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0화
미친 분신이 직접 가르쳐 준 <폭주한 아지르모의 환상>은 실로 위협적이었다·
시커먼 비늘을 꼿꼿이 세우며 포효하는 그 모습은 데스 나이트들마저 순간 당황할 만큼 진짜 같았다·
-주인님께서 남겨놓으신 건가?
같 잖 게!
모독자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차원문 안에서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상대가 정말로 강력한 드래곤이라면 서둘러서는 안 됐다· 경솔하게 움직였다가 치명타를 맞을 수 있었다·
* * *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지금 좋아하시는 거 아니죠?”
알시클의 환호에 이한은 황당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허공에서 고위 언데드가 등장했을 때 궁전에서 가장 먼저 알아차린 마법사는 이한이었고 그 다음은 알시클이었다·
차원이 흔들릴 때 느껴지는 오염된 마력의 파동만으로 상황을 깨달은 것이다·
-어떻게!? 접근도 하지 않았는데?
-일단 막아야 합니다! 놈이 내려오면 여기 천장에 직격이에요! 쓸만한 마법 없습니까?
-저렇게 강력한 놈을 막아낼 정도의 마법이 그리 쉽지··· 아! 이거! 이걸 쓰자!
정말 다행히도 둘에게는 <폭주한 아지르모의 환상>과 <분노공의 환영 강림>이 있었다·
연극에 쓰려고 준비한 마법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폭주한 아지르모의 환상>을 시전했다·
거대한 드래곤의 환영은 무대 위와 좌석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의 포효를 터뜨리더니 천장을 뚫고 상승했다·
위로 올라가 확인하니 차원문에서 내려오려던 모독자가 일단 관망세로 태세를 전환한 게 보였다·
“물 물론 아니지! 미친 악신숭배자 놈들 같으니! 어떻게 이런 소환을 성공시켰지??”
알시클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환호한 게 멋쩍었는지 말을 돌렸다·
‘확실히·· 진짜 어떻게 성공한 거지?’
이한도 이제 나름 마법사인 만큼 방금 일어난 소환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접근도 없었고 준비 과정도 없었다·
접근?
데스 나이트들이 궁전 근처를 은밀히 포위하고 지키고 있었는데 누가 접근할 수 있었겠는가·
준비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하찮은 참새 정령 하나를 소환해도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저 정도 되는 존재가 이렇게 그냥 툭 튀어나오다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그 그렇지· 가자!”
알시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시간을 끌려고 했던 건 궁전 안의 관객들 때문이었다·
몇몇 데스 나이트들도 시간을 번 사이 서둘러 궁전 안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여러분 대피하십···”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
다시 내려온 둘은 우레 같은 박수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악신숭배자의 저주인가?!’
“이렇게 참신한 재해석을 할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한 변주 아닌가? 드래곤이라니? 크고 아름다운 생물을 등장시키면 극이 강렬해진다는 유치한 발상이야!”
“유치한 건 당신이겠지! 알카르마타 가문이 드래곤과 인연이 있었다는 건 현재 제국 역사학에서 가장 뜨거운 최신 가설이야! 이 연극은 그걸 과감하게 차용한 거지· 이게 바로 예술 아니겠나!”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드래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물론 무대 위의 배우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드래곤이 나와서 천장으로 솟구쳤으니 저러는 것도 당연했다·
이한은 속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피! 대피! 대피!
-모두들 빠져나가십시오!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관객들을 최대한 멀리 쫓아내라! 말 안 들으면 무력을 써도 좋다!
천장에서 내려온 데스 나이트들이 뒤늦게 대피를 명령했다·
훌륭한 연극의 하이라이트를 즐기고 여운에 잠겨 있던 관객들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입니까?”
“악신숭배자들이 습격해왔습니다! 대피하셔야 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이런 걸작을 막아!?”
