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레메아 골짜기 (2)
낙하하는 동시에 손과 발을 대자로 뻗었다·
“암무 3식: 안개 활강!”
영창과 동시에 몸속에서 검은 안개가 분출되었다·
안개는 순식간에 내 몸을 감싸 안았고 이내 추락하는 속도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하강하는 모습이 흡사 날다람쥐를 연상시켰다·
절벽 아래는 큰 나무들이 우거진 수풀지대였다·
지면에 조심스레 발을 대니 안개는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크르르····”
아직 골짜기엔 입성조차 안했건만 숲속 저편에서 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슬며시 고개를 드니 침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는 다수의 헬하운드와 마주하게 되었다·
뭐 애피타이저라고 생각한다면 나쁠 것 없지·
-스윽
자연스레 품에서 검을 꺼내었다·
그와 동시에 뒷걸음질 치는 헬하운드·
검의 기운을 접한 것만으로도 압박감을 느낀 것이다·
허나 이성 자체가 없는 놈들에겐 그것도 잠시 뿐·
격하게 짖던 녀석들이 결국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컹!”
-서걱
포물선을 그리듯 검을 반원으로 그었다·
헬하운드의 머리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으며 잘려진 틈사이로 검붉은 피들이 철철 흘러내렸다·
찢겨진 시체들을 무심히 보다가도 그중 적당한 머리 하나를 골라 그대로 집어 들었다·
-꼴깍꼴깍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마수의 혈액·
흐····
맛을 둘째 치고 올라오는 냄새가 매우 역겨웠다·
허나 이마저도 적응 된지 오래라 딱히 개의치는 않는다·
다만 지금 이 모습을 누가 본다면 날 결코 인간이라 생각하진 않겠지·
이건 뭐 마족으로 오인 받아 살해당해도 억울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툭
어느 정도 식사를 완료한 순간 놈의 머리를 미련 없이 던져버렸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서 까지 마실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가 한 입 먹고 버린다 해서 씨가 마를 놈들도 아니니까·
“후우우····”
온몸에 열이 상승하고 혈기가 솟구치는 기분이다·
이는 마수의 피가 내 몸에 제대로 흡수되었다는 증거·
날이 갈수록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매번 느끼게 된다·
그래도 쓰레기 처리는 확실히 해야 하는 법·
하나하나 돌아가며 복용을 마친 뒤 헬하운드의 시체를 한 곳으로 모았다·
-화륵!
손가락 끝에서 떨어진 작은 불꽃이 곧 그들의 시체에 붙으면서 점화되었다·
마수들의 시체는 만약 그 근처를 다시 올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불로 소각 처리해야 한다·
안 그럼 부패하는 동안 엄청난 악취가 퍼져 주위를 오염시킬 것이다·
그 악취는 일반 짐승의 썩는 냄새와는 비교자체가 안 되기에 전선의 군사들 역시 항상 마수들과의 전투 후에는 놈들의 시체를 태우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
시뻘겋게 타오르는 사체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짓거리도 벌써 한 달 째네·
이렇듯 나는 매일 밤 그 누구도 모르게 혼자 나와 마수들을 사냥하러 다닌다·
전선의 기사들이 대놓고 붙어 다니진 않기에 들키지만 않으면 상대적으로 활동하는 건 수월했다·
다만 그들도 주기적으로 내 안위는 확인 하는 만큼 이를 위한 대비책으로 에밀리를 이용하고 있었다·
밤운동을 핑계 삼아 몰래 나오는 대신 그녀로 하여금 ‘시안 도련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같은 상황을 연출하게 한 것이다·
기사들의 진영캠프는 레메아 골짜기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조금만 방향을 틀어 아래로 뛰어내린다면 바로 마수들의 영지로 직행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아래로 진짜 뛰어내릴 머저리는 없겠지·
허나 공교롭게도 난 이런 방식을 통해 계속해서 두 곳을 왕래하며 하루하루 내 몸을 단련시켜 왔다·
[야 주인아· 이제 이런 개새끼들은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니?]
솟아오르는 연기들 사이로 어느 샌가 케이람이 실체화하여 나타나있었다·
[네가 섭취한 피들만 따져도 벌써 목욕탕 하나는 채웠을 걸? 설마 계속 이런 잡다한 놈들만 잡을 건 아니지?]
