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화
‘어쩌면 이건 내 탓일지도 모른다·’
처참한 궁전의 모습에 세비우스는 깊이 반성했다·
궁전을 반파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후배만 먼저 잠입시키다니·
최소한 다른 선배 한둘을 하인으로 위장시키더라도 같이 보냈어야 했다·
그래야 사고가 일어나기 전 막았을 텐데···!
“세비우스! 정신 차려!”
“듣고 있다·”
“지금 해야 할 건 하나밖에 없잖아!”
“그래· 빨리 후배를 찾아서···”
“우리가 관련되었다는 증거를 없앤 다음 도망치자고!”
“······”
위치 이동 클럽 학생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에인로가드 정신을 잃지 않았다·
증거만 없애면 무죄 아니겠는가·
연극 클럽과 연관된 증거만 없애고 도망치면···!
세비우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그건 소용없지· 생각해봐라· 지금 그랑덴 시에 나온 에인로가드 학생이 몇이나 된다고·”
“연 연극 클럽 놈들이 했다고 해도 되잖아·”
“연극 클럽 놈들이 비밀을 지키진 않겠지· 이제 와서는 늦었다· 후배나 찾자고·”
“크윽···! 나 이번 달은 징벌방 가면 안 된다고! 졸업해야 한다니까!”
세비우스의 친구들은 징징대며 뒤따라왔다·
친구들과 달리 졸업 준비는 평소에 해두는 세비우스는 냉정하게 주변을 확인했다·
‘뭐지? 다른 곳에서 온 마법사들인가?’
확인해보니 다리 근처에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보였다· 들고 있는 아티팩트나 지팡이의 구성을 보니 환상 마법 학파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번 연극에 참가한 마법사들일 수도 있겠군·’
잘 됐다고 생각한 세비우스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궁전이 반파된 건 역시 마법사들에게도 충격이었는지 이들도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환상도 나고 가문의 스테달과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이 준비했단 말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허어· 둘 다 사라졌다니··· 연극을 관람한 호사가들과 비평가들이 이번 환상 마법을 준비한 마법사들을 꼭 만나고 싶어하던데···
“혹시 질문 좀 해도 되겠습니까?”
세비우스는 정중하게 로브를 푹 눌러 쓴 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네네넵?”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질문에 발도르오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초월자들의 전투 때문에 손끝이 떨리는 느낌이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못··· 못 들으셨나요? 여기서 악신숭배자들이 괴물을 소환했는데요·”
“!?!”
학생들은 경악했다·
그 중 한 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설 설마 아무리 그래도 후배가 그런 짓까지 하지는 않··· 않···”
세비우스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 악신숭배자들의 정체는 확인됐습니까?”
“아· 네· 전부 죽었다고 들었어요·”
뒤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후배가 한 게 아니었구나!!
발도르오른은 그 한숨의 의미를 오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사악한 자들이 도망치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때문에 다행인 게 아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괴물은 죽음의 기사들이 처리한 겁니까?”
“죽음의 기사들과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 님 나고 가문의 스테달 님이 처리하셨죠·”
“···어 나고 가문의 스테달이요?”
학생들이 멈칫하자 발도르오른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아주 강력한 전투 마법사인데 궁전에 방문한 것도 아마 이런 일을 대비해서 알시클과 같이 온 게 아닐까 싶다·
소환된 모독자를 강력한 정령왕과 함께 쓰러뜨렸는데 정말로 신화적인 광경이었다···
“와· 그런 마법사가 있었군요?”
“제국에는 참 기인이사가 많다니까·”
발도르오른의 설명에 학생들은 흥미로워했다·
제국은 넓었고 이름도 붙지 않은 미지의 땅에서 수백 년 넘게 수련한 마법사가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렇죠? 참· 최근에 있었던 그랑덴 시의 의적도 이 분이라고 하시더라고요·”
“······”
“······”
학생들의 얼굴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 * *
“크윽! 영웅적인 일을 했는데 왜 도망쳐야 하는 거냐!”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이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알시클을 쳐다보았다·
치열한 마법 시전 이후 달리기까지 한 알시클은 땀범벅이 되어 거센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쉬었다 가자!”
