면서 친분을 나누라는 거다· 어차피 내년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다시 만날 사이지 않겠느냐? 황실의 사람과 친목을 다져서 나쁠 건 없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겠지만 아무쪼록 좋은 관계로 발전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부탁하는 거다·”
“····”
더 싫다·
이건 뭐 완전 에스코트 하라는 거잖아?
내가 뭣 하러 새침데기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 그런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거지?
그것도 비운의 황녀랑?
뭐 백번 양보해서 황실 일가랑 친목을 다지라는 공작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그 대상이 잘 못됐다·
아린 세벨러스는 가까이해야할 존재가 아닌 내 입장에선 정말 멀어져야 할 존재란 말이다·
지금이야 아무도 모르겠지·
그 황녀는 몇 년 뒤 제국 내전에서 반역세력의 주모자로 몰려 희생되는···!
“소자· 부족하지만 공작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후 나만 아는 미래를 혼자 지껄여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단은 따르겠다고 할 뿐이다·
“고맙구나· 그럼 좀 있다 황실일가가 오면 다시 보도록 하자구나· 이만 돌아가도 좋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뒤 바로 돌아섰다·
생각보다 골치 아픈 일을 떠맡아 버렸다·
그냥 최대한 보여주기 식으로만 하면 되겠지 뭐·
애초에 난 그거 말고도 신경 쓸 일이 아주 많····
“어젯밤에는····”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저음에 발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이어지지 않은 다음 말을 듣기위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얼굴은 돌연 무겁게 변해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무엇을 하고 있었냐라?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진 몰라도 내가 할 수 있든 답은 하나였다·
“피곤한 나머지 일찍 숙면에 들었습니다· 마수가 나타났다는 신호에 급히 달려 가봤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터라····”
현장에서 도주한 뒤 나는 즉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진영캠프로 복귀했다·
당시 나를 마주친 다른 기사들도 적지 않게 있었으니 알리바이는 확실했다·
표정변화 하나 없는 내 모습에 공작은 경계심을 풀었다·
“그랬구나· 알겠다· 그만 돌아가서 쉬어라·”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아섰다·
그러고선 내가 막사를 나오기 전까지 나의 뒷모습을 미묘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어떤 대상과 크기를 비교해보려는 듯한 의심의 눈초리로····
과연 아버지라고 해야 할까?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의 의심대상이 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기 아들이라 할지라도····
훗·
나는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 * *
벨리아스와 전선을 경계 짓는 거대한 석벽·
단순한 돌덩이처럼 보일지언정 저 벽에는 고등급 마법 결계가 서려져 있다·
그 중심부에는 하나의 성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전선으로 드나들 수 있는 대륙의 유일한 경계문이기도 했다·
경계문의 안쪽으론 베르트 공작을 비롯한 다수의 수호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마다 근엄한 표정과 엄격한 자세로 귀인의 영접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부우우!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무거운 호각소리와 함께 기사 한 명이 크게 선창하였다·
머지않아 수십 명의 기사들과 그 안에서 위엄을 갖추고 있는 황제의 자태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시프 제국의 황제 ‘디오네 세벨러스’
장소가 장소였던 만큼 그의 복장은 언제라도 전투가 가능하도록 무장된 상태였다·
경계문에 다다른 황제가 말에서 내리니 기다리고 있던 베르트 공작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벨리아스의 영주 윌리어스 베르트·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항상 고생이 많네 윌리어스! 우리 사이에 이럴 필요는 없어·”
황제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 마냥 손수 공작을 일으켜 세웠다·
황제와 공작의 관계를 떠나 둘의 사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로얄 아카데미에서부터 이어져온 두 사람의 친분은 세간에서도 알아줄 정도며 실제로 황제가 가장 신임 하는 귀족이 배르트 공작이라고 직접 언급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들만의 겉치레 인사가 오고 가던 와중 황제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호오 이런 절망적이고 어두운 곳에 저리 밝은 새싹이 있을 줄이야·”
단번에 나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고선 차분하게 앞으로 나가 고개를 숙였다·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 시안 베르트라고 합니다·”
황제는 내가 무척이나 흥미로운 듯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야기가 사실이군· 이렇게 어린 소년이 이런 험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니 역시 그대의 자제들은 다른 것 같군 윌리어스·”
“과찬의 말씀이옵니다 폐하· 아비로서 매우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나 역시 그대들에게 소개를 해야 할 사람이 있네·”
황제가 뒤를 돌아보니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마차에서 내렸다·
짙은 은색의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를 가진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우시프 제국의 5황녀 아린 세벨러스입니다·”
오늘 함께 방문하기로 예정 되었던 아린 황녀였다·
전생에서야 황제가 오든 말든 난 저택에서 틀어박혀 있었기에 알바는 아니었다만 보통은 1황자가 동행하기 마련인데 그녀가 온 것이 조금 의외이긴 했다·
황실일가가 단체로 병이라도 걸렸나?
별 생각 없이 지켜보던 와중 고개를 들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애가 애 취급을 받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는가?
암만 아닌 척 해봐야 속이 훤히 다 보이기 때문에 애인 것이다·
하물며 황녀도 마찬가지 순간적으로 스쳐가면서도 그녀의 속마음을 뻔히 확인 할 수 있었다·
“···?”
날 시기하는 것 같은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