확실히 한 달 동안 내가 잡은 마수들은 헬하운드 오거 하피 같은 중하급 마수들뿐이었다·
솔직히 30일가지고 전성기의 힘을 완전히 되찾는 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런 와중에 무턱대고 상급마수들을 상대했다가 화를 당하면 누굴 탓하겠는가?
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했다·
물론 언제까지 송사리들과 투닥 댈 수는 없는 노릇·
이미 내 몸은 전선에 오기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쓰지 못했던 고등급 마법과 비기들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슬슬 안쪽으로 움직일 때가 되긴 했지·”
[그치? 그럼 얼른 제대로 된 놈들을 사냥하러····]
“근데 오늘은 아니야·”
[아 왜?!]
칼 같은 거절에 그녀는 괴성으로 화답했다·
“다른 땐 몰라도 오늘은 안 돼· 내일은 황실 일가가 순방 오는 날이니까·”
[순방?]
여러 번 말했듯 벨리아스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전선으로 분류되는 지역이다·
평화의 줄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장소를 국가에서 그냥 방치할리도 없다·
반년에 한 번씩은 제국의 황제가 직접 방문하여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보고 간다·
사실 그마저도 베르트 공작이 총권을 잡은 이후엔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머리에 똥만 찬 중앙귀족들이야 예전부터 전선에 대한 지원을 줄여야 한다는 말 같잖은 소리를 지껄였지만 그래도 현 황제는 현명한 군주다·
당장의 이익을 좇기보단 다가올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 전선과 중앙정부 사이의 균등한 공생이 유지되고 있는 거겠지·
뭐 그것도 현 황제가 살아있기까지의 얘기지만·
몇 년 뒤 지금의 황제가 서거한다면 제국은 그야말로 개판으로 전락할 것이다·
아무튼 황제의 방문이라는 빅 이벤트가 예고된 이상 섣부른 행동은 안 하는 게 좋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나대지 않고 하던 대로 할 예정이다·
[참나! 언제는 마왕도 때려잡을 듯이 자신만만하더니만 고작 황제 따위가 무서워서 안 움직인다는 거야?]
“그냥 골치 아픈 일을 방지한다고 생각하자· 나도 이번 생은 편히 살고 싶거든?”
[편히 살고 싶다는 놈이 나는 왜 찾은 건데!]
흠 그것도 그렇네?
내가 말하면서도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뭐 그렇다면 그런 거지·
불평하는 케이람을 애써 달래며 레메아 골짜기로 진입했다·
달빛 한 점 들지 않은 무지의 황야·
주변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안보일 만큼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띠링
손끝에 마나를 발현시켜 눈에 접촉시켰다·
그 후 살며시 눈을 감았다 뜨니 깜깜했던 시야가 바로 선명해졌다·
1성급 마법 ‘암순응’·
눈이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켜 단시간의 시야를 확보하는 어둠 속성의 마법이다·
1성급의 매우 기초적인 마법이지만 속성이 맞지 않는다면 8성급 마법사들도 구사하기 힘들만큼 선천적인 요소가 짙었다·
물론 나야 속성이 맞기에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지만 다른 속성마법에 비하면 딱히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어둠 속성은 제국 마법 학회에서도 최하 속성으로 분류될 만큼 개차반 신세를 받고 있으니
그래도 힘은 쓰기 나름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보란 듯이 유용하게 쓰고 있지 않은가?
참 재밌는 일이야·
“키키킥!”
시야가 확보된 순간 붉게 빛나고 있는 수십 개의 눈동자들과 마주쳤다·
평소엔 손수 돌아다니며 찾아다녔을 놈들이 오늘은 단체로 마중들을 나와 있다·
나름 수고를 덜긴 했지만 아직 골짜기 초입인데 서로 각기 다른 마수들과 조우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흐음····]
마수들을 또렷이 지켜보던 케이람도 의문스러운 듯 턱을 괴었다·
[얘들 지금 겁에 질려 있는데?]
“겁에 질려 있다고?”
일단 당장에 보이는 것은 헬하운드와 거대 사마귀 마수 캐니언 멘티스 그리고 아직 자라지 않은 소형 오거들이 전부였다·
보통 같았으면 보자마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을 놈들이 평소와 달리 심히 주춤거리는 것이 보였다·
케이람 때문이라 하기엔 솔직히 심각할 정도였다·
이건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오다가 예기치 못하게 나를 마주친 듯한····
“···!”