알시클은 버둥거리는 펭귄처럼 허우적대며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결국 이한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헉 헉··· 좀 더 있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기사들이 마음 바꿔서 저 잡아가면 책임지실 겁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이한이 궁전을 서둘러 빠져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데스 나이트들이 마음을 바꿔서 이한을 징벌방에 보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이 그 자리에서는 모르는 척을 해줬지만 페르쿤트라까지 소환됐는데 못 알아봤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봐줬잖아? 내가 저번부터 말한 건데 데스 나이트들이 너를 은근히 존중해준다니까·”
“하· 알시클 님· 그게 함정이란 말입니다·”
이한은 ‘이래서 비 에인로가드 출신들이란’하는 눈빛으로 알시클을 쳐다보았다· 알시클은 살짝 울컥했다·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 나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됐었잖아?’
설령 데스 나이트들이 생각을 바꿔서 이한을 붙잡아 징벌방으로 데리고 간다 하더라도 알시클은 별 상관이 없었다·
“교장 선생님의 하수인들이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줘도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완전히 방심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이 적이 노리는 순간입니다·”
“일리가··· 있긴 하군·”
해골 교장의 성품을 알고 있는 알시클은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알시클이 보기에 데스 나이트들은 이한을 이미 거의 후계자로 보고 존중해주는 것 같았지만 그것 또한 함정일 수 있었으니까·
“도련님· 여기입니다!”
열린 마차 문 너머로 아리언과 아무르가 팔을 흔들었다·
적을 쓰러뜨린 뒤 몰래 탈출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걸 들어준 것이다· 둘은 서둘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대체 뭘 하신 겁니까?! 동쪽 끝의 성문부터 서쪽 끝의 운하까지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리언은 황당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한은 알시클을 쳐다보았다· 알시클은 이한을 쳐다보았다·
“···아· 저한테 하신 말씀이군요·”
‘그럼 너지 나겠냐?’
알시클은 어이가 없었다· 이한은 겸연쩍어하며 설명했다·
“예상 밖의 일이 벌어져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예상 밖의 일이었겠죠···”
어제 있었던 일을 예상하고 벌인 거라면 아리언은 정말로 쓰러졌을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무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빠져나갔다니 잘 된 일이오·”
“그건··· 그건 그렇지만···”
아리언은 악신숭배자들과 목숨을 걸고 다툰 뒤 ‘그래도 학생들은 빠져나갔네 하하’로 이 일을 마무리 지어도 되나 싶었다·
“이렇게 위험한 일이었으면 저는 절대로 안 데려다 드렸을 겁니다! 만약 문제라도 생겼다면 워다나즈 가문에서 절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제 부탁을 들어주신 친절한 분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만···”
“농담하시지 말고요!”
‘농담 아닌데·’
이한은 그 뒤로 아리언에게 30분 정도 훈계를 들어야 했다·
학생은 위험한 일이 생기면 물러나야 하고 다른 마법사들을 불러야 하며···
그 훈계를 들으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음· 아리언 님이 이 정도면 가르시아 교수님은 한동안 피해다녀야겠군·’
아리언이 이렇게 반응할 정도면 가르시아 교수의 반응은 몇 배 정도 더 사나울 수 있었다·
이한은 한동안 <오만가지 꿍꿍이 여관>은 피해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위치 이동 클럽 의뢰는 전부 마무리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휴· 그런 격전을 겪은 분들에게 이런 설교를 길게 하면 안 되겠지요· 죄송합니다· 그래서 두 분께서는 이제 뭘 할 생각이십니까?”
“일단 흩어진 친구들을 찾은 다음 알시클 님의 후원자들을 찾아볼 생각이었습니다만·”
“너···!”
알시클은 감동했다·
그 난리가 났는데도 약속한 걸 잊지 않고 있었다니·
“···아니 알시클 님· 설마 우시는 거 아니죠?”
“펭귄 수인들의 눈동자가 원래 초롱초롱 반짝여서 그래!”
알시클은 벌컥 화를 냈다· 더 물어봤다가는 부리로 쪼아댈 것 같은 기세에 이한은 일단 넘어갔다·
“너 시간은 괜찮냐?”