관객들 중 몇몇은 위험이 닥치더라도 이 걸작의 끝을 봐야겠다고 항의했지만 학생들은 바로 발로 걷어차서 쫓아냈다·
닐리아가 세 명을 동시에 걷어차자 옆에 있던 귀족들이 탄성을 질렀다·
“저게 북부 산맥 순찰대의 발차기···”
“움직이라고요!”
“아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연극에 미쳐서 목숨을 걸지는 않았다· 극장을 빠져나가려는 관객들 중에서는 위에서 들리는 굉음과 진동에 겁을 먹는 사람도 나왔다·
“경 괜찮으십니까?”
“괜 괜찮네· 숨이··· 숨이 안 쉬어져서···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야·”
“물약! 화장실 가서 물약 갖고 와!”
“쉿· 조용히 말해 멍청아! 화장실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잖아!”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가 아까 몰래 만들어 둔 물약을 통째로 갖고 왔다·
이들은 작은 솥을 허공에 띄운 뒤 쓰러진 사람들에게 마시게 하거나 패닉에 빠진 사람들의 얼굴에 끼얹었다·
덕분에 급히 대피하느라 어수선해진 사람들의 행렬에 질서가 잡혔다· 아산은 텅 빈 솥 바닥을 국자로 긁으며 외쳤다·
“물약 다 썼습니다!”
“이제 안 써도 될 거 같다· 다들 괜찮···”
“아닙니다!”
관객 중 한 명이 학생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손가락에 얼룩덜룩한 흉터가 남아 있는 걸 보니 누가 봐도 연금술 관련자였다·
“지금 이 사태가 어떻게 커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만일을 대비해서 물약을 더 만들어놔야 합니다!”
궁전 위에 나타난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는 몰라도 그 불길한 위압감만큼은 확실히 사람들을 자극했다·
데스 나이트들이 저 적을 궁전 위에서 끝장낼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다른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치유 물약부터 시작해서 각종 상태 이상에 대비하는 물약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놔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희는 갖고 나온 재료가 이제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닐이라고 합니다· 메이킨 가문의 연금술 공방에 시약을 납품하고 있지요· 시약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나도 돕겠소! 나는 연금술 도구를 납품하고 있으니!”
대피하던 관객들은 즉석에서 의기투합한 뒤 에인로가드 학생들을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흐름에 휩싸여서 끌려가던 물약 탈주 파티 소속 학생들은 문득 깨달았다·
‘···어 이거 물약 다 만든 다음에 그냥 빠져나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설마 워다나즈가 말한 게 이런 거였나?!
* * *
-학생들은 관객을 데리고 빠져나가라!
귀족 현혹 파티 소속 학생들은 서둘러 관객들을 데리고 나왔다·
마차의 문을 열고 탈것들을 진정시킨 뒤 관객들을 구겨 넣자 사람들은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같이 가주시오!”
“예? 저희 지금 남아서 기사님들 도와드려야 합니다!”
“하 하지만! 밖에 적들이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잖소!”
“기사님들이(저희의 탈출을 막으려고) 확실하게 순찰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겁에 질린 관객들은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옆에 있어주길 원했다·
데스 나이트들은 거칠게 외쳤다·
-호위해드려라!
“예?”
-환상 마법사들도 같이 나가시오! 관객들을 호위해서 각자 대피시키도록!
궁전 위에 정신이 팔린 데스 나이트들은 더 이상 반문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 날아가 버렸다·
허락도 떨어졌겠다 관객들은 학생들을 하나씩 붙잡아 마차에 태웠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학생들은 겁에 질린 관객들과 일부 환상 마법사를 달래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잠깐· 이거 워다나즈가 말한 계획과 비슷한 것 같은데·’
여기까지 생각하고 계획을 세웠단 말인가?!
* * *
살코가 속한 드워프 땅굴 파티는 가장 까다로운 관객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바로 이 와중에 구경하려는 미친 작자들이었다·
“크윽! 안 돼! 연극의 끝을 보겠다!”