고요하다 못해 적막할 땅 속에서 불현듯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위험을 감지한 나는 재빨리 몸을 공중으로 비상시켰다·
-콰직!
몸이 날아오름과 동시에 땅속에서 거대한 이빨이 튀어나왔다·
미처 피하지 못한 마물들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순식간에 삼켜져버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기에 나까지 포함 될 뻔했다·
“쿠에엑!”
아득바득 움직이는 이빨들 속으로 비명소리가 들렸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난 저 괴상망측한 이빨의 정체를 알고 있다·
[웜이네?]
덩달아 튀어 오른 케이람은 흥미롭다는 듯 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작 내 뺨에는 한줄기의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데스 웜’·
레메아 골짜기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는 상급 마수·
골짜기 깊은 음지에 서식하는 놈이 왜 이곳에?
땅속에서 솟은 기다란 돌기가 나를 향해 날카롭게 버려져 있었다·
마치 나를 놓친 것을 아쉽다는 듯이····
* * *
밤하늘에 떠오른 둥근 달과 그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평야·
시간은 어느덧 황혼을 넘어 새벽으로 접어들고 있지만 넓은 들판 위에는 다수의 마차들이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마차 주변에는 서로 다른 병기로 무장한 수십 명의 호위병들이 감히 접근조차 못하도록 철저한 경계진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
마차 안에서 다소곳이 앉아있던 소녀는 문득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자신들 외엔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함·
마치 거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황녀님 좀 주무시는 게 어때요?”
마주앉은 자리의 시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아· 한가롭게 잠이나 자자고 여기 온 건 아니니까····”
퉁명스러운 답변에 시녀는 무안해지고 말았다·
소녀의 몸엔 황실의 증표라고 할 수 있는 붉은 브로치가 달려있었다·
“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는 게 어떨까요? 벨리아스까지는 몰라도 굳이 위험한 전선에까지 가실 필요는····”
“난 명백한 제국의 황녀야! 아바마마와 마찬가지로 황실일가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가는 거라고! 한번만 더 그 말 하면 나 정말로 화낸다?”
소녀의 눈은 실로 올곧으면서도 당당했다·
시녀는 죄송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하····”
한숨을 내쉰 소녀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의 분위기가 매우 어색해지니 시녀는 뭔가 반전시킬만한 주제는 없을지 머리를 빠르게 굴려보았다·
그러다 무엇 하나가 생각난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아! 그 그러고 보니 수호기사들에게 우연히 들었는데 지금 전선에는 황녀님 또래의 남자아이도 한 명 있다고 해요!”
“남자아이···?”
소녀는 관심이 생긴 듯 시선을 돌렸다·
“네! 베르트 공작님의 자식이라 하던데 신기하게도 황녀님처럼 전선에 가고 싶다며 스스로 자원했다던 걸요?”
이야기를 들은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베 베르트 공작이란 사람은 그걸 허용한 거야?”
“물론 처음엔 반대했데요·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안 공작이 그에게 시련을 내렸다나 봐요· 그 시련을 당당히 통과하고 인정받아서 전선 행을 허락 받았대요!”
“시련···?”
조금 전까지 무미건조했던 그녀의 눈이 어느새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나랑은 딱히 상관없잖아! 굳이 비교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 자제도 다 생각이 있어서 가고 싶다고 한 거겠지·”
“그래도 대단하지 않나요? 마치 황녀님을 닮으신 것 같아요· 황녀님도 황제 폐하께 손수 말씀드려서····”
“됐어· 그 얘긴 이제 그만해· 나 이제 피곤하니까 눈 좀 붙일게· 도착하면 깨워줘·”
“예··· 황녀님”
이야기를 끊은 소녀는 바로 눈을 붙였다·
시녀 역시 포기하고 잠자코 있으려던 찰나 소녀의 물음이 다시 들렸다·
“그 남자··· 이름이 뭐래?”
화들짝 놀란 시녀는 잠시 얼을 타고 말았다·
“아 그 그게 그러니까· 시 시안! 시안 베르트 라고 했던 것 같아요!”
“시안 베르트····”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묘하게 기억하기도 쉬운 이름이었다·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의 이름이 자꾸만 되새겨지고 있었다·
그러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달은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소녀는 머지않아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