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4화
724. 인연 1
[진성그룹.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진출?]
MBS 아침 뉴스에서 진성그룹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진출한다는 기사가 자막과 함께 나오고 있었다.
곁에 있는 진성준 대표도 어이없는 표정인 걸 보니 그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MBS TV 뉴스의 보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현장의 장지훈 기잡니다. 지금 전 TNT 엔터 본사에 나와 있는데요. 관계자에 따르면 진성그룹 진명규 전 부회장과 진명희 대표가 지분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편 진성 측이 확보한 TNT 엔터 지분은 40% 이상으로 계열사로 편입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엔터업계의 상당한 지각변동이 예상되는 가운데······.
민규리가 <화란전> 촬영 현장에서 유강석 대표가 TNT 엔터를 팔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TNT 엔터의 대표는 여전히 유강석이지만 진성그룹의 후계자 두 명이 나서서 지분을 획득했으니 시장도 진성그룹이 엔터 사업에 진출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당연했다.
뭐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나저나 선물을 준다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고?
삑.
석한중 비서실장이 TV를 끈다.
난 진대운 회장에게 물었다.
“선물이라는 게 이겁니까?”
“내가 자넬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면 이건 회장님도 모르시던 일이라는 겁니까?”
“그래.”
믿기지 않았지만 계속 따지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럴 바에는 지금부터 후폭풍을 대비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TNT 엔터의 인적 네트워크와 여전히 건재한 스타들 거기에 진성의 자금이 더해지면 앞으로 어떤 일도 생길지 모르니까.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 순간 진대운 회장이 날 붙잡았다.
“갈 때 가더라도 선물은 받고 가야지.”
“그 선물이 뭐든 간에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게 굴렁쇠 엔터의 상장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도?”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려던 난 멈칫했다.
진대운 회장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상대의 의중을 듣는 것 자체가 손해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 실장 표정을 보면 날 안 믿는 것 같지만 오해야. 오늘 정 실장을 부른 이유는 우리 진성이 굴렁쇠의 백기사가 되어 주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어.”
진대운 회장이 내 편을 들어준다고?
회귀하지 않았다면 혹하고도 남을 조건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진대운 회장이 누군가와 이익을 나눴다는 기억은 없다.
잠깐 손을 잡은 파트너라고 할지라도 돈이 된다 싶으면 잡아먹던 인간이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그건 선물이 아닐 듯합니다.”
진대운 회장이 날 빤히 쳐다본다.
“말하는 걸 보니 혹 따로 받고 싶은 선물이 있나 보군.”
받고 싶은 건 없었지만 그 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다.
“예. 있습니다.”
“후~ 좋아.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그래. 자네가 받고 싶은 선물이 뭔가?”
난 잠깐 심호흡을 하고서 답했다.
“진성그룹이 저희 굴렁쇠 엔터의 상장에 일절 관여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진대운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니라 관여하지 말라고?”
“예. 저희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게 두십시오.”
진대운 회장에게 백기사를 요청하는 것은 호랑이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셈이다.
백기사가 아닌 흑기사를 불러들이는 셈이고.
그러니 그의 돈은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
진대운 회장이 날 말없이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다 결국 작게 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그렇게 하지.”
진대운 회장이 석한중 비서실장을 쳐다본다.
“들었지? 석 실장? 계열사 경영진들에게도 굴렁쇠 엔터의 상장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전하게.”
“예. 회장님.”
“진성식품도 끼어들지 말고.”
진성준 대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회장님!”
“넌 진성 아니냐? 정 실장이 관여하지 말라고 하잖느냐.”
진성준이 대표로 있는 진성식품의 자금줄을 막는 것 역시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진성의 돈이 아니더라도 돈을 받을 곳은 많았기에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진대운 회장은 지시를 내린 뒤 내게 덤덤히 말한다.
“이걸로 진짜라면을 살려준 데 대한 선물은 했네. 나중에 가서 딴소리하지 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선물 감사합니다.”