“배우들도 다 나갔다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궁전 천장이 흔들리고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더욱 시끄러워지는데 고집을 세우는 자들을 보자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쩔 수 없군· 에인로가드 방식대로 처리해라·”
“그게 뭐지? 투명 마법을 걸고 관람하게 해주는 건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귀족들은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오는데도 무슨 위협이 오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바로 그 때 궁전의 천장이 찢겨나갔다·
속 임 수!
그제야 속은 걸 깨달은 모독자가 분노를 터뜨리며 다시 강림한 것이다·
처음에는 드래곤이 정말 매복해있었나 싶었는데 차원문 뒤에서 미적거리는 동안에도 드래곤은 덤벼들지 않았다·
진짜 드래곤이라고 하기에는 과한 신중함이었다· 모독자는 부패의 안개로 궁전의 천장을 날려버리며 몸을 차원문에서 비집어 뺐다· 거대한 뱃살에 달린 거대한 눈동자에서 굴욕과 분노가 번뜩였다·
“한 번 더!”
“하지만 놈이 속을까?”
“손해 볼 거 없잖습니까?”
“맞는 말이야! 시전한다!”
알시클은 <분노공의 환영 강림>을 시전했다· 마법진이 새겨진 바닥이 마력의 충격으로 으깨져나가더니 거대한 악마가 궁전 안에서 뛰쳐나왔다·
모독자는 경악해서 다시 물러났다·
다른 존재라면 모를까 악마는 제국의 손꼽히는 대마법사들이 자주 부리는 하수인이었다· 결코 얕볼 수 없었다·
“악··· 악마까지!”
“저건 연극 내용 아닙니다!”
학생들이 외쳤지만 이미 몰입한 관객들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살코는 선배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지팡이가 퍽 소리와 함께 휘둘러졌다·
“데리고 나간다!”
“정문 쪽으로 갈까요?”
“아니· 늦었어! 일반인을 보호하면서 싸우기는 힘들다· 땅굴로 빠져나가자· 바로 완성할 수 있지?”
“예!”
모독자의 군세가 궁전 곳곳에 떨어지는 걸 본 선배들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여기 남은 관객들이 마지막이었으니 땅굴로 빠져나가는 게 맞았다·
“일단 여기 놈들을 저택으로 돌려보내준다·”
“알겠습니다· 그런 다음 필요한 만큼 금화를 뺏습니까?”
“······”
선배들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살코를 쳐다보았다· 살코는 재빨리 변명했다·
“농담이었습니다·”
“하하! 재밌는 농담이었어!”
* * *
“다 빠져나간 거 같은데· 우리도 참전하자·”
“예!”
“···잠깐· 내가 지금 흥분해서 대충 말한 것 같은데· ‘우리’가 아니라 ‘나’를 말한 거ㅇ···”
알시클은 바로 제정신을 차리고 이한에게 말했다·
지금 스테달의 겉모습이 냉소적이고 거친 인상을 가진 귀족이라 순간 착각했는데 이한도 원래 대피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이한은 알시클의 말을 듣기도 전에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샤르칸!”
이한의 위로 연기를 토해내는 흑요석 거울의 형상이 생기더니 차원문이 쪼개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죽음과 어둠의 맹수가 함성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모독자! 저번에 맹수의 몰락을 잘도 조롱했겠다?!
고 양 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언데드계의 강자들은 살기를 쏘아냈다·
맹수는 샤르칸이 걱정된다고 징징대는 소리를 무시하며 모독자를 노려보았다·
-놈의 힘이 강대하다· 너 마법사여· 맹수를 오래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빠르게 끝을 봐야 한다·
“괜찮으니 천천히 싸우십시오! 절대로 서두르지 마시고!”
이한은 그렇게 말하며 다음 소환을 준비했다·
그 태도에 죽음과 어둠의 맹수는 거대한 눈동자를 끔뻑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