“아· 네· 워낙 클럽에 가입 많이 해서 외출 기간은 넉넉합니다·”
친구들이야 제각기 복귀해야 하겠지만 이한은 아직도 남은 기간이 넉넉했다·
먼저 도시 곳곳으로 탈주한 친구들을 도와준 뒤 알시클의 일까지 처리해도 여유가 있으리라·
“머물 곳부터 구해야겠네요·”
“그러면 숙소를 구해보겠습니다·”
“아 아니· 그건 좀···”
이한은 아리언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지금까지 도와준 것도 고마운데 이한과 친구들이 머물 숙소까지 제공해준다니· 그건 너무 뻔뻔한 짓이었다·
“아냐·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알시클은 진지하게 권했다·
“어째서입니까?”
“데스 나이트들이 도시의 여관을 돌면서 확인할 수도 있잖아·”
“···!”
생각해보니 정해진 위치에서 탈주한 연극 클럽 학생들을 찾기 위해 추적이 붙을 수도 있었다·
고민하던 이한은 역으로 제안했다·
“혹시 상단에 남는 창고 같은 건 없습니까?”
“창고야 많지만 굳이 그런 곳에 머무실 필요는···?”
“아닙니다· 그리고 추적을 생각하면 창고가 더 좋을 수도 있거든요·”
아리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이란 참으로 괴짜들이라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요·”
이한은 <에인로가드의 속삭임>을 꺼내 같은 학년 친구들에게 연락을 준비했다·
<에인로가드의 파수꾼> 클럽이 아니라 아덴아르트나 앙라고 같은 친구들이 소속되어 있는 연락망도 있었던 것이다·
-애들아· 북문 쪽 드워프 다리 옆에 있는 카아코 상단 창고로 모여라· 거기 써도 된다고 허락 받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갑작스럽게 종이 뭉치에 연락이 오자 지젤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연극 클럽이 아니라 상황 파악이 덜 된 것이다·
앙라고는 서둘러 답장했다·
-알겠어! 그쪽으로 갈게!
-무슨 소리냐니까·
-그러니까 그게··· 잠깐· 네가 밀고하면 어떡해?
-···알파 너 정신 나갔냐?
-나 나 알파 아닌데??
‘글씨체가 똑같잖아···’
스스로를 부정하는 앙라고의 모습에 어이없어하며 이한이 대신 설명했다·
-연극 클럽이 지금 혼란을 틈타 탈주했다· 제한 시간까지 돌아다니다가 귀환하려고·
-뭐? 연극 클럽 들어갈 거 그랬군· 어떻게 그 포위망에서 도망쳤지? 불이라도 질렀나?
-어···
-음···
-그게···
-···뭔데?
-이야기하면 좀 길어서 나중에·
-지금 말하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 진짜 길어서 그래·
-하!
지젤은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만약 길지 않은 이야기라면 이 거짓말쟁이들에게 호되게 보복하리라·
-워다나즈·북문쪽드워프다리에창고가여러개있는데이중어디로가야할지모르겠습니다혹시어떻게알아볼수방법이없을까요??
-···제가 마중 나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한은 그렇게 쓴 뒤 아리언에게 부탁했다· 종이 뭉치가 없는 친구들은 따로 데리고 가야 했던 것이다·
“창고에 도착하기 전에 몇 군데 들려도 됩니까?”
“물론이지요· 어디에 들르실 생각이십니까?”
“먼저 메이킨 가문의 요아넨 님이 운영하는 연금술 공방에 들린 뒤 달카드 가문의 다이할 님이 계시는 행정관저로 가시죠· 제 친구들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알시클은 그 주도면밀함에 감탄했다·
“이야· 그 난리통에 위치까지 정해놓은 거야?”
“네? 아닌데요·”
“그러면?”
“그냥 예측한 거죠·”
이윽고 마차가 목적지에 멈추자 숨어 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정확히 튀어나왔다· 이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문을 열며 환영했다·
그 모습에 알시클은 전율했다·
‘이··· 이 녀석이 교수가 되면 학생들은 도망도 못 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