진대운 회장이 가만히 날 쳐다보더니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다.
“거참. 알았어. 가 봐.”
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몸을 돌렸다.
그때 진성준 대표가 날 따라오며 조용히 속삭인다.
-정 실장님. 잠깐만 저랑 따로 보시죠.
어차피 진성준 대표와도 뒤처리에 관해 이야기해야 했다.
-예.
우린 서둘러 진성그룹 회장실을 나섰다.
* * *
정윤호와 아들 진성준이 함께 회장실을 나선 순간 진대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TV에서 일어난 일만큼은 진대운 회장도 모르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명규랑 명희는 갑자기 왜 이딴 짓을 한 거야?”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진성준 대표의 방식을 따라 하는 것 같습니다.”
“성준이를 따라 하다니?”
“연예인을 앞세워 화제 몰이를 하는 것 말입니다. 사실 ‘진짜라면’의 열풍도 광고가 먹힌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한창 근신해야 할 놈들이 뉴스를 타면 어쩌라는 거야?”
“공식적으로야 그저 개인적인 투자일 뿐이라고 둘러대지 않겠습니까? 또 TNT 엔터의 현 대표를 그 자리에 앉혀둔 것도 사회적 파장을 무마하려는 행동으로 보이고요.”
진대운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재보궐선거가 코앞이라 자칫 불똥이 튈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이기 때문이다.
“회장님. 언론이 이 일에 관해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어떻게 하긴. 진성그룹 측의 공식적인 투자가 아니니 오해라고 해야지. 그리고 전 임원들의 개인 투자이고 엔터업계에 진출할 생각이 없다고 정정 보도도 요청해.”
“알겠습니다.”
진대운 회장은 지시를 내리고 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정윤호와 만나면 계획했던 것들이 이상하게 어그러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조금 전 상황이다.
진대운은 당당히 자신에게 할 말을 하던 정윤호의 대답과 태도가 좀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이봐. 석 실장.”
태블릿을 들고 있던 석한중 실장이 고개를 숙인다.
“예. 회장님.”
“자네 같으면 그놈처럼 할 수 있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정윤호처럼 감히 진성의 회장이 돕겠다는 걸 거절할 수 있겠냔 말이야.”
석한준 실장은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저라면 못 이기는 척 회장님의 도움을 받았을 겁니다. 저희 같은 대기업이 백기사를 서면 공모가가 몇 배나 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서로가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놈은 왜 거절했을 것 같나?”
“경계심이 강해서일 수도 있고 저희가 모르는 뒷배가 따로 있어서 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진성이 백기사로 나선다면 자기들의 몫이 줄어들 테니까요.”
“흠~ 일리가 있군. 그러면 저놈한테 백기사들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
“알겠습니다.”
석한중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팀을 정윤호에게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윤호는 어찌나 도깨비처럼 일을 처리하다 보니 종잡을 수가 없어서였다.
회장의 지시를 기록한 석한중은 이어서 조심스레 묻는다.
“그런데 정 실장한테 한 약속은 정말 지키실 겁니까?”
“쩝. 명색이 진성의 회장이라는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인데 지켜야지. 하지만 상황은 계속 주시하도록 해.”
석한중은 그럼 그렇지란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약하면 한입에 홀랑 삼키고도 남을 사람이 진대운이란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대운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혹시 더 보고할 거 남았나? 없으면 ‘진짜라면’ 리뉴얼된 걸로 함께 아침이라도 하지.”
진대운이 아침부터 라면을 먹는 건 20년 전 처음 ‘진짜라면’이 첫 출시 했을 때나 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진짜라면 리뉴얼 광고를 보고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식사를 하자고 한다.
“마지막 한 가지 보고할 사항이 남았습니다.”
“뭔가?”
“어제 진명규 부회장과 진명희 대표가 박상아 양을 만났습니다.”
진대운의 얼굴에 기쁨이 깃든다.
“허허. 이 친구야. 그런 게 있으면 먼저 설명부터 했었어야지!”
“죄송합니다. 하여간 정보팀의 말로는 정 실장과 최만식 대표가 매우 사이가 안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상아 양이 진명규 부회장과 진명희 대표와 손을 잡고 반 정윤호 동맹을 꾸리는 것 같습니다.”
“으하하하. 그래. 그럼 그렇지. 이 진대운의 핏줄들이 한 방 맞았다고 그리 쉽게 꼬리를 내릴 녀석들은 아니지!”
진대운의 얼굴에 흥분이 어린다.
이대로 후계자 싸움이 시시하게 끝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명규와 진명희는 차기 대통령의 딸과 손을 잡았다고 한다.
진대운은 그제야 진명규과 진명희가 왜 무리수를 둬서 TNT 엔터를 인수했는지 이해가 갔다.
바로 박상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석 실장은 몰래 명규랑 명희 쪽을 지원해줘. 이번 기회에 박상곤 의원 쪽에도 잘 보이고 후계 구도에도 밸런스를 좀 맞춰야겠어. 후계 싸움이 이렇게 쉽게 끝나는 거 재미가 없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그럼 출출한데 이젠 진짜라면이나 먹어 보자고.”
“바로 차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재벌의 총수와 그룹을 총괄하는 비서실장이 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 * *
진성식품 대표이사실.
나와 독대한 진성준 대표의 표정은 심각했다.
“정 실장님. 우리 회장님의 도움을 물리치시다니. 어쩌시려고 그러셨습니까?”
진성준 대표는 진성식품을 이용해서 나의 백기사가 되어 주려 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상황이다.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진 회장님의 백 기사는 결국엔 흑기사로 돌변했을 겁니다. 그땐 진 대표님만 곤란해지셨을 거고요.”
진성준 대표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가 다시금 입을 연다.
“후우~ 정 실장님 말이 맞습니다. 저희 아버지라면 그러실 수 있죠. 그렇다면······ 차라리 제 개인 자산으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회장님께서도 진성식품의 이름으로 투자하지 말라고 했지 제 이름으로 투자하지 말라고 하진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불호령이라도 떨어지면 어쩌시려고요?”
“어차피 아버지한테는 결과만 내면 됩니다. 그럼 승리한 쪽에 배팅했다고 칭찬을 하실걸요?”
진대운 회장은 어떤 의미로는 이해하기 쉬운 사람이다.
결과를 내면 과정은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진아람 진성 호텔&리조트의 대표대행이 뛰어 들어온다.
“오빠.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우리가 엔터업에 진출해······ 어? 정 실장님도 계시네?”
진아람 대표대행이 숨을 헐떡거리며 내게 말한다.
“정 실장님. 이거 저희가 한 거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압니다. 지금 회장님 뵙고 나온 길이거든요.”
진성준 대표도 내 말을 거든다.
“안 그래도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너도 앉아.”
진아람 대표대행이 숨을 돌리며 내 곁으로 다가와 털썩 앉는다.
그녀가 늘 뿌리고 다니는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온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오빠?”
“회장님이 진성의 이름으로는 굴렁쇠 엔터 지분을 매입하지 말라고 하셔서 내 개인 돈으로 투자하려고.”
“그러면 나도 개인 자금 넣을게.”
“너까지?”
“어. 당연히 도와야지. 정 실장이랑 우리는 이미 운명공동체잖아. 안 그래?”
“그렇지.”
두 사람이 눈빛을 반짝이며 내게 약속한다.
“저희 남매의 가용액을 다 퍼부어서라도 도와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재벌들의 가용액은 수백억이 거뜬히 넘어간다.
물론 그걸 다 내게 쓰진 않겠지만 어차피 개인당 살 수 있는 주식의 수가 한정되어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일을 정리하고 나자 진아람 대표대행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나저나 오늘 아침은 ‘진짜라면’ 어때요?”
진성준 대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아람이 네가 끓이려고?”
진아람 대표대행이 팔을 걷는다.
“어. 탕비실에서 끓여줄게.”
진성준 대표가 표정을 찌푸린다.
“그냥 비서실에다가 부탁할게. 너 생전 부엌이라고는 안 들어가 봤잖아.”
진아람 대표대행이 당황해서 외친다.
“오 오빠는 왜 그런 거짓말을 해?”
이후 진아람 대표대행는 내 쪽을 쳐다보며 손을 휘저으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정 실장님. 오빠가 농담하는 거예요. 저 라면 잘 끓여요. 그저 물을 맞추는 게 조금 힘들긴 하지만······.”
진성준 대표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라면 물 맞추는 게 전부인데 그걸 못하면서 잘 끓인다고오~?”
진아람 대표대행이 눈을 부라렸지만 진성준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렇게 노려봐도 네가 끓인 라면은 안 먹을 거야아~ 아침부터 팅팅 불은 라면 먹기는 싫으니까.”
“아 진짜 오빠. 정 실장님이 오해하시잖아!”
친남매가 맞긴 맞네.
이렇게 얄밉게 디스하는 걸 보니.
진아람 대표대행이 자기가 하겠다며 다시 말했지만 진성준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로 비서실에다가 라면을 부탁했다.
“라면 세 개 부탁해요. 꼬들꼬들하게요?”
결국 진아람 대표대행도 라면 끓이기를 포기하고선 계란을 넣어달라는 요구를 더한다.
잠시 후.
우린 리뉴얼된 진짜라면을 먹으며 진성그룹의 첫째와 둘째 그리고 TNT에 맞서는 라면 동맹을 맺었다.
* * *
진성식품에서의 일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젯밤 광고와 기사들 때문인지 회사 앞에는 연예인이 되고 싶다며 찾아온 지망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기획사 앞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오늘은 그 수가 너무 많았기에 연락처만 받고 돌려보냈다.
비가 주룩주룩 폭우처럼 내리고 있어서인지 평소와는 달리 다들 별 군말 없이 돌아갔다.
이후 사무실로 올라온 난 급한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폰에서 진동이 울리면서 오늘의 운세가 떠버렸다.
[에브리데이 V13]
[날짜 : 2021년 3월 11일]
[오늘의 운세 : 전생의 악연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모든 인연은 노력하기에 달렸다. 운명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회귀 전 나는 원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과 악연으로 얽혔었다.
그렇기에 이 내용만으로는 누굴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만큼은 가슴에 와닿았다.
인성이 그른 인간만 아니라면 이번 생에선 그 악연을 좋은 인연으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 온다.
이영진이 전화를 받더니 날 쳐다본다.
“실장님. 1층 로비에 실장님을 찾는 손님이 왔다는데요?”
날 찾는 손님?
설마 에브리데이가 말한 악연인가?
“누군데?”
“그건 말 안 하는데 좀 내려와 보셔야겠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내려가?”
“꼴이 말이 아니라는데요? 지금 실장님이 안 내려오시면 경찰에 신고해야 할 정도로요.”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말 못 할 정도로 엉망이라고?
“아니면 제가 내려갈까요?”
“아냐. 날 아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내가 내려가야지.”
난 그 즉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띠잉.
로비로 내려가자 경비원들이 말한 여자가 한눈에 보인다.
큰 키를 가진 여자가 얇은 옷 하나를 걸친 채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서 비를 쫄딱 맞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가출한 듯 엉망인 모습이지만 축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도 또렷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미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경비원의 말대로 내가 아는 사람이다.
‘장소연? 네가 여긴 어떻게······.’
그녀는 탑 엔터테인먼트 시절 소이영 민규리와 함께 우환 삼 대장이라 불리던 녀석이다.
‘그런데······ 날 알고 있다고? 이번 생에선 만난 적도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